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공간 ▒▒/∞·오늘의성인

3월 9일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수도자 / 성 도미니코 사비오 /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Berardus 2022. 3. 8. 18:18

 
 

The Vision of St Francesca Romana-GENTILESCHI, Orazio
1615-19. Oil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delle Marche, Urbino

 

3월 9일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수도자


St. Frances of Rome

St. Francisca Romana, C

Born:1384 in Rome, Italy

Died:1440 in Rome, Italy; relics at Saint Frances of Rome Church, Rome, Italy;

entombed beneath the pavement of the Ponziani sacristy of the

 Church of Saint Cecilia, Rome, Italy

Canonized:29 May 1608 by Pope Paul V

Third Order Franciscan

 


1384년에 태어난 프란치스카는 로마의 귀족 집안의 자녀로 12살 때

다른 로마의 귀족인 로렌조 폰지아니와 형식적인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수녀가 되려고 하였으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였고,

모범벅인 아내로서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안되어서 그녀는 중한 병이 들었는데

남편은 그 병을 고치려고 마법사를 불러들였으나,

프란치스카는 그를 딱 잘라 거절하며 집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자 성 알렉시스가 나타나서 그녀를 치유해 주었다.

그 후로 그녀는 그 수호천사의 발현과 도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 수호천사는

그녀를 팔꿈치로 슬쩍 건드리곤 했다.

로마의 트라스테베레 지역에는 폰지아니의 성이 있었고

그 한 모퉁이에 리빠의 성 프란치스코 소성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1212년에 세떼솔리의 야고바라는 로마의 귀부인이

 성 프란치스코에게 바친 것인데,

그녀는 1226년에 프란치스코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다.

적어도 1414년 까지

그 이웃 수도원은 트린치의 바오로 형제와 바울루치오 형제에 의해

1368년에 시작되었고, 다음 세기에 베르나르디노와 요한 카피스트라노 같은

 성인에 의해 공포된,

프란치스코 1회의 엄수파 수사들의 개혁운동에 속하는 34개중의 하나였다.

프란치스카 폰지아니가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한 곳이 이 리빠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그곳 신부들 중에서 바르톨로메오 본디 신부가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비노자라는 프란치스카의 큰오빠의 아내가 폰지아니 성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녀도 역시 결혼전에는 수도회에 들어가고 싶어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치스카와 함께 자선과 신앙 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함께 쓰지 않는 다락방이나 정원의 낡은 여름 움악에서

몇 시간 동안 기도 하곤 하였다.

17살에 프란치스카는 첫 아들을 낳아 아기의 이름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지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프란치스카는

 집안 일을 도맡게 되어 유능하게 또 성실한 크리스챤답게 의무를 잘 해나갔다.

마을에 기근이 들었던 동안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옥수수와 포도주를 제공하였는데 너무 후하게 주어

그녀의 남편은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비어있던 곡식창고가 놀랍게도 밀로 가득 차 있고,

빈 술통이 포도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하고는 아내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용해 주었다.

 

1400년 로마는 칩입을 받은데다 뒤따른 내란으로 폰지아니 집안에도 재난이 가해졌다.

로렌조는 로마 교황의 군대와 싸웠으나 부상을 당했다.

프란치스카가 그를 간호하여 건강이 회복되자 또 다시 전쟁에 참여하였다.

첫아들 요한은 포로로 잡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페스트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나 프란치스카의 둘째 아들과 딸이 그 병으로 죽었다.

황폐한 폰지아니 농장에서 농부들이 음식을 구걸하기 위해 프란치스카에게 왔다.

프란치스카는 환자들, 굶주린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그룹으로 조직된 로마의 부인들이 그녀의 일을 돕기로 하였다.

얼마동안 그녀도 페스트에 걸렸으나, 잠시 후 금방 회복되어 자선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카의 죽은 둘째 아들이 나타나서 대천사를 그녀의 수호천사로 모셔다 드렸다.

수호천사는 그녀가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자신을 감추어서,

그녀가 통회의 행실을 보여 줄 때까지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았다.

 

큰아들 요한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얼마되지 않아 어떤 경솔한 성품의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그여자는 프란치스카를 매우 싫어하여 화를 내다가 이상한 병에 걸려 괴로와 했다.

프란치스카의 다정한 손길이 그녀를 치료해준 후 며느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프란치스카는 집안 일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도시의 자선사업에 전적으로 봉사하였다.

1425년에는 그녀와 동료 6명의 로마의 귀부인들이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이것이 3회 회원임을 취소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프란치스카와 바노자가 100마일을 걸어

 로마에서 성프란치스코의 도시인 아씨시로 순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씨시 근처에서 성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발현하여 그의 지팡이로 야생 배나무를 쳐서

배고프고 목 마른 이 순례자들에게 시원하고 물이 풍성한 배를 선물하였다.

 

1433년 로렌조가 죽자 프란치스카와 그녀의 동료들은 '헌신자회'를 창설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거룩하신 성부와 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일했다.

도시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픈 아들을 방문하고 수녀원에 돌아온 후 프란치스카는

 갑자기 병이 들어 폰지아니성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7일 후인 1440년 3월9일 그녀는 사망하였다.

교황바오로 5세는 1608년 그녀를 시성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그녀를 기념하여 산타 프란치스카 로마나라고 불리우는

 로마 성당의 제대 아래에 있다.

성녀는 모든 베네딕도회의 중요한 수호자로 존중되고 있으나

역시 프란치스코 3회의 옷을 입었던 성인들 중의 한 분이시다.

-(평화의사도 -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기념집에서)-

 

 

1384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매우 어려서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았다.

성녀는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병자를 돌보아 주었다.

덕행에서 특히 겸손과 인내 그리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선업에서 뛰어났다.

1425년 성 베네딕도의 회칙을 따르는 봉헌자회를 창설했으며, 1440년 세상을 떠났다.

