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이콘.100x70cm.12세기.모스크바 트레차코프미술관
이 이콘의 특징적인 묘사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자세이다.
오른쪽 팔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는 아기를 향해서 다정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고,
한편 아기 예수도 자신의 볼을 어머니의 볼에 맞대며
어머니의 목을 오른손으로 감고 무엇인가를 구하는둣, 속삭이는 듯이 보인다.
즉 이 이콘은 어머니와 아기가 내면적으로 깊이 하나로 얽힌 것이
어느 다른 성모화 보다도 월등하게 표현되어 있다.
성모의 눈은 아기 예수의 인간성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Logos)인 성자의 신성에로 향하여 있다.
성모의 겉옷(마포리온)의 두개의 별은, 머리의 별은 영지(英智,上智)를
한쪽 어깨의 별은 마음의 열정을 표현한다.
(이콘.신비의 미-편저.장긍선신부)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ST.JOSAPHAT
San Giosafat Kuncewycz Vescovo e martire
1580 at Volodymyr, Lithuania (modern Ukraine) as John Kunsevyc-
struck in the head with a halberd, shot and beaten with staves on 12 November
1623 at Vitebsk, Belarus;
body thrown into the Dvina River but later recovered; buried at Biala, Poland;
body found incorrupt after 5 years of death
Beatification;1643
Canonized;1876; first Eastern saint canonized by Rome
폴란드의 볼리니아 지방 블라드미르에서 태어난 요한 쿤세비크(1580-1623년)는
청년 시절에 어느 상인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터 그는 주인의 놀라운 제안을 뿌리치고,
1604년에 성 바실리오의 우크라이니아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고, 요사팟이란 이름을 받았다.
Monk in the Ukrainian Order of Saint Basil (Basilians)
그후 그는 1609년 비잔틴 예식에 따른 사제로 축성되었는데,
그의 탁월한 설교가 큰 명성을 얻게 했으며,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 사이의 일치를 도모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인물이 되었다.
1617년, 그는 러시아의 비텝스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그 얼마 후에 플롯스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기 시작하였으니,
로마와의 반목, 기혼 사제, 느슨한 규칙, 폐허화된 성당 등을 고치기 위하여
시노드를 소집하여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즈음에,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주교들이 요사팟은 실제로 라틴 사제이며,
로마 카톨릭은 러시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립 주교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극도의 혼란상에 빠졌는데,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비텝스크로 사목방문을 하던 중에 몹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어 다비나강에 수장되었다.
성 요사팟은 첫번째 동방교회 성인으로서 1867(1876)년에 시성되어
서방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계신다.
1967년, 신문에 실린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의 희랍 정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가
포옹하는 사진은 9세기 동안이나 갈라져 있던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중요한 단계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1595년, 오늘의 성인이 소년이었을 때 리투아니아에 있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명한 곳)의 희랍 정교회 주교와
수백만의 루테니아 인들을 대표하는 5명의 다른 주교들은 로마와의 일치를 모색하고 있었다.
요한 쿤세비치-요사팟은 그가 수도원에서 받은 이름-도 같은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치고 죽을 때까지 고생하였다.
당시에 폴란드였던 곳에서 태어난 그는 일을 하기 위해 윌노로갔으며
브레스트의 회의에 동조하는 성직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바실리오회의 수도자가 된 후에 사제가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설교자와 고행자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비텝스크의 주교가 되었는데
그때 그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전례와 관습에 간섭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로마와의 일치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요사팟은 교회 회의와 교리 교육,성직자들의 재교육, 자신의 표양 등으로
리투아니아에 있는 대부분의 희랍 정교회를 일치에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에 파벌적인 교계 조직이 구성되었으며 요사팟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요사팟이 ’라틴화’되어 그의 모든 신자들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폴란드의 라틴 주교들에게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비텝스크로 갔다.
혼란을 야기시켜 요사팟을 주교좌에서 쫓아내려는 음모가 꾸며져 있었다.
사제 한 사람이 바로 요사팟의 집 정원에서 그에게- 모욕을 주도록 파견되었다.
요사팟이 그를 물리치고 자기 집 문을 닫았을 때 반대자들은
시청의 종을 울렸고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 사제는 집에서 나갔지만 몇몇 군중들은 주교관으로 쳐들어왔다.
도끼창에 찍혀 머리가 터지고 총에 맞은 요사팟의 시신은 강에 던져졌다.
나중에 그의 유해는 오늘날 폴란드의 비알라에 안장되었다.
그는 동방 교회에서 최초로 시성된 성인이다.
그의 죽음은 가톨릭 정신과 일치에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가져왔지만
이단과 분열도 계속되었으며 그에 따른 순교자들도 생겼다.
