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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예수 성명 축일 / 성녀 제노베파 혹은 제느비에브

Berardus 2022. 1. 2. 18:55


  

1월  3일

예수 성명 축일


Most Holy Name of Jesus

Santissimo Nome di Gesu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THE HOLY NAME OF JESUS)

 

1530 년 클레멘스 7 세에 의하여 인준되어 작은 형제회에서 1 월에 이 축일을 지내왔으며

1721 년부터는 인노첸시오 13 세에 의해서 전체 교회에 확산되었다.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은 바로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신심으로

특별히 예수의 이름을 항상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그 이름을 선포하며

특별히 유혹과 시련의 때에 그 이름의 힘에 확신을 가지고 호소함으로 힘과 위로를 얻는다.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을 전파한 이들은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요한 까페스트라노, 마르카의 야고보, 가브리엘 페레토,

특히 이 신심의 주보 성인인 순회 설교자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는

사도 여행 중에 항상 "예수"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다녔으며

설교 중에 예수의 이름이 나올 때 IHS 라고 쓰인 휘장을 치켜들곤 하였다고 한다.

1969 년 개정된 로마 전례력에서는 이 축일이 삭제되었으나

그후 인준받은 프란치스칸 공통 전례력에는 기념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오, 영광스런 이름이여!
자비와 사랑의 이름이여!
넘쳐나는 활력의 이름이여!
당신을 통하여 죄가 사하여지고 원수를 이기나이다.  
당신으로 절망에서 풀려나며 무거운 짐에 눌린 이가 힘을 얻고 생기를 찾나이다.
당신은 신자들의 영광, 설교자들의 스승, 활동가의 힘,

실패의 위험에 있는 이가 붙잡는 기둥이십니다.  
이 이름으로 죄가 사해지고 원수를 이기나이다.  
이 이름으로 절망을 이기고,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는 이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생기를 되찾게 하나이다.
당신을 관상 중에 체험하는 모든이의 지복이시며,

당신이 영광되게 한 모든 이가 당신을 자랑하나이다.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 또한 그들과 함께 당신의 엄위하온 이름으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소서. "

-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디노 사제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1772번.
*성 요한 까페스트라노 사제 축일:10월23일.게시판714번,1434번.
*마르카의 성 야고보 수도자 축일:11월28일.게시판774번.1496번.
*복자 가브리엘 페레또 수도자 축일:11월12일.

 

 

예수

라틴어Jesus. 그리스어Inaou. 영어 Jesus

 

하느님의 아들로서 강생(降生)하시어 인류를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

`야훼는 구원이 시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이름 `요수아’(Yosua)에서 유래되었다.

즉 이 `요수아’가 모음 이화(異化)현상을 일으켜 예수아 (Yesua)로 변형되어 쓰였는데,

이것이 그리스어 예수스(Inaous) 및 라틴어 예수스(Jesus)로 번역되어

 예수란 이름으로 발음되기에 이르렀다.

 

`요수아’는 눈(Nun)의 아들이자

모세의 후계자로 활약한 이스라엘의 한 영웅의 이름이기도 하다.

구약과 신약성서에는 그 영웅의 명성과 그 이름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 때문에

많은 이가 요수아 또는 예수라는 이름을 즐겨 가졌다.

한편 마태오 복음에는 동정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고 일러주는 천사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그 이름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1:21).

이 이름으로 그리스도교인은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며 사도들은 기적을 행하였다.

(사도 3:6).

 


요한16,23-24

23 그 날이 오면 너희가 나에게 물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면 아버지께서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해 본 적이 없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기쁨에 넘칠 것이다."

 


XX° siècle
Le 'Sauveur non peint de main d'homme' d'après l'icône ci-dessus
Michel Buyse - Iconographe

 

그리스도
라틴어  Christus  영어  Christ  그리스어  Christos 
 

나자렛(Nazareth)의 예수에 대한 칭호. '기름을 발라 축성된 임금, 대제관'이란 뜻을 지닌다.

이 말은 그리스어 '크리스토스'에서 유래하였다.

70인 역에서 '메시아'의 어원인 히브리어 마시아(masiah)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Christos, 기름바른)로 번역되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크리스투스이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야훼의 기름 바른 자'라 불려졌다.

그리스도 강생 직전 세기에 유태인들이 다윗의 왕좌를 재건하실 분으로 기대했던 구세주는

'기름 바른 자' 메시아 혹은 크리스토스(Christos)라 불려졌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약속된 구세주라고 여겼을 때 그 분을 일컬어 그리스도라 하였다

(마르 8:29, 사도 5:42).

