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교외 낭떼르 태생인 그녀는
불과 7세의 어린 나이에 오세르의 성 제르마노를 만난 뒤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양친이 돌아가시자 그녀는 파리로 왔고, 15세의 나이로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환시와 예언 때문에 파리 주민들로부터 미움과 천대를 받았지만,
성 제르마노는 그녀를 극구 지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르마노의 부제는 사람들을 충동하여 그녀의 예언은 거짓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프랑크인들이 파리를 봉쇄했을 때 그녀가 나서서 굶어 죽어가는 시민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고,
점령자를 설득하여 포로 석방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451년, 그녀는 또 아띨라 2세와 훈족이 파리를 점령하리라고 예언하였고,
그녀가 시민들과 더불어 기도한 뒤에는 파리가 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성 디오니시오께 바치는 성당 건립을 도왔고, 클로비스 국왕을 설득하여
성 베드로.바오로 성당을 세우게 하였다.
1129년에는 파리를 휩쓸었던 재앙과 염병을 퇴치하므로써 이 도시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는 422년 프랑스 어느 농가에서 태어났다.
430년 성 젤마노 주교가 순례도중
어린 제노베파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주교님은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원하는가 물었다.
어린소녀는 그것이 오랜 꿈이라고 말했다. 주교님은 강복을 하신뒤
예수 이름이 새겨진 패를 주시면서 내 약속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제노베파는 끝임없는 기도와 고행으로 봉헌될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못마땅했다.
어느날 성당에 가는 소녀를 어머니는 몹시 매질을 해줬다.
그러자 즉시 그 어머니는 소경이 되었다.
제노베파는 451년 ‘훈’ 족의 두목 아띨라가 대군을 인솔하여 프랑스를 침입해왔다.
가는 곳마다 약탈했고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파리에 이 소문이 퍼지자 시민들은 모두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자 성녀는 하느님의 힘을 입어 이렇게 말했다.
‘파리는 결코 침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리어 여러분들이 피해가는 곳이 더 위험할 것 입니다. ‘ 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의 적중되었다.
그 후 기적으로 전쟁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성녀는 빵을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 국민은 지금도 ‘조국의 어머니’ 라고 부른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성녀 제노베파는
프랑스 파리의 수호 성녀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파리뿐 아니라 온 천하에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성녀의 생애(生涯)를 회고해 볼 때 느끼는 것으느 하느님께서는 가끔 연약한 자를 선택하셔서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성녀 제노베파는 422년 프랑스의 낭테르라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430년 성 젤마노 주교께서 순례(巡禮)도중 그 마을에 들르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주교의 강복을 받기위해 모여들었는데, 어린 제노베파도 그 중에 끼여있었다.
주교께서는 필연 그때 하느님의 묵시를 받으셨음인지 제노베파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대는 몸과 마음을 예수께 봉헌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니까 이 소녀는 대뜸 즐거운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그것은 훨씬 전부터 제가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와 같이 성당에 가자."
주교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면서 소녀를 그 동네의 성당에 안내하시고
그 머리위에 두 손을 얹어 강복하신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진 패를 주시면서
"언제든지 이것을 목에 걸고 네 약속을 잊지 말라"고
간곡하면서도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재차 여행에 오르셨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제노베파는 여전히 부모의 슬하에 머물러 있었다.
이 소녀의 신심은
날이 갈수록 더우 깊어갔다. 특히 많이 기도하고 고행을 했다.
그녀의 나이는 비록 어릴지라도 하느님 대전에는 이미 위대한 자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보호하히고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어 기적까지도 행해 주셨다.
어떤 날 성녀께서 어머니에게 "성당에 조배하러 가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청했더니,
그때 어떠한 일로 매우 마음이 상하여 있었던 어머니는
허락은 커녕 의외로 성녀에게 무수히 매질햇다. 그러자 어머니는 즉시로 소경이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께 그의 죄를 보속시키신 것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녀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라고 하며, "네가 그 위에 십자가를 그어라"고 했다.
제노베파가 그대로 하니까 어머니는 딸의 기도를 의지해 그 물을 찍어서 눈에 바르니,
즉시 사방이 훤하게 이며 전과 다름없는 완전한 눈이 되었다.
그 후로 어머니는 물론이지만, 아버지도 딸이 하느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노베파 자시은 여전히 순진한 마음으로 가정에서는 어머니를 돕고, 밭에서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열심히 일했으므로 그녀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녀를 탄복하고 존경했다.
그녀는 주교로부터 한폭의 머리수건을 받았다. 그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하여 시련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머리수건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양친이 연거푸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 성녀의 대모는 그를 파리에 데리고 갔다.
제노베파는 그곳에서도 엄격성은 주교께서 차마 볼수가 없어 말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령 그녀의 음식물은 언제든지 고작 보리 빵과 과일뿐이고
거기에 물을 좀 마시는 것뿐이었으며 포도주 같은 것은 마시는 일이 없었다.