 

 

봉헌자회 총장 마리아 막달레나 안귈라리아가 쓴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까의 전기]에서

(Cap. 6-7: Acta Sanctorum Martii 2, 185-187)

 

성녀 프란치스까의 인내와 사랑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까에게 일어난 재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만성적이고

심한 질병을 통해서도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짜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자신에 대한 간호가 아무리 서툴러도 불만을 드러내는 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프란치스까는 그토록 사랑하던 자녀들이 채 크기도 전에 죽어 갔을 때

 자신의 확고 부동한 인내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복했고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렸다.

자기를 비판하고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의 말과 자신의 생활 양식을 비방하는 이들을

똑같은 인내로써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또 자신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에게 결코 반감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 드렸다.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까를 단순히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만 뽑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을

이웃의 영신적이고 육신적인 복지를 위해 쓰도록 간택하셨기 때문에

 그녀에게 어진 성격을 주셨다.

그래서 그녀를 대하는 이들은 누구나 즉시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사로잡혀

 그녀가 지시하는 것을

순순히 따랐다.

 

하느님의 권능은 그녀가 하는 말이 위대한 효과를 거두도록 하셨다.

그래서 프란치스까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써도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근심하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성난 이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며,

원수들을 화해로 이끌어 오랜 증오와 원한을 없애 주고,

 언젠가는 앙갚음하려는 사람들의 복수심을 막으며,

한마디로 사람들의 격정을 가라앉히고 그것을 올바른 목표로 이끌어 주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녀를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고 사방에서 와 그에게 모여들었다.

비록 그녀가 직선적으로 죄를 힐책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느님을 진노케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 없이 벌을 주어도 찾아오는 이들은 한결같이 위로를 받고 떠났다.

 

그때 로마에는 생명을 앗아가는 여러가지 전염병들이 돌고 있었다.

전염의 위험도 불사하고 거리낌없이 나아가 고통받는 이들과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선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한 다음

분주하게 간호해 주면서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병이 어떤 것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먼저 그들 때문에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견디어 내신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그 고통을 견디도록 격려해 주었다.

 

프란치스까는 자기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병자들만을 간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오두막집이나 공립 병원을 찾아가 목말라 하는 환자들에게

물을 주고 침상을 마련해 주며 상처를 싸매 주었다.

더 더럽고 참기 더 어려운 것일수록 더 세심히 더 성심껏 간호해 주었다.

그가 캄포산토라는 병원에 갈 때에는 그 병원의 제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과 진미를 늘 가지고 갔다.

집에 돌아온 때에는 그들의 낡은 옷가지와

 더러운 속옷을 가지고 와 깨끗이 빨아서 마치 주님 친히

입으실 옷인 듯 정성과 세심한 주의를 쏟아 수선하고 향수를 뿌리고는

 고이 접어서 상자에 넣었다.

 

프란치스까는 30년 동안 즉 남편과 함께 살 때에도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이런 일들을 했다.

그는 특히 산타 마리아 병원,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체칠리아 병원,

사시아의 산토스피리토 병원,

그리고 캄포 산토 병원에서 이런 일들을 했다.

전염병이 만연하던 이때에는 육신을 돌볼 의사들뿐 아니라

 영혼에게 봉사할 사제들마저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을 찾아내어 먼저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준비를 시킨

 환자들에게 모시고 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비용으로 한 사제의 생활비를 충당

했고 그 사제는 위에서 언급한 병원들을 찾아가

그가 지적해 준 환자들을 방문하곤 했다.

-(가톨릭홈에서)-

 

 

프란체스카의 생활은 세속 생활과 수도 생활 양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헌신적이고 사랑스런 아내였던 프란체스카는 기도와 봉사의 생활을 열망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부인들의 단체를 조직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카는 어릴 때부터 수도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이를 반대하고 젊은 귀족을 그녀의 남편감으로 골랐다.

 

프란체스카는 결혼 후 시가의 친척들과 가까워지게 되자 자기 시누이도

기도와 봉사의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카와 시누이 반노차는 각각 남편들의 격려를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함께 나섰다.

 

프란체스카는 얼마 동안 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사명감을 더욱 깊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프란체스카는 아들 둘과 딸 하나늘 낳았다.

가정에 대한 새로운 책임과 더블어

 이 젊은 어머니는 자기 집안 일에 더욱 마음을 쓰게 되었다.

프란체스카의 가정은 그녀의 사랑으로 번성하게 되었지만

몇 년 안가서 크나큰 재앙이 이탈리아를 휩쓸었다.

로마를 무자비하게 휩쓴 흑사병으로 프란체스카의 둘째 아들도 죽었다.

프란체스카는 병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마음에서

 병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기 재산을 내놓았다.

 

재산을 모두 탕진하자 프란체스카와 반노차는 자선을 청하러 다녔다.

그 뒤 프란체스카는 딸마저 죽자 자기 집의 일부를 병원으로 내놓았다.

프란체스카는 이와 같은 헌신이 세상에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공식 서원을 하지 않은 부인들의 단체를 설립할 수 있도록

교회에 허가를 청하여 승낙을 얻었다.

이 부인들은 단순하게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다.

 

한편 이 단체가 설립되고 난 뒤에도 프란체스카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생활을 택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죽을 때까지

 7년 동안을 이렇게 살다가 그녀의 남은 여생을 공동체에서 보냈다.

그녀의 반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산 것이었다.

 이 성녀는 1608년에 시성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프란체스카 로마나가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충성과 동료들에 대한 헌신으로 축복을 받으며

이끌어 간 모범적인 생활을 찾으려 할 때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를 기억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데레사 수녀는 기도와 가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프란체스카와 같은 환시를 본 것이다.

 

프란체스카 로마나의 생애는 우리 각자에게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깊이 찾도록 하며,

우리의 고통 속에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을 일깨워 준다.

프란체스카는 이런 생활이 꼭 서원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하느님께 아름다운 것들(Something Beautiful for God)에서

 마더 데레사는 자기 공동체의 수녀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빈민굴에 있는 수녀들 안에서,

그 수녀들을 통하여 당신의 생활을 뿌리 내리고 사시도록 합시다.