그러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자

크리스토스를 구세주의 이름들 중의 하나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약성서에는 정관사 없이 그리스도(로마 5:6, 6:4), 그리스도 예수(사도 24:24),

혹은 예수 그리스도(마르 1:1)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메시아

 

라틴어 Messias. 독일어 Messias. 히브리어 m ah. 영어 Messiah

히브리어의 ’m h’(mashiah)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그리스어에선 ’ 즉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말로서 번역되었다(요한 1:41, 4:25).

 

구약시대에 예언자, 사제, 왕들은 즉위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예언자, 대사제, 왕 중 왕으로서 신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고,

인류 구제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救世主)이므로, ’메시아’라는 말은 구세주를 뜻한다.

유태교, 그리스도교의 종말사상(終末思想)과 결부되어 ’종말론적 구제자’를 나타내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 왕조시대에 다윗왕 이후에는 신망 있는 왕을 갖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다윗왕의 이미지와 결합된 이상적인 왕의 재래(再來)를 대망하는

이른바 ’메시아 대망’의 경향이 풍미하게 되었다.

이때의 메시아 대망은 현실을 부정(否定) 매개로 하는 종말론과 결부되어

 종말적 메시아 대망으로 바뀌었다.

 

정치적인 독립을 잃은

 유다이즘 시대로 들어오자, 묵시문학적(默示文學的)으로 천상의 메시아가

생각의 대상이 되거나,  다른 한편에서 2세기 때

 로마에 대한 저항의 기수 바르 코크바(Bar Kochba)를

메시아라고 호칭하는 경우와 같이 민족주의와도 결부되었다.

하지만 후기 유다이즘에 있어서는 메시아사상이 오늘까지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아’라는 명치 사용을 보면, 구약성서에 39회 나타나지만,

그중 29회는 이스라엘 또는 유대 왕을 지칭한 경우이고,

1회는 페르시아왕 키로스(Kyros, 기원전 600경-529)[고레스]를 가리켰다(이사 45:1).

 

신약성서에 나타난 메시아라는 용어는 요한복음서에서만 2회 뿐이다(1:21, 4:25).

그리고는 거의 그리스어 번역인 ’그리스도’로 나와 있다.

 

기타 메시아와 유사한 명칭으로서 ’사람의 아들’(人子), ’다윗의 후손’, ’유태인의 왕’,

’하느님의 아들’로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아관념은 종교사적인 관점에서 보아

본질적으로는 유다이즘의 메시아 관념을 발전시킨 것이나,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상(像)(이사 53)과 예수와의 결합에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임은

그가 왕적인 권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 종으로서 고난의 길을 걷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며, 이 세상은 자기 나라가 아니라고 전제한 것이다.

이 고난을 받은 자로서의 메시아사상은 그리스도교의 독자적인 메시아사상을 형성하였다.

유다이즘의 ’메시아’ 행위는 정신적인 구제행위 즉 신에 대한 속죄와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인 구제를 가져오는,

이른바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만민을 정복하고 그들을 무릎꿇게 하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하늘의 왕국’은 신이 직접 지배하는 나라이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이고,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메시아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를 개정하여,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으로서, 또한 하느님의 지혜로서,

하늘로부터 온 사람인데,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여

’신의 아들’이라는 데서 신성(神性)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신앙의 대상임을 밝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유태교의 메시아관(觀)은 종말관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에 있어 결정적으로 서로 다르다.

메시아를 단순한 구제자라고 해석한다면,

메시아 사상이나 메시아 대망은 다른 종교에서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가령 조로아스터교(Zoroaster敎) 이단설에 의하면

 조로아스터 사후 3천년이면 구제자가 출현하리라고

믿고 있으며, 세계 여러 곳 각 시대에서 볼 수 있는 ’천년왕국설’(千年王國說, millennium) 운동에서도

구제자가 대망되고 있고,

기적이나 예언을 행하는 천부적인 재능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구제자로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

 

이 때문에 ’메시아’는 광의의 뜻으로, 개인 내지는 특정 집단을 그 고통스런 지경으로부터 해방하여,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구제자,더구나 신적인 권위와 성격을 띤 구제자로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로마서 1장에서 갈파하였듯이 예수는 부활에 의하여

하느님의 메시아가 되었으며 모든 원수, 모든 죽음을 정복 때까지,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통치는 지속된다.

