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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성노르베르토 주교

Berardus 2022. 6. 5. 22:15



6월 6일
성노르베르토 주교

ST. NORBERT
San Norberto Vescovo
Born :c.1080
Died :6 June 1134 at Magdeburg, Germany
Canonized 1582 by Pope Gregory XIII
(Xanten, Germania, 1080-1085 - Magdeburgo, 6 giugno 1134)

Norberto = uomo illustre del settentrione, dal tedesco
(illustrious man of the settentrione, from the German)


성 노르베르또 주교의 생애에서

(인용 부호 안의 말은 성인과 동시대에 살았던
프레몽트레회의 한 참사위원이 쓴 성 노르베르또 전기에서 인용하였다 :
PL 170, 1262.1269. 1294. 1295.
 성 노르베르또에게 교황 인노첸시우스 2세는 1133년 6월 9일 납인을 한 칙서를 보냈다 :
Acta Sanctorum, 21, in Appendice, p. 50)

힘있는 자 가운데 힘있는 자가 되었고 약한 자 가운데 약한 자가 되었다

노르베르또는 그레고리오 개혁을
실천에 옮기는 데 특별한 성공을 거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맨 먼저 바란 것은 진실로 복음적이고 사도적인 생활에 몸바쳐 정결하고 가난한 이들이 되어
"새사람의 옷을 입고 장식을 한 성직자 단체, 즉 수도 생활의 옷을 입고
 사제의 품위로 장식하여 성서의 말씀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성직자들의 단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제들에게 언제나 다음 세 가지, 즉
"제단과 성무에서의 청결, 잘못하고 소홀히 한 것을 수도원 회합 때 고백하고 고치는것,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고 그들에게 친절히 봉사하는것",
이 세가지를 권장했다.

사도들의 생활 양식을 본받아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활한 사제들 주위에 그는 초대 교회에서 한 것처럼
 수많은 남녀 평신도들을 모이게 했다.
이들의 수효는 매우 많아서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사도 시대 이후
 그렇게도 짧은 기간에 그리스도를 위해 완덕의 생활을 본받으려는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사람은 또 없다고 말했다.

대주교가 되고 나서,
동료들을 청하여 벤즈(오늘의 루사치아) 지방에 신앙을 전파하게 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의 강력한 반대와 소요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구의 성직자들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성직자 임명에 있어서 언제나 교회의 자유를 옹호하는 한편
 교황청과 제국 간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교황 인노첸시우스 2세는 그에게 "사도좌는
 귀하와 같은 교회의 충실한 아들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라고 썼고,
한편 황제는 그를 제국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 모든 직무를 두려움 모르는 신앙을 가지고 수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은"사랑이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지닌 탁월성이었다면,
신앙은 노르베르또가 지닌 탁월성이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애정 어린 마음을 보였으므로, 사람들은
"힘있는 자 가운데 힘있는 자가 되었고 약한 자 가운데 약한 자가 되었다."고 칭송했다.
끝으로, 그는 웅변적인 설교자였다.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고
 자주 묵상하며 두려움 없이 그것을 전했으므로,
그의 설교는 "하느님의 불로 타올라 악행을 태워 버리고,
사람들을 덕행으로 이끌었으며, 또선의를 지닌 영혼들을 지혜로써 밝혀 주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축일:8월20일.인창동성당게시판132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독일 산튼(Xante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또는 노르베르토)는
 하인리히 5세 황제의 궁전에서 하사품을 관리하는 차부제로 지내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식에 참석하고자 말을 타고 가다가 번개를 맞아 땅에 떨어졌다.
 얼마 후 의식이 회복되자 방탕했던 지난 생활에 대해 깊이 통회하며
 “주님,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옛날의 사도 바오로(Paulus)처럼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그는 쾰른 근처 지그부르크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결국 주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쾰른 시로 나와 사제 서품을 준비하고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으나 환영받지 못하였다. 그
는 과거의 죄의 보속으로 이러한 모욕과 냉대를 참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후 그는 주임 사제직을 사임하고 소유물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보속의 길을 떠났다.
그가 북부 프랑스를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큰 효과를 내게 되어
 그는 매우 유명한 설교가로 변신하였다.
 이윽고 포세스(Fosses)의 성 후고(Hugo, 2월 10일)가 동반자가 됨으로써
 그의 능력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1120년 1월 25일
그는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레몽트레(Premontre)에서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수효는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프레몽트레 수도회’이다.
그는 생전에 8개의 대수도원과 2곳의 수도원을 세웠고,
교황 호노리우스 2세(Honorius II)로부터 1125년에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테오발드(Theobald) 백작이 입회를 요청하자 그는 입회를 거절하고
 세상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제3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에 갔다가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굴복하여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하였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할 일들이 태산 같았다.
그가 임지에 갔을 때 주교관의 문지기는 그의 너무나 남루한 모습을 보고
 거지로 착각하여 주교관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새 주교와 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 이들도 많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하며 심지어 그를 처치해 버리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덕행과 온화하고 용맹한 마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였다.
   1132년 그는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다가 중병에 걸려 4개월 간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그 후 교구로 돌아와 2년 간 직무를 수행하다가 1134년 54세로 선종하였다.
그는 캉브레(Cambrai)에서 이단과 싸우는
 친구 성 발트만(Waltman, 4월 11일)을 도와주었으며,
성체 현존에 관한 이단을 배격하는데 공로가 컸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672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전세계 교회에서 그의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노르베르토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00-102쪽.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산텐의 노르베르토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72-77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
'노르베르토, 산튼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5년, 1379-1380쪽.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노르베르토 주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36-137쪽. 
-가톨릭홈에서-
 


