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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3월 28일) 성 스테파노 하딩 /복녀 카테리 테카크위타

Berardus 2022. 4. 16. 13:41


 


축일: 4월 17일(3월 28일)
성 스테파노 하딩

St. Stephen Harding  
Santo Stefano Harding Abate 
Meriot, Sherborne, Inghilterra, 1060 ca. – Citeaux, Francia,

28 marzo 1134

 

   영국 남부 도싯셔(Dorsetshire) 지방 쉐르본(Sherborne) 태생인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또는 스테파노)은 고향의 어느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스코틀랜드와 파리(Paris) 그리고 로마(Rome)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몰렘(Molesme)의 은수자 그룹에 가입하였다.

 

 이때 그는 성 로베르투스(Robertus, 4월 29일)와

성 알베리히(Alberich, 1월 26일)의 지도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1094년 원장과 4명의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또 다른 영적 생활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곳을 떠날 허락을 받았다.

성 로베르투스는 시토(Citeaux)에 수도원을 세우고

 성 스테파누스를 장상으로 임명하였다.

만년에 그는 맹인이 되었고 시토에서 운명하였으며,

 1623년에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성모자와 엄률시토회의 세 창립자.

(성 로베르토, 성 알베리코, 성 스테파노 아빠스)


성 로베르토가 창립한 시토회는
생활의 엄격함으로써 유명하여

 음식은 언제나 빵과 채소만으로, 절대로 육식을 하지 않고,
6시간의 기도와 6시간의 수면 외에는

 심한 노동에 종사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본래 편안한 것을 찾는지라,
이 수도원을 지원하는 자는 평소에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게다가 수도원 내에 전염병이 만연해

 수사 중에도 쓰러지는 이가 허다했으므로
세상사람은 점차 공포감을 느껴 시토회의 입회 지원자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때의 시토회 수도원장은 스테파노 하르딩이라는 규율 엄정한 영국인이었으나,
이런 일을 무척 유감스러이 생각하며 평소부터

좋은 지원자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뜻밖에 베르나르도가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입회를 원하자 뛰듯이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받아들였다.


베르나르도는

 트라피스트회의 엄중하기 짝이 없는 모든 규율을 충실히 지킬 뿐 아니라
자진하여 다른 고행도 많이 행했다.

그리고 언제나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Ac quid venisti)?"는
글씨를 앞에 놓고 자신을 격려했다.
Every morning Bernard would ask himself,
"Why have I come here?",
and then remind himself of his main duty - lead a holy life.

이 같은 베르나르도의 수도에 대한 열심이 눈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1115년에 그는 랑그레에 시토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과 엄격성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했으나
그의 성덕이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이 수도원의 이름을 바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명랑한 골짜기)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이 되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축일:8월20일, 게시판132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 시토회 ◆   
라틴어  Ordo Cisterciensis 
영어  Cistercians(O. Cist.)  


   1098년 프랑스 부르군드지방 시토(Citeaux)에서

 성 로베르토(St. Robertus de Molesme, ?~1111)가 설립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수도회.

 회의 이름은 모원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us de Clairvaux)의 기여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곧 서부유럽으로 확산되어 13세기 중엽에는 680여 개의

 소속대수도원들이 있었다.

 

   은수적(隱修的)인 수도회의 생활양식으로 교회,

제구(祭具), 제의(祭衣) 등이 매우 소박하며

성 베네딕토의 회칙을 기초로 한 규범을 준수하여 단식, 침묵,

단순노동 등이 매우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1119년 교황 갈리스도(Callistus) 2세에 의해 인가된

 ‘사랑의 헌장’(Charta Caritatis)이 회헌이 되었으며

 이런 시토의 규정들은 다른 중세수도원들,

특히 의전수도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7세기에 시토회에 각 국가단위의 구심점들이 형성되자

시토에 있는 수도원은 국외 시토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엄격한 회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은 라 트라프(La Trappe)의 수사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1902년 레오(Leo) 13세 때 트라피스트회는 시토회에서

 ‘엄률 시토회’로 분리하여 독립하였고,

이전의 시토회는 ‘성 시토회’로 존속하였다.

 

1898년 시토 대수도원이 복구되었을 때 엄률을 채택하였으며

 로마에 거주하는 시토의 아빠스는 엄률시토회의 총장이 되었다.

 현재 11개 수족에 1,318명의 회원이 있다

-(1983년 교황청연감)-


◆ 트라피스트회 ◆     
라틴어  Ordo Cisterceinsium Reformatorum 
영어  Trappists  

   1098년 프랑스의 시토(Citeaux)에 세워진 수도회,

즉 시토회 중 ‘엄률(嚴律) 시토회’의 주요 수도회.

1892년 시토수도원이 모원(母院)으로 회복될 때까지

 라 트라프(La Trappe)가 엄률 시토회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1664년 랑세(A.J. Le B. de Rance)에 의해 개혁의 물결이 일게 되었으며

 이 때 ‘트라피스트’란 이름이 생겨났다.

이는 이전의 시토회의 성격을 보유하면서 더욱 엄격성을 추가한 회였다.