가난한 사람들이 수녀들을 보면서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고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과 생활 속에 들어오시도록

초대하게 합시다."

프란체스카 로마나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한 부인이 사회에 헌신적인 것은 대단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 일을 하는중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가끔 감실에 계신

하느님을 떠나야 합니다."(버틀러,’성인전’)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세상에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성녀는

 그 이름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자랐고,

로마 시민을 위해 힘쓰고 로마에서 돌아가신 순전한 로마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의 본명 프란치스카는 그녀의 양친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유난히 존경하고 있었던 점에서

유래된 것이고,이름은 인간성을 표시한다는 말대로 가난한 이에게 대한

 성녀의 동정심이 많았다는 점에

있어서 성 프란치스코와 흡사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그녀는 1384년에 부유한 로마 귀족인 바오로 부쏘와

 야코벨라의 딸로서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두 분 다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고 특히 교황청을 위해 적지 않게 노력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카는 그와 같은 양친의 자녀로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감화를 받고 성모 마리아의

소성무 일도와 다른 기도를 어머니와 같이 바치며 로마의 곳곳에 있는 성당을 참배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낙으로 삼고 있었다.

 

이처럼 신심이 깊었던 프란치스카가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어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겨우 12세 되었을 때

 일찍이도 그를 라우렌시오 데

폰시아니(Laurentius de Pontianis)라는 귀족 청년에게 출가시켜 버렸다.

프란치스카는 이를 알고 대단히 놀랐지만 고해 신부도 결혼을 좋다고 하므로 마침내

 자신의 희망을 버리고

폰시아니 가정에 출가해 남편을 잘 섬기며 일가의 주부로서의 책임을 완수했다.

그동안 자녀 여섯을 낳았지만, 그녀는 이를 모두 건실하게 교육시키고 또한 종들도 친자녀와 같이

친절히 대했으므로 그 가정은 늘 봄바람이 부는 듯이 화기의 행복 속에 살아 나갔다.

 

라우렌시오는 군인이었던만큼 무뚝뚝한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코 아내의 영적 생활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프란치스카가 구석의 작은 방을 성당모양으로 꾸미고 그곳에 들어가 묵상할 때

가끔 종들이 비방하는 것을 듣고서는 그들을 훈계하기도 했다

 

 

폰시아니 가문의 가정(家政)을

완전히 위탁받은 프란치스카는 한편 자선사업도 시작했다.

즉 그녀는 매일 아침 성당 앞에 모여오는 여러 거지들을 도울 뿐 아니라,

친히 빈민굴을 돌보며 가능한 한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병자를 위로하는 것도 하느님께 받은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성내에 병실까지 설립하며 이런 가련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친히 그들을 간호했다.

특히 흑사병과 같은 악성 유행병이 만연되었을 때나

기근(饑饉)과 같은 천재때에는 한층 더 병자나 빈민의

구제에 동분서주하고 그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재산을 통틀어 바쳐도 섭섭지 않을 열의를 표시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천사와 같이 존경하고 하느님께서도

그녀의 자선으로 비게 된 창고를 기적으로

다시 채워주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프란치스카에게도 쓰라린 시련의 시기가 왔다.

15세기 초엽 로마의 귀족들은 계속 서로 싸우고

있었으나 얼마뒤에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로마에 침입해 시내는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프란치스카의 남편 라우렌시오도 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포로가 된 데다

장남 요한 마저 적의 볼모가 되고, 가장 사랑하던 차남 에반젤리스트는 흑사병에 죽고,

딸 아녜스가지도 갑자기 죽게 되었다.

게다가 악한에게 재산을 약탈당하는 등 온갖 불행이 닥쳐온 것이다.

그런 프란치스카는 일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모든 고통을 인내해 가며

 오히려 가난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당나귀를 끌고 로마 근교 캄파니아의 들에 나가서

 나무를 주워 팔아 식료품을 사서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전쟁으로 인해

빈민과 병자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도저히 프란치스카 혼자의 힘으로는

마음대로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뜻을 같이하는 귀부인들을 모아 자선 사업을 하는 수도원을 시작하여

톨레 디 스베키에 그 수도원을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일원으로 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마침 적의 수중에 있던 남편과 아들이 돌아왔으므로

잠시 그 뜻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남편이 병을 얻어 프란치스카의

 간절한 간호를 받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때에야 원하던 희망을 풀기위해 아들 요한과 손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혈육의 정을 대의(大義)를

위해 끊고, 그들을 하느님의 손에 의탁하고 그들의 강복을 빌면서 이별하고 나서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

목에 줄을 걸고 톨레 디 스베티 수도원의 문전에 엎드려 입회를 원했다.

 

 

그 곳 수녀들은 본래 창립자인 프란치스카인지라

마치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 아이와 같이 기뻐하며 영접했다.

그리고 원장은 자발적으로 사임해 프란치스카에게 그 직을 맞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행이나 활동이 심신을 모두 피로케 했음이지,

4년 뒤인 1440년 그녀는 병석에 눕게 되고 마침내 3월 9일 자매들이

 애석해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는 56세였다.

 

그리고 성녀 프란치스카는 평소 수호 천사와 친밀히 지냈다고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에반젤리스트를 여읜 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0년간 늘 수호 천사를 자신의 옆에서 환하게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자세는 태양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얼굴은 늘 황홀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손을 가슴에 십자 모양으로 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보인 것은 성녀가 기도할 때와 성당에 있을 때 뿐이었다.

수호 천사는 그림자와 같이 그녀를 잠시도 떠나는 일이 없었으나

 다만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불합한

일을 하면 별안간 보이지 않았다가 그녀가 보속을 다하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수호 천사 기념일:10월2일,게시판675번,140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3월 9일 로마의 프란체스카 성녀 (3회)   


   프란체스카는 1384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겨우 12살이었을 때 귀족이었던 부모는 수녀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의 희망을 무시하고 그녀를 로마 귀족이었던 로렌죠 폰지아노와 결혼시켰다.

