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는 고향의 학교를 졸업한 후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올라가
유명한 학자 리바니오에게 수사학 등을 배우고
다시 그당시 학문의 서울이라 불리우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유학했다.
후에 나지안조의 주교 성 그레고리오를 알게되어 친분을 맺고 서로 격려하며
학문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다투어 가며 그의 산하에 모여들게 되어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부근 일대에 퍼졌다. 그런데 누님인 마크리나는
바실리오가 현세의 명예 같은 것에 빠져 인생의 참된 목적을 망각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자신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기전에 그에게도 수도자가 될 것을 열심히 권유했기 때문에
바실리오는 그 지성에 감동되어 아직 받지 않았던 세례도 받고 또, 수도연구를 위해
이집트의 데바이스 광야로 운수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지도를 따르면서 같이 성스러운 생활을 했다.
이런 귀중한 체험에 의해 수도의 신성함을 깨달은 바실리오는 돌아가서
고국에도 은수자의 생활을 소개, 장려해 보려고 하던 차에 의외로 그의 부재중에,
어머니와 누님이 여자 수도원을 세우고 부인들을 모아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실리오도 그 수도원과 개울 하나 사이에 둔 곳에 남자 수도원을 세워
이곳 저곳에 살고 있던 은수자들을 모으고 재산은 빈민에게 희사하고
예전에 데바이스의 수사들에게 배운 수도 생활을 하기로 하고 형제들을 위해
영적 지도서를 쓰기도 하고 회칙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 모임은 지금도 그리스 교회에 유명한 바실리오 수도원의 시초이며,
그들의 목적하는 바는 자신의 수덕 외에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도모하는데 있었고,
그 수단으로서 수도원 부속학교를 설치해 아동 교육을 담당하고
병원 등을 열어 사회사업에 공헌했던 것이다.
당시의 체사레아 대주교 디아네오는 아리우스파로 기울어 졌다고 소문이 난 자로
평생 바실리오하고는 교제도 안했었는데, 임종시에는 그를 초대해
니체아 신경에 의한 가톨릭 신앙을 선언하고,
바실리오의 깊은 위로 중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후계자 에우세비오는
그를 사제로 서품하고 체사레아에 머물게 하도록 했으나,
바실리오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은 억제할 수 없어 사퇴하고 본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렌스 황제가 아리우스파의 이단에 기울어져 가톨릭의 세력을 말살시키려고
체사레아에 자기 파의 주교를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바실리오는 그냥 있을 수 없어
다시 그곳으로 가서
붓과 혀로 그리스도료를 옹호 했으므로 도시(都市)의 신자들도 이단에 빠지지 않고 무사했다.
바실리오가 시민을 위해 진력한 것은 그것 뿐이 아니다.
이듬해 대흉년이 들었을 때에 가난한 자의 구제에도 눈물겨운 활동을 했다.
그리하여 그가 체사레아 시의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존경을 받고 370년
그 곳의 대주교의 서거 후 일반 교우에게서 그 후임이 되어 주기를 열망 받은 것도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가 맡은 대교구는 50개의 교구를 포함한
극히 광범위한 교구로서 이를 다스리는 대주교의 임무도
따라서 매우 중했지만 고결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바실리오가
그 직에 오른 것을 보고서 바렌스 황제는 어떻게든지
인망이 높은 그를 아리우스파에 끌어 들이려고
총독 모데스토로 하여금 그에게 권고케 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에 걸려 진리를 떠날 바실리오가 아니었다.
한마디에 거절당한 총독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재산의 몰수나, 매질이나, 귀양이나, 사형이나
그중의 하나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위협했지만,
대주교는 조금도 안색을 변하지 않고 "그러한 것이라면 추호도 무서울 것 없습니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몰수당할만한 재산도 없고, 고행에 익숙되었기 때문에
매질도 그다지 어려울 것없고 참된 고향은
천국 외에 없으므로 어디로 귀양 보내도 별 문제점이 없고
사형에 처한다면 즉각 천국에 갈 수있으므로 도리어 그것을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이에 총독 역시 어쩔 줄을 몰라 "바실리오의 신앙의 견고함에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으므로 황제도 그 용기와 인내에 감탄하고 친히 그를 만나 벌을 주기는 커녕
그의 자선 사업의 보조로 체사레아 부근의 별장지까지 하사했다.