 트라피스트의 생활은 ‘기도와 참회, 침묵과 노동’으로 요약된다

.현재 85개 수도원에 3,100명의 회원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4월 17일(7월 14일)

복녀 카테리 테카크위타


Blessed Kateri Tekakwitha

Beata Kateri (Caterina) Tekakwitha

(Catherine Tekakwitha; Lily of the Mohawks; Tegakouita; Tegakwitha)

Born:1656 at Osserneon (Auriesville), modern New York, USA

Died:17 April 1680 at Caughnawaga, Canada

Venerated:1943

Beatified:22 June 1980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pending

 

 

이로꽈 인디언들에게 체포된 알곤퀸의 딸인

카테리 테카크위타는 오호크 인디언 추장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1676년에 예수회 선교사인

 쟈끄 드 랑베르빌 신부에 의하여 크리스챤으로 개종하였으나,

그녀의 새로운 종교 때문에 부족과 친척들의 질시와

 학대를 이기지 못하여 고향을 떠났다.

 

밀림지대를 거쳐 200마일의 거리를 헤맨 끝에

 몬트리얼과 가까운 어느 크리스챤 인디언 마을에 당도하였다.

그녀는 1677년 성탄절에 첫 영성체를 하였고,

1679년에는 정결서원을 발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녀는 카나다의 코그나와가에서 선종하였는데,

그녀의 성덕이 뛰어나 만인의 공경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모호크족의 백합화] ’Lily of the Mohawks’ 라고 불리며,

1980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여성의 존엄 (Mulieris Dignitatem)

요한 바오로 2세. 1988년 8월 15일

 

마리아의 해에 즈음하여 발표한

여인의 존엄과 소명에 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한

 

인류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된 여성들이 인간성의 상실을 막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할 수 있다

 

부활의 첫 증인들  

16. 그리스도의 선교 시작부터

 여자들이 그분과 그분의 신비에 여성특유의 감수성을 보인다.

이 사실은 빠스카 신비, 곧 십자가와 부활 새벽에 있었던 사건에서

 다시 명백하게 확인된다.

여자들이 제일 먼저 무덤에 도착한다.

그들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마태 28,6)는 소식을 접하는 첫 사람들이 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는 첫 사람들이다.(마태 28,9 참조).

그들은 또한 첫 번째로 사도들에게 이 진실을 알려 줄 임무를 맡는다.

(마태 28, 1-10, 루가 24, 8-11 참조).

요한복음(마르 16,9도 참조)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한다.

그 여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증인이다.

처음에 그 여인은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어로 ’라뽀니’하고 불렀다(이 말은 ’선생님이여’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주셨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6-18).

 

이리하여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사도들 중의 사도"라는 칭호로 불려져 왔다.

그 여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첫 목격 증인이 되었고

이 때문에 사도들 앞에서 첫 증언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전에 언급했던 대로 그리스도께서

 남자들에게 신적 진리를 위탁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예언자 요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요엘 3,1).

예수 부활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에,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빠라끌리또 성령께서 내려오실 때 다시 한번 확인된다(사도 2,17 참조).

 

여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언급한

이 모든 말씀들은 성령 안에서 남녀 평등의 진리를 확인하고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 둘 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평등할 수 밖에 없다.

둘 다 성령 안에서 쏟아 부어지는 신적 진리와 사랑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남녀 모두가 그분의 구원적이고 성화적인 "방문"을 받는다.

이 성스러운 방문 앞에 남자나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아무런 제약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성 바오로의 말대로 인간 안에서의 성령의

 구원적 활동이 유다인으로 태어났거나 그리스인으로 태어났거나,

자유인의 지위를 누리거나 노예 신분에 처해 있거나에 구애되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이 결합은 다양한 자원 안에서 일치를 가져오시는 성령께서 "너희 아들들이 예언을 하리라." 와

"너희 딸들이 예언을 하리라."는 사실에 똑같은 방법으로 기여하실 것이다.

 

"예언을 한다."는 말은 남녀 각개 인격체의 진정한 모습과 독창성을 보존하면서

 인간의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사도 2,11)을 표현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에 대한 복음적 평등성,

남자와 여자의 평등성은 나자렛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바로 이 평등성이 교회와 세상 안에서 여성들의 존엄과 소명을 위해

가장 확실한 기초를 제공한다.

모든 소명은 인격적이고 예언자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 "소명"안에서 인격적으로 여성적인 요소가

 새로운 차원에 도달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의 차원으로서

그 안에서 여성은 생동력 있는 주체가 되고 대체 될 수 없는 증인이 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홈에서)-

 

 

낯선 북소리
   
세상에서 자기만 한 발짝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친구며 가족들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고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과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 전 모호크족의 족장과 알공킨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테리 테카크위타에게 들린 북소리는 부족의 전통과는 다른 리듬을 갖고 있었다.
모호크족의 전통에서는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테카크위타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일생을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함으로써 부족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길을 걸었다.

그는 기도하고 자선을 베풀고 참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
이런 비전통적인 삶의 방식 때문에 가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겪어야 할 가난은 두렵지 않다.
나는 약간의 양식과 걸칠 수 있는 옷 한 벌이면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카테리 테카크위타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예상을 깨뜨려야 할 때도 있음을 보여 준다.

 

먼 곳에서 희미하게 낯선 북소리가 들려 오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라.
다른 사람이 내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중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