 다행히 행복한 결혼이었으며 40년간의 결혼생활 가운데 경건한 부부는 결코 싸우지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언제나 기도와 은둔을 사랑하였지만 가정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늘 말하곤 했다.

 “결혼한 여자는 제대에 계신 하느님을 떠나 가정의 의무 안에서 그분을 찾아뵈어야 한다.”

 한번은 시편을 읊는 중에 네 번이나 방해를 받았는데 다시 시편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이 황금으로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식탁에 놓인 훌륭한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의 보잘 것 없는 부스러기와 바꾸곤 했다.

그녀의 일상음식은 마른 빵이었으며 음료는 물 뿐이었다.

 1410년 로마의 침략 시기동안 남편 폰지아노는 추방당했으며 재산은 몰수당했고

 집은 파괴 되었고 장남은 인질로 잡혀 갔다.

 프란체스카는 이 모든 상실 안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과 그분의 거룩한 복된 이름만을 보았다.

평화의 결실로 손실이 유익으로 변했다.

프란체스카는 경건한 부인들의 회(오블라테스)를 설립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에 그녀는 그 수녀원에 들어갔다.

 맨발에 허리에 띠를 두르고 공동체에 받아들여줄 것을 간청하며 겸손히 들어갔다.

곧 장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을 보시고 하느님은 그녀의 수호천사로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친구를 보내주셨다.

그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는 그녀가 유혹을 받을 때 그녀를 보호해주고 선한 일을 할 때 인도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1440년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1608년에 시성되었다.

 

기도
오 주님, 당신의 종 프란체스카에게 다른 어떠한 선물보다
다정한 동반자 천사를 허락함으로써 그녀를 영광스럽게 해주셨으니,
당신께 간청하는 저희에게 성녀의 전구로 천사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신이 괴로움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육신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은 겸손과 인내, 순수하고 단순하며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힘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 작은 형제회 제 1 회칙 17장 -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우선 순위    

 

가족들의 생활은 돌보지 않고 교회 일에만 바쁜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여러 단체와 위원회와 회장직을 유지하는 데 자신의 시간을 다 쏟아 붓는다.

바자회를 준비하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동안에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방치되고 잊혀진다.

가장 슬픈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은 지금

하느님이 자신에게 기대하시는 일을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카는 가정과 신앙 생활을 어떻게 병행해야 할지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일생을 기도와 회개와 선행의 모범으로 살면서도 아내로서도,

어머니로서도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가 가족들을 그토록 잘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의 우선 순위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지켜 나갔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시간을 교회에만 쏟아 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제단 앞에서 성가가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

거룩함을 더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바로 그곳에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어디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3월 9일(5월6일)

성 도미니코 사비오


St. Dominic Savio

San Domenico Savio Adolescente

Born:2 April 1842 at Riva di Chieri, Italy

Died:9 March 1857 at Mondonio, Italy

Beatified:1950 by Venerable Pope Pius XII

Canonized:12 June 1954 by Venerable Pope Pius XII

Name Meaning:belonging to God (= Dominic) wise; learned (= Savio)

 

 

도미니코 사비오는 1842년에 피에드몬트의 리바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사제가 되려는 소망을 불태워왔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청소년 교육을 위하여 준비를 시작할 때

토리노의 성직자들에게 버림 받은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사업을 도와 주도록 의뢰하였는데,

도미니코의 본당 신부가 그를 추천하였다.

 

면담에서 돈보스코 성인은

 이 소년의 영혼 속에 은총이 충만한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가 12세 때 토리노의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학생이 되었다.

 

 

Don Bosco의 예방교육


돈보스코는 청소년들을 참으로 사랑하였고 청소년들도 돈보스코를 사랑하였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나의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겠다"는 열망으로 평범함 속에서
비범하게 이루어진 돈보스코의 '예방교육'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교육자에게 주어진 커다란 선물이다.

 

"예방교육"이란 청소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질과 역량을 모든 차원에서 일깨워 적극 장려함으로써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장시켜 진실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예방교육"은 온전하게 성숙한 인간,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이 '삶의 주역'이 되어
'삶을 축제'로 살아가는 행복한 인간을 양성해내는 교육여정이다.
이것은 선량함과 친근감, 기쁨과 신뢰, 사랑과 합리성이 깃든 교육 스타일이다.
그러므로 예방교육은 어떤 형태로든 강요와 억압,겉꾸밈,권위적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예방교육"은 돈보스코의 교육사상 전체와 연관되며, 전인교육의 근본 요청이다.
돈보스코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요청을 흡족하게 채워주고 존중해 주는
그의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청소년들을 내부로부터 재생시키는 길을 찾아 내었다.

 

그는 예리한 직관력과 독창적인 재능으로 청소년들의 깊은 염원을

 복음적 가치 및 올바른 삶의 원칙들과
결부시킬 줄 알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교육의 천재,

 교육학 방법론의 성인이라 부른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라고 자주 말한 돈보스코 예방교육법의 최고 원리이자

기본 패러다임은 '감응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방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내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교육적 분위기 조성과 성숙한 '

교육자의 현존'이라 할 수 있다.

-(살레시오수도회홈에서)-

 

 

* 성 요한 보스코(돈보스코) 사제 축일:1월31일.게시판1595번.

* 성 프란치스코 드 살(프란치스코살레시오)주교 학자 축일:1월24일.게시판158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

(이) Societa’ di san Francisco Salesio

(영) The 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성인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도적 사명감과 고귀한 정신에 감명되어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개성과는 달리,

도미니코는 자신이 그곳에서 조직한 ’무염 성모회’때문에 길이 기억된다.

이 회는 신심적인 목적 외에도 돈보스코를 여러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도와 주었으므로,

성 요한 보스코가 살레시오회의 모체가 되는 모임을 결성했을 때,

’무염 성모회’의 회원 22명이 주요 회원이 되었다.