그래서 바실리오는 곧 그땅에 벼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세워 한층 더 자선 사업에 노력했다.
이곳은 그 후 큰 읍내처럼 되어 사람들에게 바실리아스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아리우스파 교도들은 이를 못마땅히 생각한 나머지 자꾸 황제에게 그에 대해 무고했으므로
드디어 황제도 이에 기울어져 그를 유배에 처하려고 그 영장에 서명하려 하자 세번이나 펜이 부러지고
게다가 그 밤부터 황태자가 갑자기 몹시 앓아 위독하게 되었다.
황후는 마음이 불안해져 "이것은 죄도 없는 바실리오를 귀양보낸 천벌이 아니고 무었입니까?"
라고 부르짖어, 그를 귀양가는 도중에서 다시 불러들여
태자를 위해 기도를 청했던 바 그처럼 위독하던 병도 깨끗하게 씻은듯이 완치되었으므로
황제도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귀양에서 면하게 해 주었다.
바실리오는 호교에, 사목(司牧)에, 저작에 눈부신 활약을 했는데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낙으로 삼고
말년에는 당신 거처를 바실리아스라 칭하는 자선소 내에 두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처럼 많은 사목을 하던 중에 병을 얻어 1379년 1월 1일, 60세를 일기로 고요히 잠들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St. GREGORY Nazianzen
San Gregorio Nazianze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t. Gregory of Nazianzus, Bishop and Theologian
Nazianzo, attuale Nemisi in Turchia, 330 – 25 gennaio 389/390
Born: 330 at Arianzus, Cappadocia, Asia Minor
Died: 25 January 390
나치안츠의 성그레고리오(G. Nazianzenus, 329?~389/90).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 ‘크리스천 데모스테네스’로 불린 웅변적 설교
가. 동방교회 4대학자의 한사람(다른 세 사람은 아나스타시오,
크리소스토모, 치릴로). ‘신학자’로 호칭된 정통파 교부. 부친도 같은 이름으로
카파도치아 나치안츠의 주교였다.
그는 카파도치아의 카이자리아, 팔레스티나의 카이자리아 알렉산드리아
, 아테네 등지에서 면학(356/357년), 아테네 시절의 학우로 대(大)바실리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355년)가 있었다. 귀향 후에 수도사가 되고 싶었으나
부친의 교회에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362년). 이것이 싫어서 도망했다가 돌아와
≪도피의 변명서≫를 썼다.
바실리오에 의해 사시마(Sasima)의 주교로 추대되었으나(372/73년), 사양하였고
부친이 죽은(374년) 뒤 나치안츠의 주교직을 계승했으나 이것도 곧 그만두고
은수(隱修)생활에 들어갔다.
아리우스파(派)인 발렌스 황제(재위 : 364~378)의 사후, 아리우스파의 아성인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압박당하고 있던 니체아 소수파의 강력한 요망에 따라
수도로 갔다(379년).
그의 웅변은 데오도시우스 1세의 공동신앙 신봉령(380년)과 아울러
마침내 정통파 신앙을 승리로 이끌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정식으로 주교에 취임했으나 반대에 부딪쳐 사임하고, 네크타리오스(Nektarios)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레고리오는 귀향 후 은수생활을 하면서(384년)
니체아 신앙의 완성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는 일세를 풍미한 웅변가이긴 했으나 바실리오와는 달리,
교회정치가는 아니었다. 은수사적인 경건함과 시적인 휴머니즘에 넘치는
신학자로서 성서와 전승(傳承)에 철저히 입각하였다. 신관(神觀)에 있어서는
삼위일체론의 완성에 공헌하였다.
‘아버지는 태어나지 않은 것’, ‘자식은 태어난 것’, ‘성령은 발생된 것’이라는
3자의 규정은 오늘날에도 답습되고 있다.