또한 엄격한 단식재를 지키며 거의 끊임없이 기도했다.
또 파리에서도 시련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중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 중병이 겨우 나으려 할 때,
이번에는 여러 악한 자들이 터무니 없는 허물을 다 들추어 말했으므로
또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음으로
양으로 항상 보호해 준이는 성 젤마노 주교였다.
그러는 동안에 제노베파에 대해 큰 시련도 되고 명예도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451년 훈족의 두목 아틸라가 대군(大軍)을 인솔해 프랑스를 침입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하고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훈족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지자,
시민들은 어쩔 줄을 몰라 갈팡질팡하며 한시라도 빨리 가족을 데리고 도망하려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굳세게 반대한 것은 저 연약한 동정녀인 제노베파뿐이었다.
"여려분, 시중(市中)에 머무르십시오. 적은 파리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이 도망가는 곳이야말로 위험합니다."
그러한 그녀의 의견에 순종한 이는 부인들뿐이었다.
남자들은 ’거짓 예언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우리를 야만인에게 넘기려고 하는구나. 죽여 버리자!"하고
살기에 가득찬 얼굴로 그녀를 붙잡아 막상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다행히도 그곳에 세드리오라는
사제가 달려와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당신들은 전에는 이 동정녀를 존경하고 그녀의 기도의 힘을
믿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찌해서 마음이 변했습니까?"하며
지성껏 말렸으므로 흥분햇던 남자들도 점차 진정되어 마침내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제노베파의 예언은 훌륭히 적중되었다.
아틸라는 파리 방면에는 오지 않고 다른 방면으로 향해, 오래지 않아 전쟁에 패해 후퇴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제노베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왕까지도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보며 따르게 되었다.
그녀에게 기도를 청하러 오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그녀는 기도의 효험은
가끔 유명한 기적까지도 일어 나게 했다.
제노베파는 또 한 번 파리 시민을 커다란 환란에서 구제한 공로가 있다.
그것은 파리가 클로비스 왕의 군대에 포위되어,
양식이 떨어져 사람들이 굶어 죽은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노베파가 기이하게 양식을 구해왔고,
또한 그녀의 성스러운 생활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국민이 그녀를 지금도 조국의 어머니(母)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녀는 90세의 고령(高齡)에 이르러 512년에 하늘로 오르고 사후 즉시로 성녀품에 오르셨다.
파리의 보호자라고 존경받는 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녀 제노베파(Genovefa)는 419년
혹은 422년 파리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낭테르(Nanterre)에서 태어났다.
성녀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고 하지만, 부유하고 존경받는 도시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전기에 따르면 429년에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를 만났다.
이때 성 게르마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성 루푸스(Lupus, 7월 29일)와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어 가는 도중이었다.
성 게르마누스는 설교 도중 어린 여자 아이가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로 듣는 모습을 보고,
설교가 끝난 뒤 여자 아이를 불러 여러 가지를 물은 뒤 성덕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낭테르 근처에는 수녀원이 없었기에 성녀 제노베파는 집에 머물면서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성녀 제노베파가 언제 수도자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 게르마누스가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혀 주었다고도 하고,
16세 무렵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파리의 주교
빌리쿠스(Vilicus)에게서 수도복을 받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부모가 돌아가자 곧 파리로 가서 대모와 함께 머물며 자선과 금욕의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성녀 제노베파가 신성을 모독하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성녀 제노베파가 환시를 자주 체험하자,
그녀의 환시와 예언을 기만과 사기로 취급했다.
그러나 성 게르마누스의 중재와
지원으로 반대자들의 음모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파리의 주교는 그녀에게 파리에 살며 수도생활을 원하는 처녀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겼다.
451년 훈족의 왕인 아틸라(Atila)가 쳐들어와 파리를 위협하자,
주민들은 모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성녀 제노베파는 하느님을 믿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면서
회개와 보속을 하면 파리는 안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었고, 아틸라의 군대는 오를레앙(Orleans)에서 패배하였다.
몇 해 뒤 프랑크족의 왕인 메로비히(Merowig)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성녀 제노베파의 자선과 희생은 더욱 빛났다.
그녀는 굶어 죽어가는 시민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고,
점령자를 설득하여 포로 석방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영향을 받은 메로비히와 후계자인 아들 힐데리히 1세는
파리 시민들을 특별히 관대하게 대했다.
특히 힐데리히 1세는 파리의 초대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짓게 하였다.
또 메로비히의 손자인 클로비스 1세를 설득하여
파리에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를 기념하는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성당이 완공되자
그녀의 유해는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 성당은 이후 그녀의 프랑스어 이름대로
주느비에브(Genevieve) 성당이라고 불렸다.
성녀에 대한 신심은 많은 기적을 낳았다. 834년 홍수가 일어나 파리가
완전히 침수되는 위기에 놓였을 때 성녀에게 전구하여 이 위험에서 벗어났다.
1129년에 열병으로 만 사천 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성녀를 기리는 행렬 도중 병마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녀는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