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1월10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St. GREGORY of Nyssa
San Gregorio di Nissa Vescovo
Cesarea di Cappadocia, circa 335 - 395
Gregorio = colui che risveglia, dal greco
니사의 그레고리오(G. Nyssenus, 332?~395?).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 대(大)바실리오의 동생.
니체아 그리스도론의 완성자.
아버지는 부유한 변호사이며 맏형과 같은 이름인
바실리오와 동생 베드로(Petros, 세파스테의) 및
그 자신이 모두 주교(主敎)였고,
맏누이 마크리나(Macrina)는 수녀원장,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자리아에서 태어나
맏형과 같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어 독학을 한 것 같다.
웅변가라는 화려한 직업을 버리고 형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형이 카파도키아의 카이자리아 주교가 되자(370년),
그 근교 니사의 주교로 추거(推擧)되어(371년),
무명했던 니사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적,
동질적의 뜻)의 아성으로 유명해졌다.
아리우스파인 발렌스 황제(재위 : 364~378)는 전통파 압박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그는 교회 내외의 아리우스파의 책모로 인해 마침내 추방당하였다가(375년),
황제의 사후에 복직되었다(378년).
안티오키아 회의(379년)에 출석,
또한 아라비아 · 팔레스티나를 순력(巡歷)하였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 출석,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의 주교 취임을 축하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 379~395)로부터 정통파의 기둥 같은 존재로 인정받고,
그의 분투에 의해 아폴리나리오스파는 이단(異端)으로 선고되었다.
그 후 적어도 세 번 콘스탄티노플의 지방회의(383, 385, 394년)에 출석하였다.
그는 오리제네스 이래의 조직신학자이며, 카파도키아 교부들 가운데서
제일 심오한 철학적 신학자.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형 바실리오와 똑같은 입장.
그가 ‘본질’(本質)과 ‘위격’(位格)을 구별하여(362년경의 아타나시오는 양자를 동일시),
1본질 3인격(mia ousia, treis Hypostaseis, 삼위일체)을 주장한 것은 불멸의 공헌이다.
‘성령론’(聖靈論)에 대해서는, 성령은 자식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1인격에서의 결합(2성 1인격)을 주장했으며(후세의 칼체돈 그리스도론과 동일 결론),
마리아론에 있어서는 ‘만물의 부흥’을 주장하였다.
통틀어 그의 사상은 신비주의 색채가 매우 짙다.
그는 카파도치아 교부들 중의 유일한 저술가이다.
㉮ 교리적 저술 ≪Adversus eunomium≫(4권, 380~383?),
≪Adversus Apollinaristas≫,
≪Sermo de Spiritu Sancto adversus Pneumatomachus Macedonianos≫,
㉯ 강해적(講解的) 저술 ≪De opificio hominis≫, ≪In hexameron≫,
㉰ 수덕적(修德的) 저술 ≪De virginitate≫, ≪De instituto Christiano≫, ≪Vita Macrinae≫,
㉱ 연설 · 설교집, ㉲ 서한집으로 30통의 편지가 잔존.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5월 30일)와 성녀 엠밀리아(Emmilia, 5월 30일)의 아들로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나
그의 형인 성 대 바실리우스(1월 2일)와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Macrina, 7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수사학자가 되어 테오세베이아(Theosebeia)와 결혼하였다.
그는 수사학 교수가 되었으나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의 영향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르메니아(Armenia)의 니사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아리우스파(Arianism)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폰투스(Pontus)의 집정관으로부터
교회 재산을 남용했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도망쳤는데, 그라티아누스(Gratianus) 황제가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379년 그는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을 단죄한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아라비아의 이단들을 척결하도록 파견되었다.
또한 그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아리우스(Arius) 이단을 공격하고,
니케아(Nicaea) 선언문을 재확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와 플라톤(Platon)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학자로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680-681년)는 그를 '교부들 중의 교부'로 선포하였다.
-(가톨릭홈에서)-
* 성 대 바실리오 축일:1월2일.게시판154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교부들의 가르침: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 신학자, 성서주석가로 활발한 활동
가계
교회사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집안만큼 뛰어난 가문은 그리 많지 않다.
