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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성 에드문도 캄피온 순교자 / 복자 요한 베르첼리 / 성 엘리지오(엘로이) 주교

Berardus 2021. 11. 30. 17:20



12월 1일

성 에드문도 캄피온 순교자


Sant’ Edmondo Campion Martire, gesuita

St. Edmund Campion

(The Pope’s Champion)

24 January 1540 at London, England-

hanged, drawn and quartered on 1 December 1581 at Tyburn, England;

parts of his body displayed at each of the four city gates as a warning to other Catholics;

relics at Rome, Prague, London, Oxford, Stonyhurst, and Roehampton

Beatified:9 December 1886 by Pope Leo XIII

Canonized:1970 by Pope Paul VI; one of 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런던의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톨릭으로 성장하여,

장학금을 받고 옥스포드 세인트 죤스 대학을 다닐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당시의 석학이던 얼 레체스터, 로버트 세실,

심지어는 엘리사벳 여왕까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엘리사벳을 영국 교회의 으뜸임을 인정하는 수장령에 명세하고,

1564년에 영국교회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증대되는 사실에 의혹을 품고,

1569년에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공부한 연후에 그는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가톨릭으로 되돌아 왔다.

 

교황 비오 5세가 엘리사벳을 단죄하므로써 영국 내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때,

그는 프랑스의 두에이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예수회원이 되어 보헤미아의 브르노로 갔다.

 

그는 프라그에서 대학강단에 섰으며, 1578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와 로버트 퍼슨 신부가 영국 선교사로 가는 첫번째 예수회원이 되었고, 1580년에 영국으로 떠났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그의 활동, 옥스포드의 대학 성당에서 행한

그의 연설 "데쳄 라씨오네스(Decem Rationes),

그리고 저 유명한 브라그(Brag)의 간행은 그로 하여금 역국사에 한 획을 긋게 한 것이다.

 

그는 옥스포드 근교 리포드에서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었고,

자신의 변호를 거부하였으며, 심한 고문을 받다가 타이번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진정한 사제였다. 1970년,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런던의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또는 에드문도)는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여, 불과 15세의 나이에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 세인트 존스 대학을 다녔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당시의 석학이던 레스터(Leicester)의 얼(Earl),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심지어는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까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영국 교회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수장령에 맹세하고,

1564년에 영국 교회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증대되는 사실에 의혹을 품고,

1569년에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공부한 후에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가톨릭으로 되돌아 왔다.

 

교황 비오 5세(Pius V)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단죄함으로써 영국 내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때,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예수회원이 되어

보헤미아(Bohemia)의 브르노(Brno)로 갔다.

그는 프라하(Praha)에서 대학 강단에 섰으며, 1578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와 로버트 퍼슨(Robert Persons) 신부가 영국 선교사로 가는 첫 번째 예수회원이 되어

1580년 영국으로 떠났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그의 활동, 옥스퍼드의 대학 성당에서 행한 그의 연설 ‘데쳄 라시오네스’

(Decem Rationes), 그리고 유명한 브라그(Brag)의 간행은 그로 하여금 영국사에 한 획을 긋게 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근교 리포드(Lyford)에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자신의 변호를 거부한 채

심한 고문을 받다가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진정한 사제였으며,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Edmund Campion (England, 1540)

Killed in London, 1581

The Society of Jesus

 

1558년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여왕이 되었을 때 그녀는 미사 언어를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꾸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엘리자베스를 파문했고

영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에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사제가 드리는 라틴어 미사에 참석하도록 했다.

 

엘리자베스는 특별히 그러한 미사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은 사형에 처할 반역자로 간주했다.

1580년부터 예수회원들은 영국으로부터 영국인들을 몰래 빼내

프랑스에 있는 두아이 신학교에서 교육시켰고 그들에게 서품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영국으로 보냈고 그들은 섬으로 들어가서 비밀로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

많은 예수회원들이 잡혔고 살해되었다.

-(예수회홈에서)-

 


 




12월 1일

복자 요한 베르첼리


Beato Giovanni Garbella da Vercelli Domenicano

Blessed John of Vercelli, OP (AC)

(also known as John Garbella)

1205 at Mosso Santa Maria, Italy as John Garbella -

September 1283 at Montpelier, France of natural causes;

buried at the Dominican convent at Montpelier;

his tomb was desecrated by Calvinists in 1562, and his body disappeared

Beatified:1903 by Pope Pius X (cultus confirm‍‍‍‍!!!ed)

 

 

그는 40세 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베르첼리에서 도미니꼬회의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부터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직책을 거쳐, 1264년에 선교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19년 동안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편지나 공문서에서 "가난한 작은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수도자들을 항상 동료로 부를만큼 겸손하였다.