특히 성령의 규정과 그 신성 증시(神性證示)에 공헌하였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는 아폴리나리오스(Apollinarios)가
그리스도의 안에서의 인간 이성 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 데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人性, 영혼체)을 주장하였으며, ‘하나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성(神性)과 인성의 결합’을 강조하여 칼체돈 그리스도론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저작에는 45편의 강연, 설교집(아리우스파 · 마케도니오스파 ·
에우노미오스파를 반박한 것, 니체아 신앙을 옹호한 것), 244통의 서한,
약 400편의 시집이 남아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나지안젠의 주교로
45년 간 봉직했던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맏이.축일:1월1일)과
성녀 논나(축일:8월5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파도치아의 나지안젠이 고향이고, 카파도치아의 체사레아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바실리오를 만났고,
그 후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에서는 10여 년을 성 바실리오와 미래의 황제 율리안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도우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미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안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블로 초정하여 아리안계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케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나스따시아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안계인 막시모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경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에 인정하고
아리안계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블의 총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블 공의회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체아 공의회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박사"로 불린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Porte Saint, Saint Jean Chrysostomo, Saint Basile le Grand(Icons De Tver에서)
옛날 소아시아의 동북부에 있는
카파도치아에서는 대단히 많은 순교자와 성인을 배출했다.
그 중에도 4세기에 나온 세 명의 교회 학자, 즉 성 대 바실리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축일:3월9일) 및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카파도치아의 세 광채라고 불리며 세상에서 유명하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329년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논나이며
그녀 역시 성인품에 오른 경건한 부인이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신자가 아니었으나 다년간 시장의 중직에 있었던 근엄한 덕망가로서 후에
아내의 인도로 입교해 노후에는 세상의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나지안조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는 이러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미 수덕의 생활을 배웠다.
그에게는 누님 한 분과 남동생 하나가 있엇는데, 동생 가이사리오는 후에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고
누님 고르고니아는 역시 성인품에 오른 분이다.
그레고리오는 소년 시절부터 카파도치아의 가이자리아,
팔레스티나의 가이자리아,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아테네 등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로 유명하던 각 도시에 유학하고
고향 찬구 바실리오와 절친한 사이를 이루어 함께 기거하고 서로 면려(勉勵)하여 도회지(都會地)의
많은 위험한 향락에는 조금도 물들지 않고 열렬한 마음으로 공부와 수덕 생활에 골몰했다.
몇년 후 그는 당시의 추억을 "우리는 다만 두 길밖에 알지 못했다.
그것은 학교에 가는 길과 교회에 가는 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진실하고 선량한 학생이었는지 알 수 있다.
30세에 학문을 마친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 이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도원을 꾸미고 그곳에서
공부와 수덕 생활에 골몰하려고 했으나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실리오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함께 은둔 생활을 했다.
한편 주교직에 있기는 하지만 깊은 신학 연구도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갑자기 아리우스파의 이단에 미혹되어'
나지안조의 신자들에게 악표양이 될만할 일까지 하게 되엇다.
이것으로 그들 사이에 큰소란이 일어나 그레고리오는 급히 달려가서 이들을 진정시켜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떠나 보래려고 하지 않고
신자들도 또한 머물러 있기를 간청해 그레고리오는 할 수 없이
성품 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으나 그 직책의 중대함과 사진의 부당함을 느낀 나머지
마음이 불안하여
남몰래 친구인 바실리오에게로 떠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 바실리오의 권고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성무에 임했다.
바실리오는 가이자리아의 대주교가 된 후 그레고리오를 주교로 삼아
사시마 신 교구를 위탁하려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레고리오는 나지안조시에 머무르며
아버지의 보좌역을 했고 3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주교대리로서 나지안조 교구를 다스렸다.
379년 아리우스파를 보호하고 있던 바렌스 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오른 사람은
열심한 가톨릭 신자 테오도시오였다
그래서 이전에 아리우스파의 압박에 시달리던 콘스탄티노플 교회 신자들은 지금이야말로
교회 부흥 시기라 생각하고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레고리오를 초빙했고,
그는 그곳에 가서 박학과 웅변으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무수히 개종시켰다.