조부모가 고백자(증거자)인데다, 할아버지는 순교자였다.
할머니 마크리나 1세는 오리게네스의 학생이자 네오체사레아의 주교인
그 유명한 기적가 그레고리우스의 제자였다.
그레고리우스의 아버지는 폰투스 출신으로 네오체사레아에서 수사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막내아들 베드로가 태어난 뒤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어머니 엠멜리아 역시 카파도키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동생이 주교였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모두 아홉 남매가 있었는데,
누이 마크리나(329년 이전 탄생)와, 형 바실리우스(329/30년 탄생),
그리고 그레고리우스(335/40년경 탄생)가 셋째이며,
베드로(340/45년경 탄생)가 막내이다.
일찍 죽은 나우크라티우스 이외에 네 명의 누이를 두었으며,
아마도 모두 결혼한 것 같다.
그 가운데서도 마크리나는 동생들을 도와 말없이 그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였고,
대 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 베드로는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교의에 영향을 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가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그레고리우스의 가족은 네오체사레아 근처에 있는
안네시의 농장으로 집을 옮겨갔다.
장녀 마크리나는 그곳에 수도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이렇듯 할머니 마크리나 1세, 엠멜리아, 마크리나 2세,
대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베드로가 성인으로 공경 받을 정도로,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생애
그레고리우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자신에 관한 자료를 전혀 남기지 않았으며,
동시대인들과 동시대의 기록들도 그를 드문드문 언급할 뿐이다.
바실리우스는 아테네에서 돌아 온 뒤
잠시 갑파도키아의 체사레아에서 수사학 선생으로 활동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스승' 또는 '아버지'라고 부른 바실리우스에게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처음에 교회의 독서자였다가, 한때 그리스도교 금욕적 이상을 벗어나려 하기도 하였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두고 그를 나무라는 듯한 편지를 보냈다.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가 금욕적 이상에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할 때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으로 향했으며 수사학자가 되고자 하였다.
특히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직업을 금지한 뒤에 더 큰 매력을 준 것 같다.
이 시기에 그레고리우스는 같은 신분계층의 여인인 테오세베이아를 만나 결혼한 것 같다.
그는 집안의 경건한 분위기에 얼마간 반항적이었다.
그 일화로 그는, 안네시에서 멀지 않은 이보라에 세바스테이아 출신인
40명의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운 묘 축성에 오라는
어머니의 초대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가기는 했지만 너무 늦었다.
가족과 참석자들은 이미 정원에 나와 성유물함을 위해 밤기도를 바치고 있었고,
웅장한 시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이웃집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그런데 꿈에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그가 정원에 들어서려고 했을 때 한 무리의 군인이 문 앞에서 막고 서서
막대기로 그를 위협하였다.
온유한 노인이 나타나 그들에게, 젊은이의 우유부단함을
용서하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심하게 얻어맞았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꿈에서 본 것이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 때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 호수에서 죽은 40명의 순교자들이었음을 깨달았다.
372년 카파도키아 지방이 둘로 갈라지자 바실리우스는
제1카파도키아에 주교좌를 늘려 형제와 친구들을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때 바실리우스는 그레고리우스를 체사레아에서 안키라 쪽으로
국도에 자리한 니사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바실리우스의 진술에 따르면, 그레고리우스는 천재였지만
어린애 같고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어쨌든 그레고리우스는 주교 재임 동안 첫 7년은 직무를 수행하느라
꽤 어려움을 겪은 것 같다.
그 당시에 이미 '대(大)'라는 경칭이 붙은 바실리우스는
카파도카아 지방 수도인 체사레아에서 주교직을 맡은지 9년 만인 379년 새해에 죽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온실의 화초처럼 살았지만
그 뒤로는 소나무가 되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교회정치가, 실제적인 교의문제를 해결한 신학자,
존경받는 연설가, 설교가, 성서주석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더욱이 바실리우스의 작품들도 더 높은 철학적 단계로 끌어 올렸다.
그레고리우스와 마크리나
379년 가을, 40대에 들어선 그는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가 소집한
교회회의에 참석하러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마크리나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그에게 마크리나에 관해 글을 쓰고 그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크리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372년부터 8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그녀를 방문하였다.