 

리용 공의회에서는 그가 예로니모 디 아스꼴리를 만났는데,

그는 프란치스꼬회의 총장을 역임했던, 그 당시의 고위 성직자였다.

 

Blessed John of Vercelli, OP (AC)

Patronage:Holy Name Society

(Confraternity of the Most Holy Name of God and Jesus)

 

또한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뛰어난 신심을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고,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그를 지원하여 이 신심의 보급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느 모든 도미니칸 성당에는 예수 성명 제대를 꾸미도록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식을 반박하는 사람들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자기 회원들을 영국으로 파견한 적이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1월28일.게시판917번,1590번.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 (THE HOLY NAME OF JESUS)
(축일:1월 3일, 게시판1550번)

 

1530 년 클레멘스 7 세에 의하여 인준되어 작은 형제회에서 1 월에 이 축일을 지내왔으며
1721 년부터는 인노첸시오 13 세에 의해서 전체 교회에 확산되었다.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은 바로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신심으로
특별히 예수의 이름을 항상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그 이름을 선포하띠
특별히 유혹과 시련의 때에 그 이름의 힘에 확신을 가지고 호소함으로 힘과 위로를 얻는다.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을 전파한 이들은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요한 까페스트라노, 마르카의 야고보, 가브리엘 페레또이며,
특히 이 신심의 주보 성인인 순회 설교자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는
사도 여행 중에 항상 "예수"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다녔으며 설교 중에 예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ISH라고 쓰인 휘장을 치켜들곤 하였다고 한다.
1969 년 개정된 로마 전례력에서는 이 축일이 삭제되었으나
그후 인준받은 프란치스칸 공통 전례력에는 기념으로 남 아 있게 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디노 사제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1772번.
*성 요한 까페스트라노 사제 축일:10월23일.게시판714번,1434번.
*마르카의 성 야고보 수도자 축일:11월28일.게시판774번.1496번.
*복자 가브리엘 페레또 수도자 축일:11월12일.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t Eligius in His Workshop-CHRISTUS, Petrus

1449.Oil on wood, 98 x 85 cm.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12월 1일

성 엘리지오(엘로이) 주교


St. ELIGIUS(Eloi)

St. Eligius of Noyon  

Sant’ Eligio Vescovo

588 at Catelat, near Limoges, France

-1 December 660 at Noyon, France

Canonized:Pre-Congregation

 


엘로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로만-갈로가의 아들로서 골의 샵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에우체리오는 금속 세공인이었기 때문에,

그당시 유명한 금 세공인인 압보에게 아들을 보내어 공부를 하도록 안배하였다.

압보는 리모쥬의 조폐국 책임자였다. 그가 도제 수업을 마친 뒤에는

궁중 재무관 봅보 수하에서 일을 하다가 국왕 클로테르 1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엘리지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한편,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엘리지오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수많은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납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또 632년에 그는 솔리냑에 수도원을 세웠고, 클로테르의 아들 도고베르트 1세의 도움으로

파리에 수도원까지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이리하여 국왕은 그를 자신의 주요 고문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엘리지오는 브리톤으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활약한 결과,

브리톤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640년에 서품되어 노이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뚜르네의 주교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플란데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주에 안터워프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프랑스 왕조에서 근무한 많은 성인들중 엘리죠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590년 출생했고 열심한 부모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주변의 부패타락한 사회안에서도 그는 오직 겸손하고 경건하게 덕행의 길을 걸었다.

다고벨도 왕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엘리죠의 의견을 경청했다.

 

왕정의 고관신분으로 출세의 길이 크게 열려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극빈자와 불행한자를 위해 재산을 내놓았을 뿐아니라 자신도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궁중에서는 신분에 맞는 옷을 입었지만 집에서는 검소하게 평민의 옷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

 

그후 그는 노아연교구의 사제가 되었고 그리고 주교로 추대받았다.

