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공간 ▒▒/∞·오늘의성인

6월 27일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Berardus 2022. 6. 26. 17:36


 
6월 27일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St. Cyril of Alexandria
St. Cyril of Alexandria B, Doctor (RM)
San Cirillo d"Alessandria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 376 at Alexandria, Egypt
Died: 444 at Alexandria, Egypt of natural causes; relics in Alexandria
Cirillo = che ha forza, signore, dal greco



성인들이 처음부터

그들의 머리 둘레에 후광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위대한 스승으로 알려진 치릴로는 충동적이고

때로는 난폭하기까지 할만큼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412년 테오필로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대주교가 된 그는 노바시아노파의 이단 교회들을 약탈하고 폐쇄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한 데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신학과 교회 역사에서 치릴로의 중요한 점은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거슬러 정통 교리를 옹화하기 위해 투쟁한 데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 중 하나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잉태한 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피상적으로만 결합된 그리스도 안에는 별개의 위격이 둘이 있다면서
"하느님을 잉태한 자"란 말보다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자"라는 말을 주장하였다.

그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신전일 뿐이라고 했다.
네스토리아니즘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단순한 가면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교황을 대리하여 회의를 주재한 치릴로는
네스토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마리아가 참으로 "하느님을 잉태한 자"
-참으로 하느님이고 참으로 인간이신 한 위격의 어머니-임을 선포했다.

그러자 혼란이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치릴로는 파면되어 세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나중에는 제2의 아타나시오-아리아니즘을 반박한

투사-로 환영을 받으며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편에 서 있던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견을
누그러뜨리는 과정에서 자기가 교리의 용어만이 아니라 정통성까지 희생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타협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편의 몇몇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완화 정책 덕분에 극단적인 파벌이 억제되고 있었다.
치릴로는 죽음 앞에서까지 압력을 받으면서도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기를 거부했다.



성인들의 생애는 그들이 보여준 덕행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특징까지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성덕이란 인간 존재인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생활이란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에 응답하지만 때로는 끝없이 갈팡질팡하면서 따른다.

만일 치릴로가 좀더 인내롭고

좀더 외교적이었다면 네스토리아니즘 교회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렇게 오랫동안 세력을 떨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들이라도 편협함과 이기심 그리고 미성숙 속에서

성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참으로 성인, 즉 하느님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된다.


치릴로의 논지는 이러하다.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 자신의 몸이어야만 인간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에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육이 되신 말씀과

우리의 혈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성체 성사는 말씀과 우리의 혈연을 완성시키며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일치시키고
상통하게 하며 하느님의 본성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몸과 말씀의 몸이 갖는 참되고 실제적인 접촉이 있는 것이다."

(New Catholic Encylopedia)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1: PG 77,14-18.27-30)

동정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이시다.

어떤 이들이 거룩한 동정녀께서

과연 천주의 모친이라 불리울 수 있는가 하고
의심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매우 놀랐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면
왜 그분을 낳아 주신 거룩한 동정녀를 천주의 모친이라 할 수 없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이 어휘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전수해 준 신앙 교리입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교부 아타나시오도 그의 저서 [삼위일체론] 제 3장에서
거룩한 동정녀를 몇번 천주의 모친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여기서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몇 번 지적한 것과 같이 성서에 나타난 목적과 특징은

구세주 그리스도에 관해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는 점입니다.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말씀,

성부의 광휘와 지혜로서 하느님 자체이시고
또 항상 하느님으로 계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오는 또 몇 가지를 이야기한 다음 이렇게 덧붙입니다.
"온갖 죄에서 벗어난 거룩한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 때부터 거룩하게 되었고,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천주의 모친’이신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 뛰놀았습니다.

" 아타나시오는 뛰어난 분이고 우리가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는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 교리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인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사람이 되셨다고,
즉 말씀께서 이성적 영혼을 지닌 육신과 결합하셨다고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중 한사람을 택하여 한 여인의 몸에서
육신을 이루시고 그 여인의 살과 피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분께서는 하느님만이 아니시고, 이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두 가지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이신 오직 유일한 분이시며,
또 실제로 한분뿐이신 참된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신이 되신 사람이 아니시고,
우리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참된 하느님이십니다.

바울로는 이를 증언합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Mary, Mother of God:1월1일.게시판1547번.
*한국교회의 수호자.복되신

동정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대축일:12월8일.게시판1511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축일:9월13일.게시판1363번.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축일:5월2일.게시판1742번.
*성 예레미야 예언자 축일:5월1일.게시판174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ICON]Mather of God of the intercession with Saints.
XVII century Tret’Jakov Gallery, Moscow.

313년 콘스탄티노 대제가

로마 제국 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허가한 후부터
교회는 날로 번성하여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한편 여러 이단자들이 나왔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참된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진력한 교회 학자가 여러 명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성 치릴로 총주교이다.
치릴로는 북부 아프리카의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370년에 태어나
청년 시대로부터 성직자가 되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우선 고향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한 후 수양하기 위해

잠시 이집트의 수사들과 같이 생활하고,
다시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의 슬하에는 그의 교육을 받았다.

412년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데오필로가 서거하자

치릴로는 그 후임으로 선발되어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노바투스 이단이 일어났으므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압력을 가하고

그 교회의 폐쇠를 명했다.
그는 그로 말미암아 이단자들의 원망을 들어도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그만큼 교회를 옹호하는데 그의 결의는 강했던 것이다.