마크리나가 죽기 바로 전에 그는 그녀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영혼과 부활」을 출판하고 그 뒤 그녀의 생애를 집필하였다.
이 '생애'를 처음 영어로 번역한 학자는 이 소책자가 기원후 4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4세기에 씌었다면, 고전 세계문학에 속했을 것이라며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마크리나를 늘 생각하였다.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마크리나를 추억하는 짧은 글을 적어 보냈다.
"우리에게 누이는 우리 삶의 스승이자 어머니를 뒤이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솔직하게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힘을 솟게 하는 성곽이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무기였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와 같았습니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 19, 6).
신비신학
그의 신비신학에서는
필립 3,13에 따라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내뻗음'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그는 영혼의 영적 상승을 나타내는 이 개념을
노년의 작품인 "모세의 생애"에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하느님 자신은 참된 덕이시며, 이해할 수 없고 끝없는 분이시다.
인간은 이 참된 덕을 사랑하고 열망해야 하며,
하느님 자체인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늘 이 목표에 전념해야 한다.
뱃사람이 가고자 하는 항구의 신호등에 뱃머리를 맞추듯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성인들도 삶의 목표에 도움이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추구하는 완전한 삶에 관한 논고를 모세의 생애로 구체화한다.
-<가톨릭신문, 2003년 6월 29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1]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아가 강해’에서
하느님을 품을 수 있는 인간
본문
창조주께서 그대를 모든 피조물보다 얼마나 더 존귀하게 여겼는지 깨닫기 바라오.
그분은 하늘도 달도 태양도
아름다운 별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당신의 모습(eikon)에 따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대만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본성의 모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의 초상이며,
참된 신성(神性)의 닮음이고,
복된 삶을 담는 그릇이며, 참된 빛의 각인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
그대는 그대의 순수함에서 반사되는 광채로
그대 안에서 빛나고 계신 그분을 닮아가면서(2고린 4, 6),
그분처럼 됩니다.
그러기에 피조물 가운데 그대의 위대함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 전체는 하느님 한 뼘의 손으로 가릴 수 있고,
땅과 바다도 하느님의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위대하시고 능하신 분이시며 주먹으로 피조물 전체를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대가 완전히 품을 수 있는 분이 되시고 그대 안에 거처를 정하십니다.
그분이 그대의 본성 안에서 걸으셔도 결코 비좁아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 안에서 살며, 그들과 함께 걷는다』(2고린 2, 16).
만일 그대가 이 장면을 본다면, 그대는 이 지상의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는 일이 없으며,
하늘을 더 이상 놀라운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 자신이 하늘보다 더 변함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 인간이여, 어찌하여 아직도 하늘을 보고 감탄합니까? 하늘은 사라지지만(마태 24, 35),
그대는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곧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광활하게 펼쳐져있고 밀물이 끝없이 뻗어나간다고 놀라지 마시오.
그대는 땅과 밀물을 보면서 그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쌍의 어린 말을 탄 기수처럼 그대는 이 요소들을 그대가 좋게 여기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것들을 복종시킵니다. 곧, 땅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으로 그대를 도와주고,
바다는 말을 잘 듣는 어린 말처럼 그대에게 등을 내밀며
인간을 바다의 기수로 받아들입니다.
「아가 강해」 2, 68~69
해설
“나는 하느님의 모상임을 자각해야”
「교부들의 황금시대」라는 4세기에는
기라성 같은 교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지방에는 더욱더 휘황하게 빛나는 세 별,
곧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있었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 395년경)는 젊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수사학을 공부하며 세속적 출세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누이 크리나와 형 바실리우스로부터 영적 감화를 깊이 받고,
또 형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권면으로 수도생활에 투신합니다.