테오도시오 황제는 아리우스파에게 빼앗겼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그에게 반환하도록 했으며,
그는 시에서 열린 주교회의의 결과로 그곳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기아(아야) 소피아 성당:성녀 소피아 축일:9월30일.게시판1395번
많은 사람들은 이를 듣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했지만 그중에는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기에
그레고리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은퇴할 결심을 하고 요나가 말한
’이 재난이 나 때문에 일어났으면 나를 버려라" 하는 말을 인용해
고별사로 하고 고향 나지안조로 돌아왔다.
부친의 후계자로 아우렐리오를 주교로 추천하고 자신은 본집에 돌아와서 다년간 갈망하던
수도 생활에 골몰하기를 약 10년, 드디어 그곳에서 389년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때는 그의 나이 61세였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생존 시에 수많은 서적을 저술했으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강론, 시, 서간 등을 한데 모은 것이다.
아리우스의 이단자들은 알아듣기 쉬운 시로써 교리의 보급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오도 호교의 작시(作詩)에 전력을 기울여 그로써 시문을 좋아하는 청년들을
이단과 타락에서 구한 일도 적지 않았다.
- (대구대교구홈에서)-
[이콘]세명의 기독교 교육자. 러시아. 19세기. 40.5 x 34cm
이 성화에서는 대부분 함께 그려지는 세 명의 기독교 교육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을 경배하는 것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하나의 통례로 되어 있다.
세 명의 총주교들은 모두 제복(祭服)을 차려입고 정면을 향해서 나란히 서있다.
그들의 오른손은 축복을 내리며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있다.
사람들은 세사레아(Casarea)의 주교였던 대 바실리외 (330-379) 학식과 맑은 정신을 숭배한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였던 나지안즈(Nazianz)에서 온 그레고리 (Gregorios)의
빛나는 웅변술과 그의 비상한 어법을 경탄하였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신학자이며 총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Johannes Chrysostomos)
(354-407)가 저술한 책의 아치(雅致)를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 명의 성자 위에 있는 두 개의 작은 화면에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그려진 무명수건(Mandylion)과
포차엡스카야 (Potchajevskaja)의 성모상을 그려 넣었다.
-(유럽聖畵(ICON)集에서)-
성 마카리오(맏이) 은수자(축일:1월15일)
1월 2일
성 마카리오(젊은) 은수자
St. MACARIUS the Younger
St. Macarius the Alexandria
Born :early 4th century at Alexandria, Egypt
Died :c.401
Patronage :confectioners, cooks, pastry chefs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인 그는 과자장수를 하다가,
하느님께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멀리하고,
6년 동안 사막에서 고행과 관상으로 지냈다.
그의 첫 은수처는 테베이다. 그리고 373년에는
에집트 남부로 가서, 스케트와 니트리아 사막에 움막을 지었다.
그 당시의 은수자들은 각각 자기의 움막에서 독수생활을 하였다.
그는 사제로 서품되었고, 극도로 엄격한 규율을 지켰으며,
기적도 수없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그는 마카리오(맏이)와 다른 수도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의 아리아파 총주교인 루치오에 의하여
나일강의 한 섬으로 추방된 적도 있으나, 결국은 귀향이 허가되어 돌아왔다.
그는 니트리아에 있는 수도원을 위하여 회헌을 집필하였는데,
이중의 여러 규칙이 성 예로니모가 인용하고 자신의 회칙에 삽입하여 그 맥이 지금도 이어온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예로니모 축일:9월30일.게시판1394번.
성 마카리오(맏이)은수자 (축일:1월15일)
옛날 아주 번화하던
이집트의 대 상업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사업이나 생활의 방도를 구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이곳에 330년경 과자 가게를 하며 살아가던 마리오라는 사람이 있었더.
그는 30세가 되었을 무렵(335년경?) 그리스도교를 알게 되어 열심히 연구하여 세례를 받고 나서,
하느님의 은총의 감미로움을 깨달아 장차 어떠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결심으로 영혼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광야에 들어가서 기도와 고행과 노동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손수 만든 초가는 거의 몸 하나 두지도 못할 만큼 작고 좁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엄한 고행 생활을 다른 이에게 알리는 것을 싫어하여
그는 넓고 밝은 초가를 만들어 방문자가 있으면 거기에서 만나보기도 했다.