 

한 번은 학교 내에서 두 학생이 돌을 들고 싸울 때,

도미니코는 그들 사이에 작은 십자가를 들고 끼어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싸우기 전에 이 십자가를 먼저 보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박해자들을 용서하시고 운명하셨다.

나는 죄인이다. 그리고 나는 양심을 갖게 됨으로써 그분을 욕되게 한다.

자, 이제 싸워도 된다. 그러나 그 돌을 먼저 나에세 던져라.’

 

나이어린 이 소년의 한 마디 말은 그의 인품과 성덕을 밝히는 중요한 말이다.

그는 학교의 규칙을 지키는데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였고,

그의 기도 정신은 당대의 어느 큰 성인과 못지 않았다.

가끔 돈보스코는 그의 과도한 열성을 탓하고 중지시킬 정도였다.

 

이럴 때마다 그는 ’저는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하렵니다.’하며 대답하였다.

 

 

또 돈보스코는 그가 고행에 몰두하는 것을 다소 저지하였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신심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밤, 도미니코는 얇은 시트 한장을 덮고 떨고 있는 것을 돈보스코가 발견하고,

’왜, 이런 짓을 하는냐, 폐렴에 걸리려구?’하자,

그는 우리 주님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계셔도 폐렴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여 돈보스코를 놀라게 하였다.

 

또한 도미니코는 아침 미사때부터 몇시간 동안 기도에 빠져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런 내밀한 기도 시간을 ’나의 기분 전환’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그에게는 마치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보는 듯 하다고 말하였다.

한 번은 그가 이런 기도 중에서 일종의 환시를 보았다.

 

 

황량한 들판에 수많은 군증들이 있고,

그곳으로 횃불을 들고가는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돈보스코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횃불은 영국 국민들에게 전해야 할 가톨릭 신앙입니다.’

돈보스코는 이 사실을 당시의 교황 비오 9세께 알렸고,

교황은 이어 영국에 대한 큰 배려를 하게 되었다.

 

그의 건강은 날로 나빠져서, 1857년에는 고향집이 있는 몬도니오로 보내졌고,

3월 9일 저녁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의 시복은 1914년에 로마에서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몇 가지 반대에 부딪혀서, 돈보스코의 시성 후에야 이루어졌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3월 9일 (1월10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St. GREGORY of Nyssa
San Gregorio di Nissa Vescovo
Cesarea di Cappadocia, circa 335 - 395
Gregorio = colui che risveglia, dal greco

 

 
니사의 그레고리오(G. Nyssenus, 332?~395?).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 대(大)바실리오의 동생.

니체아 그리스도론의 완성자.

아버지는 부유한 변호사이며 맏형과 같은 이름인

바실리오와 동생 베드로(Petros, 세파스테의) 및

그 자신이 모두 주교(主敎)였고,

맏누이 마크리나(Macrina)는 수녀원장,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자리아에서 태어나

 맏형과 같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없어 독학을 한 것 같다.

웅변가라는 화려한 직업을 버리고 형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형이 카파도키아의 카이자리아 주교가 되자(370년),

 그 근교 니사의 주교로 추거(推擧)되어(371년),

무명했던 니사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적,

동질적의 뜻)의 아성으로 유명해졌다.

아리우스파인 발렌스 황제(재위 : 364~378)는 전통파 압박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그는 교회 내외의 아리우스파의 책모로 인해 마침내 추방당하였다가(375년),

황제의 사후에 복직되었다(378년).

안티오키아 회의(379년)에 출석,

또한 아라비아 · 팔레스티나를 순력(巡歷)하였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 출석,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의 주교 취임을 축하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데오도시우스 1세(재위 : 379~395)로부터 정통파의 기둥 같은 존재로 인정받고,

그의 분투에 의해 아폴리나리오스파는 이단(異端)으로 선고되었다.

그 후 적어도 세 번 콘스탄티노플의 지방회의(383, 385, 394년)에 출석하였다.

 

그는 오리제네스 이래의 조직신학자이며, 카파도키아 교부들 가운데서

제일 심오한 철학적 신학자.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형 바실리오와 똑같은 입장.

그가 ‘본질’(本質)과 ‘위격’(位格)을 구별하여(362년경의 아타나시오는 양자를 동일시),

 1본질 3인격(mia ousia, treis Hypostaseis, 삼위일체)을 주장한 것은 불멸의 공헌이다.

‘성령론’(聖靈論)에 대해서는, 성령은 자식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1인격에서의 결합(2성 1인격)을 주장했으며(후세의 칼체돈 그리스도론과 동일 결론),

마리아론에 있어서는 ‘만물의 부흥’을 주장하였다.

통틀어 그의 사상은 신비주의 색채가 매우 짙다.

 

그는 카파도치아 교부들 중의 유일한 저술가이다.

 ㉮ 교리적 저술 ≪Adversus eunomium≫(4권, 380~383?),

≪Adversus Apollinaristas≫,

≪Sermo de Spiritu Sancto adversus Pneumatomachus Macedonianos≫,

㉯ 강해적(講解的) 저술 ≪De opificio hominis≫, ≪In hexameron≫,

㉰ 수덕적(修德的) 저술 ≪De virginitate≫, ≪De instituto Christiano≫, ≪Vita Macrinae≫,

㉱ 연설 · 설교집, ㉲ 서한집으로 30통의 편지가 잔존.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성 바실리우스(Basilius, 5월 30일)와 성녀 엠밀리아(Emmilia, 5월 30일)의 아들로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나
그의 형인 성 대 바실리우스(1월 2일)와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Macrina, 7월 19일)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기에

수사학자가 되어 테오세베이아(Theosebeia)와 결혼하였다.
그는 수사학 교수가 되었으나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의 영향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한 후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르메니아(Armenia)의 니사 교구의 주교가 되었으나,
아리우스파(Arianism)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폰투스(Pontus)의 집정관으로부터
교회 재산을 남용했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도망쳤는데, 그라티아누스(Gratianus) 황제가 그를 다시 복직시켰다.