그의 관상생활의 정화인 「아가 강해」는 이러한 수도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형 바실리우스가 틀을 놓은 수도제도에 신비적 성격을 새겨 놓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특히 사순시기에 낭독되기도 하였으며,
훗날 「지성적 신비주의」라는 영성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구약성서의 「아가」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해석하였으며
「아가」가 뜻하는 영적인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특히 오늘날처럼 마음이 메마르고 분열되어있는 시대에 우리는
「아가」가 지니고 있는 「사랑의 언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가」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실로 에로틱하여 종교적 글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지만,
그레고리우스의 깊은 영적 해석에 따라 읽어나가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 무한히 깊어져가고
영적으로 이해된 그들의 혼인에서 솟아오르는 즐거움을 구구절절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레고리우스의 전 15편의 강해 가운데 둘째 강해로,
「아가」 1장 8절(여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여,
만일 그대가 자신을 모른다면…)을 해석한 부분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여기서 진정으로 「자기를 아는(自己知)」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자기가 아닌 것과 구별하여 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후자에 관한 해석입니다.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품을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모상은 그 원형(原型)을 그저 가만히 닮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형에 대해 끊임없이 자기를 개방하면서 닮아가는 동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덕(德)이란, 단지 인륜의 문제가 아니라, 신비에 관한 그의 또 다른 주저
「모세의 생애」의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혼이 「사랑의 질서」 안에 흔들림 없이 뿌리를 내리며,
하느님과 그 사랑의 신비를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김산춘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서강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12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6]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빛나는 어두움
본문
모세가 어둠 속에 들어간 것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이야기는 모세가 처음 하느님을 만났을 때와 다소 상충되는 것 같다.
하느님께서는 그 때에는 빛 속에서였지만 지금은 어두움 속에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숙고하는 영적인 실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일관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점을 통해 성서 본문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종교적 인식이 다가올 때 제일 먼저 빛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 빛은 어두움인 불경과 반대편에 위치하며,
어두움은 빛의 감미로움을 통해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크고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실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인식한 것을 풍요롭게 관상할수록
신적인 본성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신은 오관이 감지하는 것이나 지능이 알았다고 여기는 모든 징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욱 내심 속으로 잠긴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보이지 않는 분」
그리고 「깨달을 수 없는 분」에게 다가가면서 바로 거기서 하느님을 뵙는다.
사실 정신이 찾고자 하는 그분에 대한 인식이나 정신이 지닐 수 있는 참된 시각은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바라보는 데 있다. 정신이 찾고 있는 그분은
모든 인식을 초월하여 마치 어두움 속에 있듯이 그분의 불이해성을 통해 모든 것과
분리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나는 어두움 속으로 스며들었던 신비가 요한은,
이러한 부정을 통해 신적인 본질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지적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다가설 수 없는 것임을 정의하면서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 18)고 말한다.
「모세의 생애」 162~163
“삶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라”
해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 숨쉬는 터키로 순례 여행을 떠나보자.
이방인 개종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그리스도인)」란 이름을 얻었던 곳 안티오키아.
순교를 앞 둔 이냐티우스의 뜨거운 교회 사랑이 숨쉬는 곳.
그 곳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평원을 가로지른다.
높은 산맥 속의 굽은 길로 한참 오르다보면 갑자기
새로운 평원 고원지대를 만난다. 마치 하늘을 맞대고 있는 듯
모든 산천이 신비스러운 카파도키아가 한 눈에 펼쳐진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335년에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유복한 신자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수도자였던 누이 마크리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내면적인 영적 생활에 흠뻑 젖는다.
니사의 주교로 임명되어 영향력 있는 교회정치가, 실제적인 교의문제에 관한 중요한 신학자,
존경받는 연설가, 설교가, 성서주석가가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칼케돈 공의회(451)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론에 관한 신학적 논쟁 속에서 비중 있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전 그리스 철학을 종합한 신학자로서
관상적 신비주의 신학에 큰 공헌을 한다.
「모세의 생애」(De vita Moysis)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히스토리아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첫째 부분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따른 모세의 생애를 요약하고 있으며, 테오리아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두 번째 부분은 모세의 생애에 대한 관상(contemplatio)이 기술된다.
위의 본문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에 대한 관상 부분이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소용돌이치는 오늘날, 참된 신앙생활을 위한
영적 갈증을 느낄 수 있다.
이 갈증의 해소를 위해 「구심기도」, 「향심기도」, 「관상기도」,
「렉시오 디비나」 등 많은 것을 찾게 된다.
