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 안에서도 널리 알려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
1209년에 시작 되었다.
'두 번째 그리스도'라 불릴 만큼 십자가의 신비와
그 의미를 삶으로써 드러낸 겸손과 가난의 성인의 영성이 워낙에 거대했기에
삶으로서 그의 영성을 그대로 살기에는 너무나 벅찼으며,
그래서 후에 독특한 세 개의 수도회로 분리되게 된다.
그러나 이 세 수도회의 근본영성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 정신과 그리스도 모방의 근본 영성은 동일하다.
그 중에 하나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Ordo Fratrum Minorum Conventualium-OFMConv.)는
1958년 한국에 진출했으며,
현재 서울, 부산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영성지도 및 사회복지 그리고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
꼰벤뚜알이라는 말은 공동, 집합이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를 뜻한다.
이 말은 수도회 초기부터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작은 형제회(OFM)'를 가리키는 말로 써 왔다.
역사
1571년 이전의 역사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아 있을 당시 수도회는 이태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아프리카의 이슬람 지역, 동방에까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1226년 성인이 돌아가신 후 수도회는 큰 수도회로 변화하는 가운데에
커다란 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행정조직의 문제와 회칙 해석의 어려움이 생겼다.
공동체의 원활한 운영과 효율적인 사목활동을 위해
공동재산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하는 형제들과
일체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는 형제들 사이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1257년에 열린 총회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잘 이해했고
또한 높은 성덕과 학식을 지닌 성 보나벤뚜라가 수도회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수도회 초기의 어려운 문제들을 정리하면서
수도회의 체계를 잡아나가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상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조화시키어 나갔다.
14세기와 15세기 온 교회에 널리 퍼진 혼란과 규율의 약화는
또한 수도회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더욱 엄격한 생활을 원하던 수도회의 개혁그룹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를 중심으로 더욱 커지면서
옵세르반트 수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달리 그 나머지 형제들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이라 불렸다.
여러 교황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두 그룹 간에 불화가 깊어지자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는 이 둘을 법적으로 분리하였다.
여기서 개혁 수도자들은
옵세르반트 작은 형제회(OFMObs.:옵세르반트란 엄격한이란 뜻.
여기서 훗날 까프친 프란치스코회가 개혁을 주장하면서 다시 분리되어 나오게 된다.)라 하고,
완화된 수도생활을 따르는 수도자들을
꼰벤뚜알 작은 형제회(OFMConv.: 꼰벤뚜알이란 "공동체"라는 뜻으로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성인이 살아있을 때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부르던 이름 중의 하나였다.)라 불렀다.
1517년 이후의 역사
1517년 분리 당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은
대략 25000명에 이르렀으나 16세기의 종교 개혁을 겪으면서 영국과 아일랜드,
독일과 그 인접 국가에서 많은 수도원과 수도자들을 잃기도 하였지만
17세기와 18세기의 부흥과 쇄신의 시기를 맞으면서 동유럽 지역 및 러시아,
리투아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꼰벤뚜알 스판치스코 수도회에 거룩한 성인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쿠베르티노의 성 요셉(+1633), 순종의 모범인 포텐자의 복자 보나벤뚜라(+1711),
아폴리아의 열렬한 사도 성 프란치스코 파사니(+1742), 트렌트 개혁 뒤의
가장 뛰어난 교황 가운데 한 분이었던 교황 식스토 5세(+1590)와
최악의 종교탄압 시대에 교회의 운명을 짊어졌던
교황 클레멘스 14세(+1774)등이 있다.
한편 1771년 프랑스에서는 옵세르반트와 다시 결합함으로써
수도회의 회원들과 수도원이 늘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회의 번영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다른 수도회들과 마찬가지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그리고 19세기의 종교억압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손실을 입게 된다.
1773년 당시 약 25000명의 회원이 100년 뒤인 1893년 1,481명으로 줄었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활발한 선교활동과 사회 안에서의 적극적인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전 세계 36개 관구에 약 4500명의 수도자들이 있다.
영성
교회와 세상 안에서 효과적인 현존'이란 것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명확하고 적극적이며 확고히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사회의 도전과 교회의 요구에 적절히 응답해 주는 노력이 있음을 뜻한다.
"우리 시대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만일 용기와 즉각성 그리고 신속함과 항구함으로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발전시키기만 한다면,
우리 세라핌 수도회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SK486).
따라서 우리는 세라핌 사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다시 찾아,
그것을 이 사회와 문화 안에서 사람들에게 새롭게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현 시대가 필요로 하며,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영성이란 바로 형제애,
작음, 공동체 정신으로 나타난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홈에서)-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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