사람들이 프란치스코회(O.F.M)를 농담으로
'돈에 빠진 사람' (Out For Money)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프레몽스트라텐시안 (Premons tratensions) 수도회를
 '괴물같은 허세'(Monstrous Pretensions)라는 말로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그 이름은 사실 노르베르토가 12세기에 수도원을 세운 장소인
 프랑스의 프레몽트레에서 나온 것이다.

그 별명을 다시 생각해 보더라도
 노르베르토가 수도원을 세운 것은 사실 괴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특별히 성체 성사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는 이단과 맞서 싸우며
무관심과 방탕 속에 자라 온 많은 신자들에게 다시 활력을 주고
이단들과도 화해와 평화를 이룬 것이다.
노르베르토는 그 많은 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아무런 허세도 부리지 않았다.
그의 수도원에 들어온 수많은 착한 사람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의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효과적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성체 성사에 대한 신심에서 특별히 이러한 도움을 발견하며
그와 그의 동료들은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고
 수많은 원수들을 화해시키며 무관심한 신자들에게
신앙을 일깨워 주는 데 성공하게 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노르베르토는 마지못해 반은 이방인이고
 반은 그리스도인인 남독일에 있는 막드부르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 직위에서 1134년 6월 6일 그가 죽을 때까지
교회를 위해 용감하고도 열성적으로 그의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582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특별한 세상은 무관심한 사람들이 건설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렇게도 헌신적으로 그리고 희망에 넘쳐서 내다보았던
다양한 교회를 이루어 놓지 못했다.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이러한 실패의 주된 이유는
대다수의 이름뿐인 신자들의 무관심 때문이며,
교회의 권위나 본질적인 신앙의 교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노르베르토가 실천한 것처럼 교회에 대한 성실한 충성과
 성체 성사에 대한 뜨거운 헌신은 하느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시켜 놓는 데 있어 측량할 수 없는 힘을 지닐 것이다.

사제 서품을 집전할 때 노르베르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 사제여! 당신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종이고 봉사자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교회의 배우자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당신 자신으로부터 나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입니다.
오, 사제여! 적어도 십자가 위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고 한 말은
 당신을 향해서도 되풀이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는 남은 살리면서도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080년 경 프러시아의

 클레베스 공국 삭텐에서 젠넵의 헤리베르트 백작과
 귀즈의 헤드비제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헨리 5세 황제의 궁중에서
 하사품 관리자로 일하면서 생을 즐겼다.

그는 사제직을 받기를 꺼렸고,
캄브라이의 주교직은 은근히 기대하던 중,
사울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들었던 주님의 말씀이
갑자기 자기에게 하는 듯이 들려오자,
 자신의 생활을 일신하여 1115년에 사제로 서품받았음은 물론 수도자의 옷까지 입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치게 극단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으므로 여론이 좋지 않게 되자,
 그는 주임 사제직을 떠났다.

그는 북부 프랑스를 다니며 설교한 것이 큰 효과를 내게 되니,
 매우 유명한 설교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포세스의 성 후고가 동반자가 됨으로써 그의 능력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1120년, 그는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레몽트에서
 성 마르띠노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원을 창설하니,
그 수효는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프레몽트레회이다.

그는 생전에 8개의 대수원과 2곳의 수도원을 세웠고,
교황 호노리노 2세로부터 1125년에 공식인가를 받았다.
 교회는 그를 수도회의 창설자로서 높이 공경한다.
그 후 샴파뉴의 테오발드가 입회를 요청하자,
그는 세상에서 수도회의 규칙으로 살도록 말리면서 3회를 조직하였다.