이를 잠시 뒤로 하고 살아있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보자.
『세례 받을 때 빛 속에 있었던 내가 왜 지금은 어두움 속에 있는지?』,
『왜 영적 실제들은 일관성이 없는지?』 그에게 나지막이 물어보자.
그레고리우스는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먼저
『오관이 감지하는 것이나 지능이 알았다고 여기는 모든 징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욱 내심 속으로 잠겨라』(「모세의 생애」 163)고 답한다.
그리고 마치 『모세가 이전에 받았던 같은 가르침을 어두움을 통해 받았듯이,
거룩한 말씀의 증언을 통한 가르침을 굳게 믿어라』(「모세의 생애」 165)고 충고한다.
또한 『거룩한 말씀이 보호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들이 아는 것 중
어느 것과도 동일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적인 본성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해력을 통해 형성된 모든 개념은
오직 하느님의 우상을 만들뿐 결코 이에 대한 진실한 이해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
(「모세의 생애」 165)을 일깨운다.
우리가 영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의 우상만을 만든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어리석은가! 그레고리우스는 관상 기도를 통해 쌓은 것을
그대로 내버리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주님의 산으로 오르라고 권고한다.
삶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참된 영적 생활을 위해 덕스러운 인간의 삶의 완성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하느님에게 관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올바름과 관계된다.
사실 풍습의 순수함은 종교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방금 전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이 앎은 인간적인 인식 방법과 비교하여 그분에 대한 어떤 관념도 품지 않아야 함을 배웠다.
우리가 배워야 할 덕의 또 다른 형태는 덕스런 삶은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의 생애」 166).
아직도 「어두운 어두움」 속에 있다면,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
「빛나는 어두움」에로 순례 여행을 떠나보자. 『마음의 귀가 밝은 사람은 그 소리를 듣는다』
(「모세의 생애」 169).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수원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7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5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편지’에서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머무르시고 거니실 수 있는 안식처를 마련해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내적 자아가 천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비록 골고타 언덕이나 올리브 동산이나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맞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단 한 번도 주님을 고백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 2
“하느님 위한 ‘마음의 성전’ 지어야”
[해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한 이 말은 최후심판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왔느냐 하고 물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성지순례가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지순례를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지순례 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지순례가 오히려 도덕적으로 위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나 지금이나 열심한 신자들은 순수한 신앙심에 가득 차서 성지순례를 간다.
그레고리우스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지순례에 대한 부작용이 많았나 보다.
오늘날에 비해서, 그때에는 성지순례를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고,
또 돈 많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지순례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마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것이 구원의 보증인 양 착각하거나
성지순례를 신앙심의 척도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성지순례를 가서 기도해야만 주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이 같은 세태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지만 성지순례가 자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성지순례를 가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자신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거닐어보았지만,
자신의 신앙이 성지순례를 가기 전보다도 더 나아지거나 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셨던 그 장소, 주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가서
기도를 해야만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한다.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기도하는 이의 마음 자세가 훨씬 더 중요하다.
즉, 어디에서 기도를 하느냐 하는 기도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고 거니실 수 있도록
우리 영혼 안에 안식처를 마련해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기도의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나치게 성지순례를 강조하는 세태를 지양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성전건립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아 아름다운 성전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마음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커다란 성전을 짓는 데에만 온 정성을 다하고
우리 안에 ‘마음의 성전’을 짓는 데에는 소홀히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에 빗대어, 오늘날의 성지순례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성지순례가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순교 장소나 순교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떠나는 성지순례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자들은 마치 야유회를 가는 것처럼 약간 들뜬 기분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성지순례를 갈 때에는 미리 준비한 유인물과 기도서 등으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성지순례의 분위기와 마음가짐을 갖지만,
돌아올 때의 모습에서는 성지순례를 다녀온다는 분위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돌아올 때에는 대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면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버스마저 휘청거리는 것 같다. 그야말로 야유회를 다녀오는 분위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갈 때만큼은 성지순례를 가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간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지만, 성지순례의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으러 간다면,
적어도 그 날 하루만큼은 기도와 묵상, 감사와 찬미 속에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5일, 노성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광주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