예수는 때로는 ’메시아’ 칭호를 뜻밖에도 사양하였으며,

또 정치적인 ’메시아주의’(Messianism)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아는 구세주 즉 고난의 메시아 사상으로 일관하여

그리스도교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전개되어 나온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디노 사제(1380-1444)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1772번.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으로 특별히 알려진 베르나르디노는

IHS-예수님의 희랍어 이름 첫머리 세글자-를 빛나는 태양 광선에 고딕체로 쓴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당파의 표적처럼 당시의 미신적인 상징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신심은 퍼져 나갔고 그 상징도

 교회와 가정,공공 건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자 요한 베르첼리 (1205-1283)

축일:12월1일.게시판1500번.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뛰어난 신심을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고,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그를 지원하여 이 신심의 보급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는 모든 도미니칸 성당에는 예수 성명 제대를 꾸미도록 하였다.

 

 

IHS(JHS)의 정확한 뜻은?

 

오늘 우리는 글을 쓰는 데 종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찰흙판, 암벽,

 나무판, 파피루스지, 양피지 등에 글씨를 써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들은 (성서, 전례, 교부학, 교회사 등의 내용을 가진 문서들)

주로 파피루스지나 양피지에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비싼 가격이어서,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을 서서히 약자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출판은 한 필경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쓰는 것이었고,

또 다시 한권의 책이 있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베껴써야 해습니다.

아까의 경제적 이유 이외에 적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옮겨쓰기 위해서도

 약자들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4세기부터 발견되는 약자들은 DS, IHS (JHS), XPS (XPC), SPS 등입니다.

그 뜻은 DS = DEUS (하느님),

 IHS (JHS) = IESUS (혹은 JESUS; 예수), XPS (XPC) = CHRISTUS (그리스도),

SPS = SPIRITUS (영; 성령)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DS, SPS 와 달리 IHS, XPS 는 자신의 라틴어 단어와 잘 합치하지 않는 듯 보이는데,

사실 IHS 는 희랍어 IHSOUS (예수, 소문자로 적을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에서 유래하고,

XPS 는 희랍어 xpistos (그리스도) 에서 유래합니다.

이것은 이 두 약어 (IHS, XPS) 가

 교회가 공식어로 라틴어를 채택하기 이전, 희랍어를 사용하던 시대부터

이미 약어로 사용되던 것이 유산으로 남겨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현대에도 (영어 등) 사용하는 & 도 et (그리고)를 단순화시켜 적은 것입니다.

 

한편, IHS에 대하여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의 약자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라틴어 약어가 더 이상 널리 사용되지 않게된 시대

(인쇄술의 발달로 손으로 책을 베끼던 작업이 끝난 시대)에 잘 모르고 덧붙였던 해석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라 추정됩니다.  

 

참고도서: G. Battelli, Lezioni di Paleografia,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p. 101.

-<장신호 신부님, 전례학 동호회 홈페이지에서>-

 


 

1월  3일

성녀 제노베파 혹은 제느비에브


St. Genovefa or Genevieve

St. Genovefa of Paris

Santa Genoveffa (Genevieve) Vergine

Genoveffa = dalle bianche guance, dal celtico

422 at Nanterre near Paris, France

-500 at Paris, France

Canonized:Pre-Congregation

파리의 수호성녀

 


파리 교외 낭떼르 태생인 그녀는

 불과 7세의 어린 나이에 오세르의 성 제르마노를 만난 뒤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양친이 돌아가시자 그녀는 파리로 왔고, 15세의 나이로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환시와 예언 때문에 파리 주민들로부터 미움과 천대를 받았지만,

성 제르마노는 그녀를 극구 지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르마노의 부제는 사람들을 충동하여 그녀의 예언은 거짓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프랑크인들이 파리를 봉쇄했을 때 그녀가 나서서 굶어 죽어가는 시민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고,

점령자를 설득하여 포로 석방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451년, 그녀는 또 아띨라 2세와 훈족이 파리를 점령하리라고 예언하였고,

그녀가 시민들과 더불어 기도한 뒤에는 파리가 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성 디오니시오께 바치는 성당 건립을 도왔고, 클로비스 국왕을 설득하여

성 베드로.바오로 성당을 세우게 하였다.

1129년에는 파리를 휩쓸었던 재앙과 염병을 퇴치하므로써 이 도시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는 422년 프랑스 어느 농가에서 태어났다.

430년 성 젤마노 주교가 순례도중

어린 제노베파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주교님은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원하는가 물었다.

