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신앙살이]
할머니들은 할머니들을 필요로 한다.
어제 저녁부터 갑자기 목이 붓더니,
새벽이 되어서는 침을 삼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목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병원에 가려고
읍내 이비인후과에 예약 전화를 했더니,
대체 공휴일이라 휴진한다는 겁니다.
‘이를 어쩌지…’하며 고민을 하는데, 함께 사는 신부님이
근처 면 소재지에 있는 가정의학과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병원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했고,
의사 선생님도 좋은 분이라 강조하면서!
이에 나는 오늘 병원 진료 하는지를 물었더니,
신부님은 그 병원에 전화했고 ‘진료한다’는
간호사의 말을 확인하고 알려 주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을 듣고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은 후,
차를 몰고 근처 면 소재지에 있는 병원을 찾아 갔습니다.
시골 면 소재지에서 병원을 찾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차나 혹은 오토바이, 어르신용 유모차 등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면 그 곳이 병원입니다.
나 역시, 내비게이션 없이 그 병원을 찾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병원 앞 도로에 차는 물론 오토바이, 유모차 등이 잔뜩 있었거든요.
‘설마…’ 했는데, 병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 마스크를 쓴 어르신들이
작은 병원 홀이 꽉 차도록 많이 앉아 계셨습니다.
내가 병원에 들어간 시간이 아침 9시였는데,
그 시간에도 정확하게 스무 분의 어르신이 대기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물리치료실’ 안에는 10개의 병상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모든 어르신들이 누워서 ‘물리치료’를 받고 계셨습니다.
접수대에 있는 간호사에게 다가가
처음 왔다고 말했더니 신상 정보지를 주길래,
주민등록번호 등등 적어 간호사에게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나!
오늘 대체 공휴일이라 병원 문을 연 곳이 없는데,
목이 아프기도 하고 다른 병원으로 갈 힘도 없고!’
아무튼 오늘은 간단히 치료만 받고 내일 읍내 이비인후과에 갈 결심을 하며,
자리가 없어서 서서 기다렸습니다.
조용히 서 있으니 자연스럽게
주변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마스크를 단단히 쓴 할머니들께선 고추를 따던 이야기,
황토 고구마를 캔 이야기, 배추와 무를 캘 날짜 이야기,
농사일 하다가 넘어진 이야기, 논에 벼가 아직 누렇게 익지 않아
걱정스럽다는 이야기 등을 하고 계셨습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쏟아지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이 뒤섞여
어느 누구의 이야기인지 집중할 수가 없었지만,
할머니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화를 하셨습니다.
가만히 보니, 할머니들의 시선은 오랜 만에
낯선 청년(?) 같아 보이는 나를 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나를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어리바리한 얼굴에 꾀죄죄한 복장, 양말도 신지 않은
슬리퍼 차림의 나의 몰골에 할머니들은 ‘저 사람 어느 동네 사람인고!’
하듯 유심히 쳐다보시다가, 또 당신들 이야기에 집중하곤 하셨습니다.
할머니들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고,
그러다 물리치료실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면
다음 할머니가 자연스레 그곳에 들어가시고!
그 할머니의 빈자리에 다른 할머니가 앉으시면 또 다시 고추,
고구마, 배추 이야기들이 줄줄 나왔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눈감고 듣는데 멀리 제주도에 계신
어머니 생각도 나고, 며칠 전에 아들을 잃고 우시던
어느 할머니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서울 사는 손주가 아프다며 너무 힘들어하던
어느 할머니의 애잔한 모습도 생각나고….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할머니들은
서로에게 슬픈 마음의 치료사구나.
할머니들은 서로에게 애잔한 마음의 상담사구나.
그래, 할머니들은 할머니들의 언어로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었구나.
할머니들은 쉬지 않고 서로에게 자신의 말을 하면서,
결국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구나.’
오랜만에 나 또한 할머니들 마음에 젖어 들어가
뭔가 치유를 받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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