379년 그는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을 단죄한 안티오키아(Antiochia) 공의회에 참석하였고,
이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아라비아의 이단들을 척결하도록 파견되었다.

 

또한 그는 381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도 참석하여

 아리우스(Arius) 이단을 공격하고,
니케아(Nicaea) 선언문을 재확인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오리게네스(Origenes)와 플라톤(Platon)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학자로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680-681년)는 그를 '교부들 중의 교부'로 선포하였다.
-(가톨릭홈에서)-

 

* 성 대 바실리오 축일:1월2일.게시판154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교부들의 가르침: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 신학자, 성서주석가로 활발한 활동
 

가계
교회사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집안만큼 뛰어난 가문은 그리 많지 않다.

조부모가 고백자(증거자)인데다, 할아버지는 순교자였다.

할머니 마크리나 1세는 오리게네스의 학생이자 네오체사레아의 주교인

 그 유명한 기적가 그레고리우스의 제자였다.

그레고리우스의 아버지는 폰투스 출신으로 네오체사레아에서 수사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막내아들 베드로가 태어난 뒤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어머니 엠멜리아 역시 카파도키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동생이 주교였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모두 아홉 남매가 있었는데,

누이 마크리나(329년 이전 탄생)와, 형 바실리우스(329/30년 탄생),

그리고 그레고리우스(335/40년경 탄생)가 셋째이며,

베드로(340/45년경 탄생)가 막내이다.

일찍 죽은 나우크라티우스 이외에 네 명의 누이를 두었으며,

 아마도 모두 결혼한 것 같다.

그 가운데서도 마크리나는 동생들을 도와 말없이 그들을 거룩한 길로 인도하였고,

 대 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 베드로는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교의에 영향을 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가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그레고리우스의 가족은 네오체사레아 근처에 있는

 안네시의 농장으로 집을 옮겨갔다.

장녀 마크리나는 그곳에 수도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이렇듯 할머니 마크리나 1세, 엠멜리아, 마크리나 2세,

대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베드로가 성인으로 공경 받을 정도로,

그레고리우스는 훌륭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생애
그레고리우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자신에 관한 자료를 전혀 남기지 않았으며,

동시대인들과 동시대의 기록들도 그를 드문드문 언급할 뿐이다.

바실리우스는 아테네에서 돌아 온 뒤

 잠시 갑파도키아의 체사레아에서 수사학 선생으로 활동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스승' 또는 '아버지'라고 부른 바실리우스에게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처음에 교회의 독서자였다가, 한때 그리스도교 금욕적 이상을 벗어나려 하기도 하였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두고 그를 나무라는 듯한 편지를 보냈다.

 바실리우스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가 금욕적 이상에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할 때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으로 향했으며 수사학자가 되고자 하였다.

 특히 율리아누스 황제(361~363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직업을 금지한 뒤에 더 큰 매력을 준 것 같다.

 이 시기에 그레고리우스는 같은 신분계층의 여인인 테오세베이아를 만나 결혼한 것 같다.

그는 집안의 경건한 분위기에 얼마간 반항적이었다.

그 일화로 그는, 안네시에서 멀지 않은 이보라에 세바스테이아 출신인

 40명의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운 묘 축성에 오라는

어머니의 초대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가기는 했지만 너무 늦었다.

가족과 참석자들은 이미 정원에 나와 성유물함을 위해 밤기도를 바치고 있었고,

웅장한 시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이웃집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그런데 꿈에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그가 정원에 들어서려고 했을 때 한 무리의 군인이 문 앞에서 막고 서서

 막대기로 그를 위협하였다.

온유한 노인이 나타나 그들에게, 젊은이의 우유부단함을

용서하라고 간청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심하게 얻어맞았을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꿈에서 본 것이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 때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 호수에서 죽은 40명의 순교자들이었음을 깨달았다.

372년 카파도키아 지방이 둘로 갈라지자 바실리우스는

제1카파도키아에 주교좌를 늘려 형제와 친구들을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때 바실리우스는 그레고리우스를 체사레아에서 안키라 쪽으로

국도에 자리한 니사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바실리우스의 진술에 따르면, 그레고리우스는 천재였지만

어린애 같고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어쨌든 그레고리우스는 주교 재임 동안 첫 7년은 직무를 수행하느라

 꽤 어려움을 겪은 것 같다.

그 당시에 이미 '대(大)'라는 경칭이 붙은 바실리우스는

 카파도카아 지방 수도인 체사레아에서 주교직을 맡은지 9년 만인 379년 새해에 죽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온실의 화초처럼 살았지만

 그 뒤로는 소나무가 되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교회정치가, 실제적인 교의문제를 해결한 신학자,

존경받는 연설가, 설교가, 성서주석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더욱이 바실리우스의 작품들도 더 높은 철학적 단계로 끌어 올렸다. 

 

그레고리우스와 마크리나


379년 가을, 40대에 들어선 그는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가 소집한

교회회의에 참석하러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마크리나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그에게 마크리나에 관해 글을 쓰고 그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크리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372년부터 8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그녀를 방문하였다.

 마크리나가 죽기 바로 전에 그는 그녀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영혼과 부활」을 출판하고 그 뒤 그녀의 생애를 집필하였다.

이 '생애'를 처음 영어로 번역한 학자는 이 소책자가 기원후 4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4세기에 씌었다면, 고전 세계문학에 속했을 것이라며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영적 스승인 마크리나를 늘 생각하였다.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마크리나를 추억하는 짧은 글을 적어 보냈다.

 "우리에게 누이는 우리 삶의 스승이자 어머니를 뒤이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솔직하게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힘을 솟게 하는 성곽이요, 하느님 마음에 드는 무기였으며,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와 같았습니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 19, 6).
 

신비신학


그의 신비신학에서는

 필립 3,13에 따라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내뻗음'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그는 영혼의 영적 상승을 나타내는 이 개념을

노년의 작품인 "모세의 생애"에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다.

