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7일
성 프루멘시오 주교
St. Frumentius, E
St.FRUMENTIUS of Ethiopia
Apostle to Ethiopia,Abuna of Ethiopia
at Tyre (modern Sur, Lebanon) -
c.380 in Ethiopia of natural causes
그와 성 에데시오(Saint Aedeius)는 형제로서 티르 태생이고,
에티오피아의 첫번째 복음 선포자로 공경받고 있다.
그 당시 인물인 루피노에 따르면, 프루멘시오와 에데시오는
티르의 철학자인 메로피오(Meropius)의 젊은 문하생이었다.
그들의 스승이 에티오피아에서 살해되었을 때,
그들 형제만 이상하게도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크숨에 있는 왕궁으로 끌려갔으나,
왕은 오히려 그들을 신하로 삼으면서 에데시오에게는 궁중 연회에서 술을 따르는 직책을,
그리고 프루멘시오에게는 서기직을 맡겼다.
왕이 죽은 뒤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왕비의 요청으로 그 지방에 계속 머물면서,
서방의 상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알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왕의 아들이 계승하게 되자 완전히 석방되어,
에데시오는 티트로 가서 사제가 되고,
프루멘시오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성 아타나시오(St.Athanatius)에게 가서
에티오피아의 선교사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성 아타나시오는 그를 주교로 축성하고 파견하자, 그의 선교 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니,
왕의 형제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그는 "아부나(Abuna of Ethiopia)"로 불리는데,
우리 아버지란 뜻이다.
-성바오로수도회에서
프루멘티우스Saint Frumentius
암하라어로는 Abba Salama.
4세기에 활동한 시리아의 사도.
에티오피아에 그리스도교를 소개했다.
에티오피아의 고대 수도인 아크숨의 초대 주교로서,
4세기에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정통신학에 근거하여
그곳에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조직했다.
티레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340년경
동료 아이데시우스와 함께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 붙잡혀가서
아크숨 왕국의 왕 에자나의 신하가 되었고, 후에 왕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왕이 죽은 뒤 총리 겸 황태자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로마 제국에서 온 그리스도교 상인들에게 종교활동의 자유를 주었다.
섭정 역할을 마친 뒤 347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타나시우스를 방문하여
에티오피아의 그리스도교화를 더욱 촉진할 것을 조언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성 아타나시오(st.Athanatius)주교
축일:5월2일.인창동성당게시판1137번
AD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아타나시오는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 온 교리의 충성스러운 수호자였다.
황제와 아리우스 파에 의해 수많은 박해를 받고 다섯번이나 유형에 처하면서도
결국은 진실한 믿음으로 승리를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교리와 꺼질 줄 모르는 사랑은 동방 교회로부터
위대한 교부로 인정받게 하였다.
결국 아리우스의 설은 326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되고 배척되었는데,
이에는 무엇보다도 아타나시오의 분투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으로 보는 점에서 현대의 이성주의와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은
아리우스 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며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구세주이다.
그 이단을 주장한 아리우스는 다 같이 알렉산드리아에 있으면서
구세주이신 예수께 관하여 교회의 신앙과 위반되는 것을 가르치고,
특히 천주 성부는 영원한 분이시지만
하느님의 제2위이신 예수는 성부께 창조된 한(限)이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구세주와 그 외 점에 있어서 그가 정통 교회와 의견을 달리하게 이른 것도
또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광범하게 퍼져 나간 아리아니즘 이단에 대항한
위대한 신앙의 투사였다.[이콘]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6세기.루브르박물관,파리.
목판에 그려진 이콘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콥트 교회에 기원을 두고있다. (이콘.신비의 미-장긍선신부편저)
이 작품은 이집트 정교회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이콘 가운데 하나로서, 구세주 예수님과 곱틱(Coptic)교회의 수도원장 성 메나와의 친교가 잘 담겨져 있다. -(정웅모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감독)- 요한 15,11-17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성 메나스(St.Mennas of Egypt)축일:11월11일.게시판743번,1464번 참조.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이디오피아
아프리카대륙의
북동부에 위치한 공화국으로 면적 122만1,900Km, 인구 3,278만명(1982년 추계).
성서는 이 지방을 쿠스라고 부르고 있으며,
흑인에다 장신이며 무역에 종사하는 이 지방 주민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유태인과 같은 셈족으로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사도 8:26-40)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지방이 유태교와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 후 4세기경에 프루멘티우스와 에데시우스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이 지방에 전해졌고
프루멘티우스는 아타나시오에 의해 이 지방의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5세기 말경 시리아에서 9인의 로마성인이 방문하여 이 지방의 교회를 굳건히 하였다.
그 뒤 많은 교회가 세워졌지만 7세기경에 침입한 이슬람교도애 의해 교회는 쇠퇴하였다.
15세기경 포루투칼과 무역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교 문화와 다시 접촉하기 시작하여
카톨릭 신자수는 23만 6,000명(1982년 현재)이다.
아비시니아 교회라고도 불리는 이 지방의 교회는 ≪에녹≫, ≪헤르마스 목자≫,
≪이사야 승천≫ 등의 위경을 포함하여 81권의 성서를 갖고 있으며,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단성론을 취하며 안식일, 할례,
부정한 고기에 대한 구별 등의 유태교 의식을 지키고 있다.
사제는 전례를 행하는 사제와 학교교육을 담당하는 신도 수도사의 2분류가 있다.
전국민의 약 66%가 콥트교회 신자이고 나머지는 이슬람교도. ■콥트교회 Coptic church
이집트인의 콥트 국민교회.
639∼640년 아라비아인 지배아래 성립,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밑에 속한다.
교회법은 위사도서간(僞使徒書簡), 고대 공의회문서, 비잔츠, 시리아 법률자료,
여러 주교의 지령에 따라 성립.
교의상 가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황의 통치권교도권상의
수위(首位)에 관한 점이다.
전례는 콥트어를 사용. 신도수 약 85만명, 콥트인 프로테스탄트 5만명,
가톨릭 귀일교회 신도 3만명이다.
■아리우스주의 Arianismus 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 삼위 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 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 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 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동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
이슬람권 이집트에 압도적으로 많은 주요 그리스도교 교회.
7세기 아랍인이 점령하기 이전의 이집트 민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아이지프티오스’(아랍어로는 qibt, 콥트는 서구화된 발음임)라 불렀다.
그뒤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아이지프티오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자
이 용어는 소수 종교집단인 그리스도교도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5세기 이래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그리스도의 단성만을 인정하는 견해) 교회에 속했으며,
스스로를 이집트 교회라 불렀다.
19, 20세기에는 콥트 정교회로 자칭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콥트인들 및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동방정교회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4, 5세기에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451)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콥트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중단했다.
■콥트 성가 Coptic chant
7세기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 전
그리스도교에 귀화한 고대 이집트 후손들의 예배음악.
아랍어 ’qibt’에서 유래한 ’콥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ios
(’이집트인’ 또는 ’이집트어’)의 전와어(轉訛語)이다.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로 이집트인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계속 믿던 소수인들에게만 이 명칭이 적용되었다.
함셈어족인 콥트어는 997년에 아랍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콥트의 예배용 언어로만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콥트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리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콥트의 의식이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콥트인들은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은 근래에 와서 필사 악보와 예배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