폴란드의 분할 이후에 러시아는 강제로 대부분의 루테니아 교회를
러시아 정교회와 합치시켰다.
분열의 씨앗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질 때인 4세기에 이미 뿌려졌다.
현실적인 분열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관습
-누룩넣지 않은 빵의 사용,토요일의 단식,독신제-에서 시작되었다.
양편 종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관여가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교리적인 차이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든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비극적인 분열
-로마 가톨릭 교회가 64퍼센트,
갈라져 나간 동방 교회(대부분이 희랍 정교회)가 13퍼센트,
개신교가 23퍼센트-을 정당화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계의 71퍼센트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적 일치의 증거를 보아야만 하는 때에 보여준 안타까운 현상이다.
분노한 군중들에 둘러싸인 요사팟 주교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비텝스크의 시민 여러분은 나를 죽이려 합니다.
여러분은 거리에서도, 다리 위에서도, 도로에서도, 시장에서도,
도처에서 나를 해치려 음모를 꾸몄습니다.
나는 여기 여러분 가운데에 목자로서 있으며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성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의 수위권을 위하여
또한 거룩한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죽을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바오로수도회)
1580년경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동방 교회 신자들이었다.
가톨릭 신앙에로 귀의하여 성 바실리오 수도회의 회원이 되었다.
신품을 받고 폴로크의 주교가 되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원수들의 증오심으로 인해 1623년 순교했다.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하느님의 교회]에서
(AAS 15 [1923], 573,576-577)
교회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렸다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에 따라 교회는 때가 차자 온 인류의 보편성을 포용하여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 되기로 예정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설계에 따라,교회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지니지만
그중에 범세계적 일치는 뛰어난 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너희는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으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홀로 제자들에게만 당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사명을 맡기셨을 뿐 아니라,
사도들이 이중적인 유대로써 긴밀히 묶여진 하나의 단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 첫 유대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부어 넣은"
공통의 사랑과 신앙의 내적인 유대이고,
둘째 유대는 베드로하는 한 사도의 다른 사도들에 대한
통치권으로 이루어지는 외적인 유대이다.
실상 베드로는 일치의 가견적 기초와
영원한 원리로서 다른 사도들에 대한 수위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일치와 화목이 지속 돌 수 있도록 하느님의 지고한 섭리는
성덕과 순교라는 두가지 인장으로 그 유대를 증명해 주시기를 원하셨다.
동방 슬라브 전례권에 속하는
폴로크의 대주교 성 요사팟은 바로 이 영예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동방 슬라브 민족의 기둥이요 영예로 응당히 인정하고 있다.
슬라브 민족의 목자요 사도인 이분보다 그 민족의 영예를 더 빛나게 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거룩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자기 피를 흘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천상의 영으로 감도되어 슬라브 민족의
동방 전례 및 성 바실리오 수도회가 보편적 교회와의 일치 유대성을 간직한다면,
차차 온 성교회의 일치를 되찾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리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나라의 국민들이 로마 교회와 일치를 지탱시키는 일에 몰두하여
교부들의 규정에 따라 동방교회 및 갈라져 나간 이들까지 사용하여
온 전례서들을 연구하여
그 일치를 진전시키거나 굳건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논증들을 어디서나 찾아냈다.
이렇게 많은 연구로 준비를 갖추고 난 후 교회의 일치 회복의 작업을
열의와 온유로써 시작했고 거기에 나타난 커다란성과를 보고
그의 원수들마저 그를 보고 "영혼들의 탈취자"라고 불렀다.
(가톨릭홈에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구에 속하는 교회는
불행하게도 10세기경 로마 교회를 이탈하게 되어
교황청에서는 끊임없이 그의 귀화에 노력했는데,
특히 그 운동은 16세기에 이르러 남동 러시아 및 폴란드에서 왕성했다.
그래서 1594년에 이교측 키에프 대주교를 비롯한
7개 교구의 주교가 부시에시티에서 회의를 열고,
각기 해당 교구에 있는 교회와의 일치를 선언했다.
그러므로 많은 가톨릭 사제, 그 중에도 바실리오 수도회의 신부들이
그 귀화 운동에 가담했는데,
성 요사팟은 그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분이다.
요사팟은 1580년 부티미에슈시 루테노 귀족인
로사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가톨릭적 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예수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되어
일찍이 주님을 사랑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성함에 따라 양친은
그를 상인으로 입신시키려 했으나, 요사팟은 물질에 대한 욕망보다
정신적욕구에 강한 충격을 느껴, 당시 겨우 일어나기 시작한
로마 가톨릭에의 합동 귀화 운동에 귀가 쏠려,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상점을 걷어치우고 물려받게 될 재산까지도 사양하고
1604년에 성 바실리오의 우크라이니아회에 들어갔다.