어린소녀는 그것이 오랜 꿈이라고 말했다. 주교님은 강복을 하신뒤

예수 이름이 새겨진 패를 주시면서 내 약속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제노베파는 끝임없는 기도와 고행으로 봉헌될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못마땅했다.

어느날 성당에 가는 소녀를 어머니는 몹시 매질을 해줬다.

 

그러자 즉시 그 어머니는 소경이 되었다.

제노베파는 451년 ‘훈’ 족의 두목 아띨라가 대군을 인솔하여 프랑스를 침입해왔다.

가는 곳마다 약탈했고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파리에 이 소문이 퍼지자 시민들은 모두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자 성녀는 하느님의 힘을 입어 이렇게 말했다.

‘파리는 결코 침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리어 여러분들이 피해가는 곳이 더 위험할 것 입니다. ‘ 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의 적중되었다.

그 후 기적으로 전쟁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성녀는 빵을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 국민은 지금도 ‘조국의 어머니’ 라고 부른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성녀 제노베파는

 프랑스 파리의 수호 성녀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파리뿐 아니라 온 천하에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성녀의 생애(生涯)를 회고해 볼 때 느끼는 것으느 하느님께서는 가끔 연약한 자를 선택하셔서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신다는 것이다.

 

성녀 제노베파는 422년 프랑스의 낭테르라는 농촌에서 태어났다.

430년 성 젤마노 주교께서 순례(巡禮)도중 그 마을에 들르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 주교의 강복을 받기위해 모여들었는데, 어린 제노베파도 그 중에 끼여있었다.

 

주교께서는 필연 그때 하느님의 묵시를 받으셨음인지 제노베파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대는 몸과 마음을 예수께 봉헌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니까 이 소녀는 대뜸 즐거운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그것은 훨씬 전부터 제가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와 같이 성당에 가자."

 

주교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면서 소녀를 그 동네의 성당에 안내하시고

그 머리위에 두 손을 얹어 강복하신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진 패를 주시면서

 "언제든지 이것을 목에 걸고 네 약속을 잊지 말라"고

간곡하면서도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재차 여행에 오르셨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제노베파는 여전히 부모의 슬하에 머물러 있었다.

 


이 소녀의 신심은

날이 갈수록 더우 깊어갔다. 특히 많이 기도하고 고행을 했다.

그녀의 나이는 비록 어릴지라도 하느님 대전에는 이미 위대한 자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보호하히고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어 기적까지도 행해 주셨다.

 

어떤 날 성녀께서 어머니에게 "성당에 조배하러 가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청했더니,

그때 어떠한 일로 매우 마음이 상하여 있었던 어머니는

허락은 커녕 의외로 성녀에게 무수히 매질햇다. 그러자 어머니는 즉시로 소경이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께 그의 죄를 보속시키신 것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녀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라고 하며, "네가 그 위에 십자가를 그어라"고 했다.

제노베파가 그대로 하니까 어머니는 딸의 기도를 의지해 그 물을 찍어서 눈에 바르니,

즉시 사방이 훤하게 이며 전과 다름없는 완전한 눈이 되었다.

그 후로 어머니는 물론이지만, 아버지도 딸이 하느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노베파 자시은 여전히 순진한 마음으로 가정에서는 어머니를 돕고, 밭에서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며 열심히 일했으므로 그녀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녀를 탄복하고 존경했다.

 


그녀는 주교로부터 한폭의 머리수건을 받았다. 그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하여 시련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머리수건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양친이 연거푸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 성녀의 대모는 그를 파리에 데리고 갔다.

제노베파는 그곳에서도 엄격성은 주교께서 차마 볼수가 없어 말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령 그녀의 음식물은 언제든지 고작 보리 빵과 과일뿐이고

거기에 물을 좀 마시는 것뿐이었으며 포도주 같은 것은 마시는 일이 없었다.

또한 엄격한 단식재를 지키며 거의 끊임없이 기도했다.

 

또 파리에서도 시련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중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 중병이 겨우 나으려 할 때,

이번에는 여러 악한 자들이 터무니 없는 허물을 다 들추어 말했으므로

또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음으로

양으로 항상 보호해 준이는 성 젤마노 주교였다.

 

그러는 동안에 제노베파에 대해 큰 시련도 되고 명예도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451년 훈족의 두목 아틸라가 대군(大軍)을 인솔해 프랑스를 침입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하고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훈족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리에 퍼지자,

시민들은 어쩔 줄을 몰라 갈팡질팡하며 한시라도 빨리 가족을 데리고 도망하려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굳세게 반대한 것은 저 연약한 동정녀인 제노베파뿐이었다.