마카리오는 매일 단식재를 지키고 7년동안 더운 음식물이라고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밤에느 바닥에 까는 것도 없이 맨바닥 그대로 누워 그것도 잠깐 눈을 붙일 뿐이엇다.
그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기도하던가 사람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반드시 수족을 움직여 자기 생활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가난하고 엄격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쾌활하고 친절하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극진히 대했다.
그는 자기의 고행을 숨기느라고 애썼지만 어느덧 그것은 세상에 퍼져 그의 덕을 사모하며
지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 기도를 간청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 중에는 천릿길도 무릅쓰고 그를 찾아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길 권했다.
그로 인해 죄악의 생활에서 회개한 이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때로는 그에게 기도를 청하면 병자도 낫고 악한 버릇도 고쳐지곤 햇다.
그의 생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그를 따라서 세속을 떠나 산속에 숨어 수도에 골몰하려는 청년들이 점차 증가했다.
그들은 마카리오 지도하에 수덕에 힘쓰며, 완덕에의 길로 나아가도록 정진했다.
마카리오는 그들을 더욱 잘 지도하고 또한 그들에게 매주일 미사 참여 의무를 이행케 하기 위해서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 장상의 의견에 따라 겸손되이 순명하는 마음으로 신품 성사를 받았다.
그는 참으로 겸손했다.
그것은 다른 은수자 모두를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수사가 아직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더욱 덕행을 닦기 위해
어느 날 수도원 원장을 찾아가서 그의 지도를 구했다.
그러나 마카리오에게는 어느 점으로 보든지 충고할 결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신은 저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이 덕이 높습니다"하고
그대로 돌려 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더욱 다른 사람들의 권면을 받으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위해한 겸손가였는가!
그 후에도 그는 더욱 분발하여 거룩한 자가 되려고 힘썼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의 유혹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모두 이겨 나갔다.
어떤 때 그는 광야를 떠나 세속에 돌아가서 병자들의 간호 사업 같은 것에 헌신하는 것이
더 좋은일이 아닐까 하고 오랫동안 번민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위해 계속 이 초가(草家)에 머물자’ 하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끝가지 그 결심을 변경시키지 않았다.
그의 제자 중에도 그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나
마카리오는 그에게도 세속에 돌아가지 않도록 했다.
마카리오에 있어서 다른 시련은 신앙을 위한 박해였다.
즉 그 시대에는 아리우스파(派)의 이단인 널리 퍼져있었으나,
그는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여 굳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게 할 뿐 아니라,
배교자까지도 많이 회개시켰으므로 아리우스파 교도들은
그를 독사와 같이 미워하며 그를 멀고 먼 벽지(僻地)로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그 박해를 감수하고
도리어 그런 환경을 이용하여 벽지에 주님의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개종자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그는 기회를 얻어 전에 살던 광야에 있는 초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전후 합하여 약 60년을 광야에서 지낸 후 39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는 거의 95세의 고령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1월 15일
성 마카리오(맏이) 은수자
St.Macarius the Elder
St.MACARIUS of Egypt
San Macario il Grande Abate di Scete
Born: c.300 at Upper Egypt
Died: 390
에집트 출신인 그는 젊어서 가축을 돌보고 지냈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여 세속을 등지고 조그마한 움막에 혼자 살면서
매트를 만들며 기도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어느 부인을 폭행했다는 누명이 씌어지자
길거리를 끌려나가 매를 맞는 등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인내한 뒤에 혐의가 풀렸다.
이리하여 그는 30세 때에
스케트 사막으로 들어가 은수생활을 시작했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생활은 극히 엄격하였으니, 한 주일에 한번의 식사만 했고,
일부러 갈증을 느끼기 위해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항상 간단한 몇마디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거의 항상 침묵 속에서 지냈다 :
"기도할 때에야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다만,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시고, 인도해 주소서 하는 말만 마음으로 되풀이하여라."
한 때 그의 제자인 젊은 마카리오와 함께 그는
나일강의 어느 섬으로 추방된 적이 있지만, 결국은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스케트 사막에세만 60년을 살다가 운명하였는데,
사막에 살은 최초의 은수자로 공경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