[ICON]Mather of God of the intercession with Saints.
XVII century Tret’Jakov Gallery, Moscow.
313년 콘스탄티노 대제가
로마 제국 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허가한 후부터
교회는 날로 번성하여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한편 여러 이단자들이 나왔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참된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진력한 교회 학자가 여러 명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성 치릴로 총주교이다.
치릴로는 북부 아프리카의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370년에 태어나
청년 시대로부터 성직자가 되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우선 고향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한 후 수양하기 위해
잠시 이집트의 수사들과 같이 생활하고,
다시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의 슬하에는 그의 교육을 받았다.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데오필로가 서거하자
치릴로는 그 후임으로 선발되어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노바투스 이단이 일어났으므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압력을 가하고
그 교회의 폐쇠를 명했다.
그는 그로 말미암아 이단자들의 원망을 들어도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그만큼 교회를 옹호하는데 그의 결의는 강했던 것이다.
그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대한 태도도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아직 데오필로 총주교가
살아계시는 동안 치릴로는 그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종교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석상 토론이 있은 후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설이 이단이라고 할 때
그도 거기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단자가 아니란 것이
교회에서 인정되고 사후
성인품에 오르게 된 후에도
치릴로의 그에 대한 의혹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아 자기 교회의
성인 명부에는 그의 이름을 실리지 않고 있었다.
이것도 그의 열렬한 호교 정신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차차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이단자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자 치릴로는 오랫동안
그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을 후회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힘 있는 데까지 노력했다.
이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교-가톨릭교의 진리를 열렬히 사랑하던 그는
이단이나 이교의
그릇됨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서적을 저술하며 종종 설교도 하는 동시에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단연 권위자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사(敎會史)에 그의 이름을
영구히 보존케 하는 그의 최대의 공적은 무엇보다도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물리친 사실이다.
네스토리우스는 429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로 있었던 자로서 그 후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의 일치에 대하여 이설을 주장하며,
또 성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강론으로나 저서로
이단을 선전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신자들은 이런 이단설을 듣고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치릴로는 이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중대사라고 생각하고 분연히 일어나서
그 해 부활축일의 강론 때 네스토리우스의 설을 반박하고
아울러 이집트의 수사들에게도
서간을 보내어 엄중히 경고했다.
그렇지만 상대자가 총주교의 중직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 나머지
그의 이름은 특별히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간 네스토리우스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두 번이나 서한을 보내어
그의 그릇된 설을 취소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서에는 악의가 충만한 모역적인 언사로 가득 차 있었다.
할 수 없이 치릴로는 이 사실을 로마 교황 첼레스티노에게 보고했다.
교황은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파문할 것과
또한 이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그에게 일임한다는 뜻을 써 보냈다.
이것을 들은 네스토리우스는 분개하여 황제에게 고소했으므로
황제는 이를 조정할 목적으로 주교 회의를 소집했다.
이것은 교회사상 유명한 441년의 에페소 공의회인데,
치릴로는 이 석상에 교황 대리로서 참석했던 것이다.
회의 결과 대다수의 주교가 네스토리우스의 설이 그릇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후 그 이단에 주교가 네스토리우스의 설이 그릇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후
그 이단에 가담하는 자는 파문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결의하고, 또한 성 마리아는
참된 의미로 ‘하느님의 모친(테오토코스)’이라는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로서
황제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을 기회로
치릴로를 허위 고소했으므로 황제는
이를 곧이 듣고 2개월간이나 그를 감옥에 가두고
여러모로 고통을 주었고 간신히 여동생 부르게리아 공주의 알선으로
그를 석방했지만,
치릴로는 중한 형벌과 심중한 타격으로
신심이 모두 허약해져 자신의 주교좌인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네스토리우스의 설을 이단이라고 결정 선언한 후에도
그를 신봉하는 자는 좀체 끊이지 않았다.
치릴로는 미궁에서 헤메는 양들을 돌아서게 하기위해 서한으로,
강론으로 모든 힘을 경주하면서 그들을 깨우쳤다.
성 치릴로가 “성모 마리아의 신학 박사”라고 칭함을 받은 것은 물론
주로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에 대한 신학상의 공로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성모께 관한 신앙개조를 명백히 결정하는 사명을
하느님께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32년간 총주교직에 있다가 444년에 서거했다.
치릴로는 교황 레오 13세에게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또한 교회사상 동 로마의 5인의 교부 중의 한 사람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에페소공의회
라틴어 Concilium Ephesinum 영어 Council of Ephesus
Council of Ephesus(431년)
네스토리우스파와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소집된 제3차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인솔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성 첼레스 티노 1세의 대표들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에페소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주된 적수 인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채 회의를 개막하여 버렸다.
거기서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교구 콘스탄티노플에서 해임되었으며
그 자신은 파문당하였고
그의 교리는 단죄되었다. 또한 니체아 신경이 재확인되었다.
도착 하여 그사실을 들은 시리아의 주교들은
치릴로의 처사에 항의하는 테오도레트 및 다수와 규합하여
그들에 대항하는 회의를 열고 거기서 치릴로와 멤논을 파문하였다.
에페소 공의회는 8개의 교회법을 제정하였는데, 첫 7개는
교리적 의문점들로부터 야기된 분 제들을 다루었고,
나머지 하나는 치프로스의 행정적 권리를 다루었다.
433년 요한과 치릴로는 마침내 화해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아리우스주의
라틴어 Arianismus 영어 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 삼위 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 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 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