 

"여려분, 시중(市中)에 머무르십시오. 적은 파리에는 결코 들어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이 도망가는 곳이야말로 위험합니다."

그러한 그녀의 의견에 순종한 이는 부인들뿐이었다.

남자들은 ’거짓 예언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우리를 야만인에게 넘기려고 하는구나. 죽여 버리자!"하고

살기에 가득찬 얼굴로 그녀를 붙잡아 막상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다행히도 그곳에 세드리오라는

사제가 달려와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당신들은 전에는 이 동정녀를 존경하고 그녀의 기도의 힘을

믿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찌해서 마음이 변했습니까?"하며

지성껏 말렸으므로 흥분햇던 남자들도 점차 진정되어 마침내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제노베파의 예언은 훌륭히 적중되었다.

 

아틸라는 파리 방면에는 오지 않고 다른 방면으로 향해, 오래지 않아 전쟁에 패해 후퇴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제노베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왕까지도 그녀에게 의견을 물어보며 따르게 되었다.

그녀에게 기도를 청하러 오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그녀는 기도의 효험은

 가끔 유명한 기적까지도 일어 나게 했다.

 

제노베파는 또 한 번 파리 시민을 커다란 환란에서 구제한 공로가 있다.

그것은 파리가 클로비스 왕의 군대에 포위되어,

양식이 떨어져 사람들이 굶어 죽은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노베파가 기이하게 양식을 구해왔고,

또한 그녀의 성스러운 생활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국민이 그녀를 지금도 조국의 어머니(母)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녀는 90세의 고령(高齡)에 이르러 512년에 하늘로 오르고 사후 즉시로 성녀품에 오르셨다.

파리의 보호자라고 존경받는 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녀 제노베파(Genovefa)는 419년

 혹은 422년 파리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낭테르(Nanterre)에서 태어났다.

성녀의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고 하지만, 부유하고 존경받는 도시 사람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전기에 따르면 429년에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 7월 31일)를 만났다.

 이때 성 게르마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성 루푸스(Lupus, 7월 29일)와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어 가는 도중이었다.

성 게르마누스는 설교 도중 어린 여자 아이가 경건하고 진지한 자세로 듣는 모습을 보고,

설교가 끝난 뒤 여자 아이를 불러 여러 가지를 물은 뒤 성덕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낭테르 근처에는 수녀원이 없었기에 성녀 제노베파는 집에 머물면서 기도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성녀 제노베파가 언제 수도자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 게르마누스가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수도복을 입혀 주었다고도 하고,

16세 무렵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파리의 주교

빌리쿠스(Vilicus)에게서 수도복을 받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부모가 돌아가자 곧 파리로 가서 대모와 함께 머물며 자선과 금욕의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성녀 제노베파가 신성을 모독하는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또한 성녀 제노베파가 환시를 자주 체험하자,

그녀의 환시와 예언을 기만과 사기로 취급했다.


그러나 성 게르마누스의 중재와

지원으로 반대자들의 음모는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파리의 주교는 그녀에게 파리에 살며 수도생활을 원하는 처녀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겼다.

451년 훈족의 왕인 아틸라(Atila)가 쳐들어와 파리를 위협하자,

주민들은 모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성녀 제노베파는 하느님을 믿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면서

 회개와 보속을 하면 파리는 안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었고, 아틸라의 군대는 오를레앙(Orleans)에서 패배하였다.

몇 해 뒤 프랑크족의 왕인 메로비히(Merowig)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성녀 제노베파의 자선과 희생은 더욱 빛났다.

그녀는 굶어 죽어가는 시민들에게 음식을 날라 주고,

점령자를 설득하여 포로 석방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영향을 받은 메로비히와 후계자인 아들 힐데리히 1세는

 파리 시민들을 특별히 관대하게 대했다.

특히 힐데리히 1세는 파리의 초대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0월 9일)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짓게 하였다.

또 메로비히의 손자인 클로비스 1세를 설득하여

 파리에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를 기념하는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성당이 완공되자

그녀의 유해는 성당에 안치되었고, 이 성당은 이후 그녀의 프랑스어 이름대로

 주느비에브(Genevieve) 성당이라고 불렸다.

성녀에 대한 신심은 많은 기적을 낳았다. 834년 홍수가 일어나 파리가

 완전히 침수되는 위기에 놓였을 때 성녀에게 전구하여 이 위험에서 벗어났다.

1129년에 열병으로 만 사천 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

성녀를 기리는 행렬 도중 병마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녀는 파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