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o Giovanni Garbella da Vercelli Domenicano
Blessed John of Vercelli, OP (AC)
(also known as John Garbella)
1205 at Mosso Santa Maria, Italy as John Garbella -
September 1283 at Montpelier, France of natural causes;
buried at the Dominican convent at Montpelier;
his tomb was desecrated by Calvinists in 1562, and his body disappeared
Beatified:1903 by Pope Pius X (cultus confirm!!!ed)
그는 40세 때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베르첼리에서 도미니꼬회의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부터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직책을 거쳐, 1264년에 선교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19년 동안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편지나 공문서에서 "가난한 작은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수도자들을 항상 동료로 부를만큼 겸손하였다.
리용 공의회에서는 그가 예로니모 디 아스꼴리를 만났는데,
그는 프란치스꼬회의 총장을 역임했던, 그 당시의 고위 성직자였다.
Blessed John of Vercelli, OP (AC)
Patronage:Holy Name Society
(Confraternity of the Most Holy Name of God and Jesus)
또한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뛰어난 신심을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고,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그를 지원하여 이 신심의 보급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느 모든 도미니칸 성당에는 예수 성명 제대를 꾸미도록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식을 반박하는 사람들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자기 회원들을 영국으로 파견한 적이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1월28일.게시판917번,1590번.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 (THE HOLY NAME OF JESUS)
(축일:1월 3일, 게시판1550번)
1530 년 클레멘스 7 세에 의하여 인준되어 작은 형제회에서 1 월에 이 축일을 지내왔으며
1721 년부터는 인노첸시오 13 세에 의해서 전체 교회에 확산되었다.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은 바로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신심으로
특별히 예수의 이름을 항상 존경과 애정을 가지고 그 이름을 선포하띠
특별히 유혹과 시련의 때에 그 이름의 힘에 확신을 가지고 호소함으로 힘과 위로를 얻는다.
예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신심을 전파한 이들은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요한 까페스트라노, 마르카의 야고보, 가브리엘 페레또이며,
특히 이 신심의 주보 성인인 순회 설교자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는
사도 여행 중에 항상 "예수"라고 쓰인 깃발을 들고 다녔으며 설교 중에 예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ISH라고 쓰인 휘장을 치켜들곤 하였다고 한다.
1969 년 개정된 로마 전례력에서는 이 축일이 삭제되었으나
그후 인준받은 프란치스칸 공통 전례력에는 기념으로 남 아 있게 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시에나의 성베르나르디노 사제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1772번.
*성 요한 까페스트라노 사제 축일:10월23일.게시판714번,1434번.
*마르카의 성 야고보 수도자 축일:11월28일.게시판774번.1496번.
*복자 가브리엘 페레또 수도자 축일:11월12일.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t Eligius in His Workshop-CHRISTUS, Petrus
1449.Oil on wood, 98 x 85 cm.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12월 1일
성 엘리지오(엘로이) 주교
St. ELIGIUS(Eloi)
St. Eligius of Noyon
Sant’ Eligio Vescovo
588 at Catelat, near Limoges, France
-1 December 660 at Noyon, France
Canonized:Pre-Congregation
엘로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로만-갈로가의 아들로서 골의 샵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에우체리오는 금속 세공인이었기 때문에,
그당시 유명한 금 세공인인 압보에게 아들을 보내어 공부를 하도록 안배하였다.
압보는 리모쥬의 조폐국 책임자였다. 그가 도제 수업을 마친 뒤에는
궁중 재무관 봅보 수하에서 일을 하다가 국왕 클로테르 1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엘리지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한편,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엘리지오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수많은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납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또 632년에 그는 솔리냑에 수도원을 세웠고, 클로테르의 아들 도고베르트 1세의 도움으로
파리에 수도원까지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이리하여 국왕은 그를 자신의 주요 고문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엘리지오는 브리톤으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활약한 결과,
브리톤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그는 640년에 서품되어 노이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뚜르네의 주교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플란데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주에 안터워프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프랑스 왕조에서 근무한 많은 성인들중 엘리죠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590년 출생했고 열심한 부모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주변의 부패타락한 사회안에서도 그는 오직 겸손하고 경건하게 덕행의 길을 걸었다.
다고벨도 왕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엘리죠의 의견을 경청했다.
왕정의 고관신분으로 출세의 길이 크게 열려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극빈자와 불행한자를 위해 재산을 내놓았을 뿐아니라 자신도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궁중에서는 신분에 맞는 옷을 입었지만 집에서는 검소하게 평민의 옷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
그후 그는 노아연교구의 사제가 되었고 그리고 주교로 추대받았다.
사제서품후 641년 주교로 임명되었다.
많은 이들을 개종시켰고 수도원을 지었으며 극빈자를 위해 자신의 수입을 거의 전부 내놓았다.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빈민을 가엽게 돌봐줄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그는 금속 세공인의 아들로 골의 샵텔에서 태어났다.