하느님 자신은 참된 덕이시며, 이해할 수 없고 끝없는 분이시다.

인간은 이 참된 덕을 사랑하고 열망해야 하며,

하느님 자체인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늘 이 목표에 전념해야 한다.

 뱃사람이 가고자 하는 항구의 신호등에 뱃머리를 맞추듯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성인들도 삶의 목표에 도움이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인간이 추구하는 완전한 삶에 관한 논고를 모세의 생애로 구체화한다.
-<가톨릭신문, 2003년 6월 29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1]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아가 강해’에서

 

하느님을 품을 수 있는 인간
 

본문
창조주께서 그대를 모든 피조물보다 얼마나 더 존귀하게 여겼는지 깨닫기 바라오.

그분은 하늘도 달도 태양도

아름다운 별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당신의 모습(eikon)에 따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대만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본성의 모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의 초상이며,

 참된 신성(神性)의 닮음이고,

복된 삶을 담는 그릇이며, 참된 빛의 각인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

그대는 그대의 순수함에서 반사되는 광채로

그대 안에서 빛나고 계신 그분을 닮아가면서(2고린 4, 6),

그분처럼 됩니다.

그러기에 피조물 가운데 그대의 위대함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 전체는 하느님 한 뼘의 손으로 가릴 수 있고,

땅과 바다도 하느님의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위대하시고 능하신 분이시며 주먹으로 피조물 전체를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대가 완전히 품을 수 있는 분이 되시고 그대 안에 거처를 정하십니다.

그분이 그대의 본성 안에서 걸으셔도 결코 비좁아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 안에서 살며, 그들과 함께 걷는다』(2고린 2, 16).

만일 그대가 이 장면을 본다면, 그대는 이 지상의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는 일이 없으며,

하늘을 더 이상 놀라운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 자신이 하늘보다 더 변함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 인간이여, 어찌하여 아직도 하늘을 보고 감탄합니까? 하늘은 사라지지만(마태 24, 35),

그대는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곧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광활하게 펼쳐져있고 밀물이 끝없이 뻗어나간다고 놀라지 마시오.

그대는 땅과 밀물을 보면서 그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쌍의 어린 말을 탄 기수처럼 그대는 이 요소들을 그대가 좋게 여기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것들을 복종시킵니다. 곧, 땅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으로 그대를 도와주고,

 바다는 말을 잘 듣는 어린 말처럼 그대에게 등을 내밀며

 인간을 바다의 기수로 받아들입니다.

 

「아가 강해」 2, 68~69

 

해설

“나는 하느님의 모상임을 자각해야”

「교부들의 황금시대」라는 4세기에는

 기라성 같은 교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지방에는 더욱더 휘황하게 빛나는 세 별,

곧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있었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 395년경)는 젊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수사학을 공부하며 세속적 출세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누이 크리나와 형 바실리우스로부터 영적 감화를 깊이 받고,

 또 형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권면으로 수도생활에 투신합니다.

그의 관상생활의 정화인 「아가 강해」는 이러한 수도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형 바실리우스가 틀을 놓은 수도제도에 신비적 성격을 새겨 놓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특히 사순시기에 낭독되기도 하였으며,

훗날 「지성적 신비주의」라는 영성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구약성서의 「아가」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해석하였으며

 「아가」가 뜻하는 영적인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특히 오늘날처럼 마음이 메마르고 분열되어있는 시대에 우리는

「아가」가 지니고 있는 「사랑의 언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가」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실로 에로틱하여 종교적 글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지만,

 그레고리우스의 깊은 영적 해석에 따라 읽어나가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 무한히 깊어져가고

 영적으로 이해된 그들의 혼인에서 솟아오르는 즐거움을 구구절절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레고리우스의 전 15편의 강해 가운데 둘째 강해로,

 「아가」 1장 8절(여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여,

만일 그대가 자신을 모른다면…)을 해석한 부분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여기서 진정으로 「자기를 아는(自己知)」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자기가 아닌 것과 구별하여 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후자에 관한 해석입니다.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품을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모상은 그 원형(原型)을 그저 가만히 닮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형에 대해 끊임없이 자기를 개방하면서 닮아가는 동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덕(德)이란, 단지 인륜의 문제가 아니라, 신비에 관한 그의 또 다른 주저

「모세의 생애」의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혼이 「사랑의 질서」 안에 흔들림 없이 뿌리를 내리며,

 하느님과 그 사랑의 신비를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김산춘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서강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12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6]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모세의 생애’에서

 

빛나는 어두움

 

본문
모세가 어둠 속에 들어간 것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이야기는 모세가 처음 하느님을 만났을 때와 다소 상충되는 것 같다.

 하느님께서는 그 때에는 빛 속에서였지만 지금은 어두움 속에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숙고하는 영적인 실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일관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점을 통해 성서 본문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종교적 인식이 다가올 때 제일 먼저 빛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 빛은 어두움인 불경과 반대편에 위치하며,

 어두움은 빛의 감미로움을 통해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크고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

실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인식한 것을 풍요롭게 관상할수록

신적인 본성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신은 오관이 감지하는 것이나 지능이 알았다고 여기는 모든 징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욱 내심 속으로 잠긴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보이지 않는 분」

 그리고 「깨달을 수 없는 분」에게 다가가면서 바로 거기서 하느님을 뵙는다.

사실 정신이 찾고자 하는 그분에 대한 인식이나 정신이 지닐 수 있는 참된 시각은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바라보는 데 있다. 정신이 찾고 있는 그분은

모든 인식을 초월하여 마치 어두움 속에 있듯이 그분의 불이해성을 통해 모든 것과

 분리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나는 어두움 속으로 스며들었던 신비가 요한은,

 이러한 부정을 통해 신적인 본질에 대한 인식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지적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다가설 수 없는 것임을 정의하면서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 1, 18)고 말한다.