그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대한 태도도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아직 데오필로 총주교가
살아계시는 동안 치릴로는 그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종교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석상 토론이 있은 후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설이 이단이라고 할 때

그도 거기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단자가 아니란 것이

교회에서 인정되고 사후
성인품에 오르게 된 후에도

치릴로의 그에 대한 의혹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아 자기 교회의
성인 명부에는 그의 이름을 실리지 않고 있었다.
이것도 그의 열렬한 호교 정신의 발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차차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이단자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자 치릴로는 오랫동안
그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을 후회하고 기회 있는 대로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힘 있는 데까지 노력했다.

이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교-가톨릭교의 진리를 열렬히 사랑하던 그는

이단이나 이교의
그릇됨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서적을 저술하며 종종 설교도 하는 동시에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단연 권위자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사(敎會史)에 그의 이름을
영구히 보존케 하는 그의 최대의 공적은 무엇보다도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물리친 사실이다.

네스토리우스는 429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로 있었던 자로서 그 후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의 일치에 대하여 이설을 주장하며,

또 성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강론으로나 저서로

이단을 선전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신자들은 이런 이단설을 듣고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치릴로는 이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중대사라고 생각하고 분연히 일어나서
그 해 부활축일의 강론 때 네스토리우스의 설을 반박하고

아울러 이집트의 수사들에게도
서간을 보내어 엄중히 경고했다.
그렇지만 상대자가 총주교의 중직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 나머지

그의 이름은 특별히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간 네스토리우스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두 번이나 서한을 보내어

그의 그릇된 설을 취소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서에는 악의가 충만한 모역적인 언사로 가득 차 있었다.

할 수 없이 치릴로는 이 사실을 로마 교황 첼레스티노에게 보고했다.
교황은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파문할 것과

또한 이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그에게 일임한다는 뜻을 써 보냈다.
이것을 들은 네스토리우스는 분개하여 황제에게 고소했으므로

황제는 이를 조정할 목적으로 주교 회의를 소집했다.

이것은 교회사상 유명한 441년의 에페소 공의회인데,

치릴로는 이 석상에 교황 대리로서 참석했던 것이다.
회의 결과 대다수의 주교가 네스토리우스의 설이 그릇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후 그 이단에 주교가 네스토리우스의 설이 그릇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후
그 이단에 가담하는 자는 파문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결의하고, 또한 성 마리아는
참된 의미로 ‘하느님의 모친(테오토코스)’이라는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로서

황제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을 기회로
치릴로를 허위 고소했으므로 황제는

이를 곧이 듣고 2개월간이나 그를 감옥에 가두고
여러모로 고통을 주었고 간신히 여동생 부르게리아 공주의 알선으로

그를 석방했지만,
치릴로는 중한 형벌과 심중한 타격으로

신심이 모두 허약해져 자신의 주교좌인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네스토리우스의 설을 이단이라고 결정 선언한 후에도

그를 신봉하는 자는 좀체 끊이지 않았다.
치릴로는 미궁에서 헤메는 양들을 돌아서게 하기위해 서한으로,

강론으로 모든 힘을 경주하면서 그들을 깨우쳤다.

성 치릴로가 “성모 마리아의 신학 박사”라고 칭함을 받은 것은 물론
주로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에 대한 신학상의 공로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성모께 관한 신앙개조를 명백히 결정하는 사명을

하느님께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32년간 총주교직에 있다가 444년에 서거했다.
치릴로는 교황 레오 13세에게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또한 교회사상 동 로마의 5인의 교부 중의 한 사람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에페소공의회
라틴어 Concilium Ephesinum  영어 Council of Ephesus


Council of Ephesus(431년)
네스토리우스파와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소집된 제3차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인솔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성 첼레스 티노 1세의 대표들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에페소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주된 적수 인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채 회의를 개막하여 버렸다.
거기서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교구 콘스탄티노플에서 해임되었으며

그 자신은 파문당하였고
그의 교리는 단죄되었다. 또한 니체아 신경이 재확인되었다.

도착 하여 그사실을 들은 시리아의 주교들은

치릴로의 처사에 항의하는 테오도레트 및 다수와 규합하여
그들에 대항하는 회의를 열고 거기서 치릴로와 멤논을 파문하였다.
에페소 공의회는 8개의 교회법을 제정하였는데, 첫 7개는

교리적 의문점들로부터 야기된 분 제들을 다루었고,
나머지 하나는 치프로스의 행정적 권리를 다루었다.
433년 요한과 치릴로는 마침내 화해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아리우스주의
라틴어 Arianismus  영어 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 삼위 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 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 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지혜의 성장
‘닥터 지바고’처럼 ‘닥터(doctor)’라 하면 우리는 대개 의사를 생각하게 되지만,
이 말마디는 원래 ‘가르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도체레(docere)’에서 왔다.
그래서 ‘닥터’는 ‘박사’를 의미하게도 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교회 박사’로 인정받는 성인의 수는 많지 않다.


이 영예로운 호칭은

가톨릭의 교리를 정립한 위대한 성인들에게 선별적으로 주어진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도 얼마 안 되는 교회 박사 중의 하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치릴로는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있으면서 지역교회들을 폐쇄시키기도 하였다.


성 치릴로는 성격은 급했지만 에페소 공의회에서

정통 교리의 정당성을 일목요연하고 감동적으로 옹호한 위대한 연설가였다.
그는 ‘그리스도 탄생의 본질과 신성’에 관한 글로 교회 박사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견지하는 입장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존중하고 참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의무를 알지 못했거나 알고도 실천을 안 했더라면 치릴로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더욱더 성숙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자기 신념을 지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자기와 뜻이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혀 갔던 것이다.
나는 점점 더 지혜로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나이만 먹고 있는가? 지혜는 이해와 인내력에서 나온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