리모주의 조폐국 책임자인 압보에게 도제 수업을 받은 그는 국왕 클로테르 1 세의 조폐국 책임자가 되었다.
엘리지오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국왕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신심과 끊임없는 설득에 의하여 국왕은 가난한 이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노예들의 보석금을 대신 납부하였고, 또 여러 교회를 세웠다.
632 년, 솔리냑에 수도원을 세운 그는 클로테르의 아들 도고베르트 1 세의 도움으로
파리에까지 수도원을 세우는 등 참으로 놀라운 일을 성취하였다.
국왕의 고문으로 브리톤으로 가는 외교사절이 되어 브리톤 국왕을 설득하여
프랑크 왕의 권위를 인정하게끔 하는 큰 공을 세웠다.
640 년에 서품되어 느와이용의 주교가 되었다가 투르의 주교로도 활약한 그는
플란데르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
안터워프 지역에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그는 금속 세공인, 금 세공인의 수호성인이다
프랑스 왕조에서 일을 한 많은 성인 중 성 엘리지오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590년경에 출생했다.
부모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로 그 아들을 교회의 가르침대로 교육시켰으므로
엘리지오는 매우 경건하게 자라났고,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즐겼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미술 방면이었으므로 양친을 그로 하여금
금은세공(金銀細工)을 배우게 했더니, 과연 놀랄만한 기술을 발휘해 이 방면의 대가가 되었다.
한편 그는 덕을 닦음에도 게으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친절하며 더욱이 극빈자들에게는 동정심이 깊었다.
또한 열심히 성서를 연구하며, 이에 대한 설명도 열심히 들었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되자, 프랑스 국왕 클로테르 1세는
당시 겨우 30세인 엘리지오를 궁중에 초청하여 보석 귀금속으로 자기의 화려한 옥좌를 만들도록 했다.
필요한 금은 보석의 보고(寶庫)가 그에게 맡겨졌다.
"주신 금은 보석이 남았으므로 두 개의 옥좌를 만들었습니다"했다.
주문대로 한 개의 옥좌로 족한 것인데, 손품을 아끼지 않고 두 개를 만들어
남은 금은 보석을 제것으로 삼지 않는 그의 청렴함은 참으로 감탄할 일이다.
그러니 국왕은 화려한 그의 옥좌보다 엘리지오의 정직하고 결백한 마음씨를 더욱 가상히 여겼고,
그를 즉시 왕립 조폐 국장(王立造幣局長) 및 자기 고문으로 등용했다.
이렇듯 놀라운 입신출세를 한 엘리지오였지만 그는 항상 겸손한 그대로 였으며,
주위 사람들의 부패 타락한 틈에서 그는 오직 덕행의 길로만 나아갔다.
그는 그런 부패 타락한 이들에게 충고를 가하는 한편, 국왕에게까지도 충언을 가끔 올렸다.
이들도 모두 엘리지오의 충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정직한 행실과 열심한 기도, 준엄한 단식 등 실로 그에게는 한점의 결점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말에는 힘있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테르 왕이 서거하자 후계자로 그의 아들 도고베르트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엘리지오를 측근자로 두고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그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는 이미 위세 당당한 고관의 신분이었으므로 그 앞날의 출세도 양양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빈자와 불행한 이를 위해 사재를 내던졌고, 자신은 매우 빈곤한 생활을 감수했다.
궁중에서만은 신분에 알맞은 복장을 했으나,
자택에서는 보잘것 없는 의복과 또 의복감도 가장 검소한 것을 택했다.
한편 신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으므로
노이용 교구의 사제 및 신자들은 그를 주교로 추대했다.
우선 사제 서품을 받고 641년에는 주교로 축성되어 부임했다.
노이용 교구는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이며 주민의 대부분은 아직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다.
엘리지오 주교는 열심히 그들이 개종을 도모하고, 각 지방에 성당을 세우며 여러 개의 수도원까지 건축했다.
한편 여전히 극빈자를 생각하며 수입의 거의 전부를 그들 구제에 사용했다.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두어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여가 있는대로 손수 교회용의 귀중한 성물도 제작했다.
그때가지도 국왕과 그 후계자들은 가끔 그의 의견을 청하러 왔다.
나이 불과 69세인 엘리지오는 죽음이 임박해옴을 깨달았다.
때마침 주교좌 대성전을 건축 도중이었는데, 그는 ’빨리 공사를 완성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준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하여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그러나 엘리지오는 항상 명랑하게 걱정스러운 그들을 위로하며
’기뻐하십시오, 나는 이미 오랫동안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날을 고대했습니다"하고 말했는데,
과연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 임종 때 침대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과 또한 빈민을 가련하게 여겨줄 것을 거듭 강조하며 부탁했다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