이리해서 수사가 된 그는
회칙을 엄수하여 자주 단식재를 지키고 육식과 음주를 끊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는 등 엄준한 금욕 극기의 일과를 보냈다.
저서를 연구해 이교의 부당성을 지적할만한 지식을 기르고
이어 그 호교론 저술에 착수했다.
그는 1609년에 비잔틴 예식에 따른 사제로 서품되었고, 그 즉시 설교로 유명해진 한편,
우크라이나 교회와 로마간의 일치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요사팟은 아직 젊은 나이에 비텐 수도원장에 선임되었고,
후에는 위르노 수도원장을 역임했다.
1617년, 그는
러시아의 비텝스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얼마후인 1618년에는
플롯스트의 대주교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그동안 항상 합동 운동에 노력했으므로 이교도들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책동했으나 그런 일에 귀를 기울일 요사팟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깊은 원한을 품고 그를 옭아맬 기회만 엿보고 있었으나,
그의 공, 사생활에 있어 한 점의 틈도 없고
더욱이 일반의 신망이 두터웠으므로 트집을 잡을 수 없어
이번에는 수단을 바꾸어 그를 비방 모함해 명예를 손상시켜 인심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게 하고
그의 생명까지 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혼란하던 교구를 바로잡기 시작했으니,
로마와의 반목,기혼 사제,느슨한 규칙,
페허화된 성당들을 고치기 위해 시노드를 소집하여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이즈음에, 뜻을 달리하던 일단의 주교들이 요사팟은 실제로 라틴 사제이며,
로마 가톨릭은 러시아 민중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대립 주교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다.
1620년, 요사팟이 대주교가 된 지 2년이 된 때였다.
그는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비텝스크로 사목 방문을 하던 중,
교회를 증오하는 자들이 선도을 받은 이교도들은 손에 손에 흉기를 휘두르고
사제관으로 몰려 들어왔다.
요사팟을 호위하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나 중과 부적(衆寡不敵),
감당할 길이 없어 일부는 살해되고 일부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요사팟은 바로 그때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섰는데
이 비참한 광경을 보고 매우 놀라며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나가
"형제들아! 당신들은 어찌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느냐?
나에게불만이 있으면 나를 상대할 것이 아닌가!
나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하며 크게 호령했다.
폭도들은 그 바람에 일시 멈칫했으나
다시 요사팟에게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리고 도끼로 찍고
창으로 찌르며, 드디어는 총으로 대주교의 생명을 빼앗고야 말았다.
그것은 요사팟이 숨이 끊어지려는 중에도 손을 들어 십자를 그으며
원수들의 죄사함을 청하는 기도를 하려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폭한들은 대주교를 죽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유해를 모독하며 다비나강에 던져 버렸는데,
고기를 잡고 있던 어느 어부가 발견해 돌을 매달아 물 속 깊이 가라앉게 했다.
후에 신자들이 그 유해를 정중히 플롯스크 대성전에 안치했다.
이교도 귀화 운동의 희생자 요사팟 대주교는
첫 번째 동방교회 성인으로서 비오 9세에 의해 1867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이콘]블라디미어 (Wladimir)의 성모.모스크바.17세기.
부조은판장식(浮彫銀板裝飾, Risa) 31x27cm.Risa에 찍힌 인장년도:1789년
블라디미어의 성모성화(Icon)는
자비의 성모 또는 다정한 성모의 전형(典型)에 속한다.
11세기에 제작된 트레차콥 화랑에 있는 유명한 성화(Icon)가
가장 오래되고 잘 알려진 작품이다.
역대기(歷代記)에 의하면. 트레차콥 화랑에 있는 성화(Icon)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키에프에 옮겨져서 1155년에는 이미 러시아에 있었다.
6년 후에 이 성화는 블라디미어시에 이전되어 거기에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1395년에 이 성화는 모스크바에 대여(貸與)되어 타메르란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구출했다고 한다.
이 성화(Icon)는 러시아의 수호신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많은 성화가들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아기 예수는 다정하게 자기에 볼을
어머니의 볼에 맞대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껴안고 있다.
성모는 아기 예수를 그녀의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껴안고 왼손으로는 구세주를 가리킨다.
후광의 좌우 양편에는 MATER THEOU의 약자가 보인다
그림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수호천사를, 오른쪽 가장자리에 는 성녀 페오도라 (Feodora)를 묘사했다.
아름다운 이 성화는 회화적인 가치가 높고 정교한 타출세공(打出細工)으로 된
은판장식(Oklad)을 한 작품이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