 

「모세의 생애」 162~163
 
“삶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라”

 

해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 숨쉬는 터키로 순례 여행을 떠나보자.

 이방인 개종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그리스도인)」란 이름을 얻었던 곳 안티오키아.

순교를 앞 둔 이냐티우스의 뜨거운 교회 사랑이 숨쉬는 곳.

그 곳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평원을 가로지른다.

높은 산맥 속의 굽은 길로 한참 오르다보면 갑자기

새로운 평원 고원지대를 만난다. 마치 하늘을 맞대고 있는 듯

모든 산천이 신비스러운 카파도키아가 한 눈에 펼쳐진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335년에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유복한 신자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수도자였던 누이 마크리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내면적인 영적 생활에 흠뻑 젖는다.

 니사의 주교로 임명되어 영향력 있는 교회정치가, 실제적인 교의문제에 관한 중요한 신학자,

 존경받는 연설가, 설교가, 성서주석가가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칼케돈 공의회(451)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론에 관한 신학적 논쟁 속에서 비중 있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전 그리스 철학을 종합한 신학자로서

 관상적 신비주의 신학에 큰 공헌을 한다.

 

「모세의 생애」(De vita Moysis)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히스토리아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첫째 부분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따른 모세의 생애를 요약하고 있으며, 테오리아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두 번째 부분은 모세의 생애에 대한 관상(contemplatio)이 기술된다.

위의 본문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에 대한 관상 부분이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소용돌이치는 오늘날, 참된 신앙생활을 위한

 영적 갈증을 느낄 수 있다.

이 갈증의 해소를 위해 「구심기도」, 「향심기도」, 「관상기도」,

「렉시오 디비나」 등 많은 것을 찾게 된다.

 이를 잠시 뒤로 하고 살아있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보자.

『세례 받을 때 빛 속에 있었던 내가 왜 지금은 어두움 속에 있는지?』,

 『왜 영적 실제들은 일관성이 없는지?』 그에게 나지막이 물어보자.

그레고리우스는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먼저

『오관이 감지하는 것이나 지능이 알았다고 여기는 모든 징후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더욱 내심 속으로 잠겨라』(「모세의 생애」 163)고 답한다.

그리고 마치 『모세가 이전에 받았던 같은 가르침을 어두움을 통해 받았듯이,

거룩한 말씀의 증언을 통한 가르침을 굳게 믿어라』(「모세의 생애」 165)고 충고한다.

또한 『거룩한 말씀이 보호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들이 아는 것 중

 어느 것과도 동일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적인 본성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해력을 통해 형성된 모든 개념은

 오직 하느님의 우상을 만들뿐 결코 이에 대한 진실한 이해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

(「모세의 생애」 165)을 일깨운다.

우리가 영적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의 우상만을 만든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어리석은가! 그레고리우스는 관상 기도를 통해 쌓은 것을

그대로 내버리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주님의 산으로 오르라고 권고한다.

 삶의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참된 영적 생활을 위해 덕스러운 인간의 삶의 완성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인의 덕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하느님에게 관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올바름과 관계된다.

 사실 풍습의 순수함은 종교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방금 전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이 앎은 인간적인 인식 방법과 비교하여 그분에 대한 어떤 관념도 품지 않아야 함을 배웠다.

우리가 배워야 할 덕의 또 다른 형태는 덕스런 삶은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의 생애」 166).

아직도 「어두운 어두움」 속에 있다면,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

「빛나는 어두움」에로 순례 여행을 떠나보자. 『마음의 귀가 밝은 사람은 그 소리를 듣는다』

(「모세의 생애」 169).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수원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7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5 :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편지’에서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기도의 장소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머무르시고 거니실 수 있는 안식처를 마련해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내적 자아가 천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비록 골고타 언덕이나 올리브 동산이나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우리가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맞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단 한 번도 주님을 고백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편지’ 2


“하느님 위한 ‘마음의 성전’ 지어야”
 

[해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한 이 말은 최후심판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다녀왔느냐 하고 물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성지순례가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지순례를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지순례 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지순례가 오히려 도덕적으로 위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나 지금이나 열심한 신자들은 순수한 신앙심에 가득 차서 성지순례를 간다.

그레고리우스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지순례에 대한 부작용이 많았나 보다.

오늘날에 비해서, 그때에는 성지순례를 간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고,

 또 돈 많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지순례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마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것이 구원의 보증인 양 착각하거나

 성지순례를 신앙심의 척도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성지순례를 가서 기도해야만 주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이 같은 세태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지만 성지순례가 자신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성지순례를 가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자신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거닐어보았지만,

자신의 신앙이 성지순례를 가기 전보다도 더 나아지거나 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셨던 그 장소, 주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가서

 기도를 해야만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한다. 

어디에서 기도하든지 간에 기도하는 이의 마음 자세가 훨씬 더 중요하다.
즉, 어디에서 기도를 하느냐 하는 기도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고 거니실 수 있도록

 우리 영혼 안에 안식처를 마련해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기도의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나치게 성지순례를 강조하는 세태를 지양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성전건립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아 아름다운 성전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마음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커다란 성전을 짓는 데에만 온 정성을 다하고

 우리 안에 ‘마음의 성전’을 짓는 데에는 소홀히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에 빗대어, 오늘날의 성지순례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성지순례가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순교 장소나 순교자의 묘소를 참배하러 떠나는 성지순례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자들은 마치 야유회를 가는 것처럼 약간 들뜬 기분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성지순례를 갈 때에는 미리 준비한 유인물과 기도서 등으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성지순례의 분위기와 마음가짐을 갖지만,

돌아올 때의 모습에서는 성지순례를 다녀온다는 분위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돌아올 때에는 대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떠들면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버스마저 휘청거리는 것 같다. 그야말로 야유회를 다녀오는 분위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갈 때만큼은 성지순례를 가는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간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지만, 성지순례의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본받으러 간다면,

적어도 그 날 하루만큼은 기도와 묵상, 감사와 찬미 속에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5일, 노성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광주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