노르베르또는 반은 이방인이고
반은 그리스도인인 남독일에 있는 막테부르그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그리스도 생활의 쇄신 작업을 수행하면서 프랑스, 벨지움
그리고 독일 지방을 순회하며 설교하였는데,
 특히 안트워프에서 트란첼모 이단을 격퇴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이 직위에서 1134년 6월 6일 그가 죽을 때까지
교회를 위해 용감하고도 열성적으로 그의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582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1115년경
 황제 헨리 5세의 궁전에는 노르베르토라는 부제가 있었다.
 본래 가문이 귀족으로서 수입도 상당히 많았으나
 생활 상태는 지위에 맞지 않은 방탕한 생활로 좋지 못한 점이 있었다.
어느 날 부하 한 명을 데리고 말을 타고
어떤 예식을 구경하러 가던 도중 뜻밖에 큰 폭풍우을 만났다.
그때 갑자기 부하가 소리쳤다.
 "이제 돌아가십시오. 하느님의 벌이 당신 위에 떨어집니다."
그 순간, 엄청나게 큰 번개가 비치면서 땅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천둥이 치자마자
 노르베르토는 말과 더불어 땅에 떨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게 된 그는
일어나자마자 성 바오로와 같이 "주여, 당신은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지그부륵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날을 보내며 원장과 더불어 마음의 수양에 진력했다.
그 후 그는 쾰른에 가서 사제 서품 준비를 하고 2년 후 훌륭한 자격을 갖추어 서품받았다.

고항에 다시 돌아온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신앙이 극히 두터워져 갖은 고행을 하며 종종 설교도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반대에 부딪쳤다.
 특별히 옛 생활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때로는
 얼굴에 침 뱉음을 받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는 이전의 죄의 보속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무엇이나 눈을 감고 끝까지 인내하며 다 받았다.
그는 이곳 저곳 마을을 찾아다니며 설교했다.
 가는 곳마다 박해와 냉대를 받았고 나중에는 교황 사절에게 고소까지 당했다.

노르베르트는 이에 대해 겸손되이 변명했다.
 그리고 자기 소유물을 팔아, 얻은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신분이나 지위를 모두 버리고 마침 교황 젤라시오 2세가
체류 중인 프랑스 남쪽에 있는 프로방스에 갔었는데,
 이미 노르베르토의 성스러운 일 상 생활을 잘 알고 있던 교황은
 기꺼이 그를 맞이하며 이후 당신 곁에 머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교황에게 간청하여 어디서든지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우선 쾰른에 가게 되었다.
맨발로 눈 속을 걷고 야채를 먹는 것에 만족하며 가끔 밤을 새워 가며 기도했다.

프랑스의 바란시안누에 도달했을 때
민중의 간청에 못 이겨 일장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는 불어를 조금 밖에 알지 못했지만 청중은 모든것에 대해
그가 말하려고 하는 점을 깨닫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에서의 성령 강림 날에 사도들 위에 일어난 것과 같은
 감탄할 만한 성령의 특별한 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설교하고 싶었으나
 동행했던 3사람의 동료가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젊은 성직자가 그에게 와서 동행하기를 간청해
 노르베르토는 그 사람과 같이 간부레의 주교 불갈도를 방문하고
 부근 일대에서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활동에 풍부한 축복을 내려 주셔서 그 성과가 아주 컸다.
 그러므로 라온의 주교 발델미이는 교황의 추천에 따라
대우를 극진히 하며 그를 자기교구에 초빙했다.

노르베르토는 그 청을 받아들여
 주교로부터 프레몽트레의 계곡에 있는 소성당을 받았다.
그는 예전부터 기도와 고신극기를 할 수 있는 수도원 창립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프레몽트레에서 한 무리의 백의의 수도자들이 손에
십자가의 횃불을 들고 행렬하는 꿈을 꾸었다.

1120년 1월 25일, 그가 갈망하던 프레몽트레 수도회가 창립되어
 주교는 그에게 흰옷을 주었는데 이것은 그 후 오랫동안 그 회의 수도복이 되었다.

그는 즉시 부근 일대를 다니면서 설교했다.
이에 감동된 사람들이 입회해 곧 35명의 수련자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사제품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노르베르토는 그들에게 수도회의 정신을 가르쳤다.
특별히 모든 성체 성사에 관계되는 사물, 즉 미사 성제와
 기타 모든 공경 예식에 대한 존경과 신심을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했다.
교회의 용무를 띠고 독일의 슈파이에르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못 이겨 드디어 막드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했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가 임지에 갔을 때에 대주교관의 문지기는
 그이 너무나도 남루한 의복을 보고 거지로 잘못 생각해
 그를 주교관에 들여보내지를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주교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매사에 방해하며 심지어는 그를 없애버리려고 까지 했다.
실제로 악한이 칼을 들고 덤볐을 때 다행히 그 위기를 모면하고
 아무 상처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깆거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주교의 덕행과 온화하고도 용맹한 마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132년 노르페르토는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을 때
 뜻밖에 중병에 걸려 4개월간 병상에 눕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간신히 막드부르크에 돌아와 2년간이나 더 직무를 보다가
마침내 1134년 6월 6일, 54세로 선종했고, 1582년에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