사제서품후 641년 주교로 임명되었다.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고 수도원을 지었으며 극빈자를 위해 자신의 수입을 거의 전부 내놓았다.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빈민을 가엽게 돌봐줄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그는 금속 세공인의 아들로 골의 샵텔에서 태어났다.

리모주의 조폐국 책임자인 압보에게 도제 수업을 받은 그는 국왕 클로테르 1 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엘리지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신 납부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632 년, 솔리냑에 수도원을 세운 그는 클로테르의 아들 도고베르트 1 세의 도움으로

파리에까지 수도원을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국왕의 고문으로 브리톤으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브리톤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640 년에 서품되어 느와이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투르의 주교로도 활약한 그는

플란데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

안터워프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이다

 


프랑스 왕조에서 일을 한 많은 성인 중 성 엘리지오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590년경에 출생했다.

부모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로 그 아들을 교회의 가르침대로 교육시켰으므로

엘리지오는 매우 경건하게 자라났고,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즐겼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미술 방면이었으므로 양친을 그로 하여금

금은세공(金銀細工)을 배우게 했더니, 과연 놀랄만한 기술을 발휘해 이 방면의 대가가 되었다.

한편 그는 덕을 닦음에도 게으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며 더욱이 극빈자들에게는 동정심이 깊었다.

또한 열심히 성서를 연구하며, 이에 대한 설명도 열심히 들었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되자, 프랑스 국왕 클로테르 1세는

당시 겨우 30세인 엘리지오를 궁중에 초청하여 보석 귀금속으로 자기의 화려한 옥좌를 만들도록 했다.

필요한 금은 보석의 보고(寶庫)가 그에게 맡겨졌다.

"주신 금은 보석이 남았으므로 두 개의 옥좌를 만들었습니다"했다.

주문대로 한 개의 옥좌로 족한 것인데, 손품을 아끼지 않고 두 개를 만들어

남은 금은 보석을 제것으로 삼지 않는 그의 청렴함은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그러니 국왕은 화려한 그의 옥좌보다 엘리지오의 정직하고 결백한 마음씨를 더욱 가상히 여겼고,

그를 즉시 왕립 조폐 국장(王立造幣局長) 및 자기 고문으로 등용했다.

 

이렇듯 놀라운 입신출세를 한 엘리지오였지만 그는 항상 겸손한 그대로 였으며,

주위 사람들의 부패 타락한 틈에서 그는 오직 덕행의 길로만 나아갔다.

그는 그런 부패 타락한 이들에게 충고를 가하는 한편, 국왕에게까지도 충언을 가끔 올렸다.

이들도 모두 엘리지오의 충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정직한 행실과 열심한 기도, 준엄한 단식 등 실로 그에게는 한점의 결점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에는 힘있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테르 왕이 서거하자 후계자로 그의 아들 도고베르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엘리지오를 측근자로 두고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그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는 이미 위세 당당한 고관의 신분이었으므로 그 앞날의 출세도 양양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빈자와 불행한 이를 위해 사재를 내던졌고, 자신은 매우 빈곤한 생활을 감수했다.

궁중에서만은 신분에 알맞은 복장을 했으나,

자택에서는 보잘것 없는 의복과 또 의복감도 가장 검소한 것을 택했다.

 


한편 신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으므로

노이용 교구의 사제 및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추대했다.

우선 사제 서품을 받고 641년에는 주교로 축성되어 부임했다.

 

노이용 교구는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이며 주민의 대부분은 아직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다.

엘리지오 주교는 열심히 그들이 개종을 도모하고, 각 지방에 성당을 세우며 여러 개의 수도원까지 건축했다.

한편 여전히 극빈자를 생각하며 수입의 거의 전부를 그들 구제에 사용했다.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두어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여가 있는대로 손수 교회용의 귀중한 성물도 제작했다.

그때가지도 국왕과 그 후계자들은 가끔 그의 의견을 청하러 왔다.

 

나이 불과 69세인 엘리지오는 죽음이 임박해옴을 깨달았다.

때마침 주교좌 대성전을 건축 도중이었는데, 그는 ’빨리 공사를 완성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준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하여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그러나 엘리지오는 항상 명랑하게 걱정스러운 그들을 위로하며

 ’기뻐하십시오, 나는 이미 오랫동안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날을 고대했습니다"하고 말했는데,

과연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 침대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과 또한 빈민을 가련하게 여겨줄 것을 거듭 강조하며 부탁했다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