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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Berardus 2021. 9. 16. 18:03

 

 

9월 17일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St. Robert Bellarmine
St. Robert Francis Romulus Bellarmine
San Roberto Bellarmin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Born :4 October 1542 at Montepulciano, Tuscany, Italy
Died :17 September 1621 at Rome; relics in the church of Saint Ignatius, Rome
Beatified :1923 by Pope Pius XI
Canonized :1930 by Pope Pius XI 
Roberto = splendente di gloria, dal tedesco(dazzling of Gloria, from the German)

Painting. Abell Board Room. Bellarmine College.

 

1542년 토스카나의 몬테풀치아노(시에나)에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로마에서 예수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훌륭한 토론회를 가졌고 콜레지오 로마노에서 강의했다.

교황의 자문 역할 및 카푸아의 대주교와 추기경,예수회의 관구장들의 조언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일반 민중들이 학식이 깊은 사람의 생활을 예의 주시하고

그들 생활이 단순하고 담백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고 그렇게 생활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는 루터파 및 칼빈파 신학자들과의 신학 논쟁으로도 유명하며

지금 우리시대에서도 크리스찬 교리 교육의 지침서로써 쓰이는

17세기 교리 논쟁을 모아 조그만 교리 문답서를 만들었습니다.

로베르토 성인이 새로운 크리스찬 세대의 형성에 기울였던 정성과 교리 교육적 지침은

그를 교회의 학자로 성찬 받게 하였습니다.

-예수회 http://www.sogang.ac.kr/~gesukr-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1570년 서품을 받았을 때,

교부들은 교회사의 연구에 무관심한 상태였다.

토스카나 지역의 유망한 젊은 학자로서 그는

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교리를 체계화하고 성서를 연구하는

두 가지 일에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루뱅에서 예수회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3권으로 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논쟁에 관한 토론’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의 세속권과 평신도의 역할에 관한 부분들이다.

그는 ’왕권 신수설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초래했으

나 한편 로마 교황의 세속권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인 버클레이와 대항하여 교황을 옹호했지만

 교황 식스토 5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벨라르미노는

 "학식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다.

벨라르미노는 바티칸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실천해 오던 내핍 생활을 전혀 완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만을 먹으면서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가계비 지출을 제한했다.

그는 군에서 탈영한 한 군인의 몸값을 치르었고 "벽은 감기들지 않을 것이다

.the walls won’t catch cold."라고 하면서

자기 방의 커튼을 가난한 이들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교황 클레멘스 8세 시대의 신학자로서

그의 많은 활동 가운데 특히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두 개의 교리 문답집 준비를 들 수 있다.

 

벨라르미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있는 중요한 논쟁은

1616년에 일어난 일로 그가 찬양하던 자기 친구 갈릴레이에게 충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벨라르미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성서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교리 성성을 대신하여 그에게 충고를 했다.

이 충고는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것을 가설 이상으로 지나 치게 비약시키는 데 대한

 하나의 경고였다.

이것은 성인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이다.

 

벨라르미노는 1621년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복은 1627년에 시작되었으나 그의 저서에 연유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연되었다가

비오 11세가 1923년 시복,1930년 시성,1931년 교회학자로 공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 추구된

교회의 쇄신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따르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확고한 영도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든든한 정통의 기둥과 권위를 지니고 확실하게 밝혀 놓은 노선에 따라

 철저한 지시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

"어제도 내일도 언제나 영원히 같은 그리스도안에

궁극적인 바탕을 가지고 변하지 않는 많은 사실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성서와 가톨릭 교리의 연구에 그의 일생을 바쳤다.

그의 저서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신앙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뿐아니라

그것이 예수의 현존이며-그 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이 보여준 것-

계시 종교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근원은 단순히 일련의 교리가 아니고 오히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여전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가 그의 사도들을 떠났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현존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 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모든 교회를 함께 돌보고 있는 주교들은

 주교성성을 통하여 받은 주교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교황과 일치하여 교황 권위 밑에서 모두 한 단체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교도직과 사목 행정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3항) -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노 주교의 「하느님께로 향한 인간 정신의 상승」에서

(Grad.1: Opera omnia 6, edit.1862,214)

 

내 마음을 당신 계명에로 기울게 하소서

 

"주여, 당신은 좋으시고 인자하시며, 당신께 비는 자를 크게 어여삐 여기시나이다."

당신의 아버지다운 통치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맛보기 시작하는 이라면 마음을 다해 당신을 섬기지 않을 자 있겠습니까?

주여, 당신의 종들에게 명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위에 내 멍에를 메어라."

당신의 멍에란 무엇을 말합니까?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메는 자를 내려 누르기는커녕 오히려 힘을 주며 무거움을 느끼게 하기는 커녕

 안식을 얻게 해주는 그런 멍에를 누군들 기꺼이 메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응당히 다음과 같이 부언하셨습니다. 내 멍에를 메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피곤하지 않게 하고 안식을 가져다주는 당신의 이 멍에는 무슨 멍에 입니까?

분명히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입니다.

선과 미는 사랑을 애호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더 좋으며 더 즐거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 나의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이 모든 것입니다.

 

당신의 계명은 그 자체로 보아

 황금 더미보다 더 바랄 만하고 꿀보다 더 달콤한 것인데도,

더욱이 그것들을 지키는 이들에게 상급을 약속까지 하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나의 상급, 사도 야고보의 말씀에 따라, 크나큰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월계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월계관이란 무엇입니까?

이사야의 말씀에 따라 복된 바울로 사도가 말하듯,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선입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상급은 참으로 큽니다.

가장 크고 첫째가는 이 사랑의 계명은 그것을 명하시는 하느님께보다

그것을 지키는 인간에게 더 유익합니다.

여타 모든 계명들도 그것들을 지키는 이들을 완전케 하고 고양시키며 교훈하고 밝혀 주며,

한마디로 어질고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인 당신의 목표이고 영혼의 중심이고 당신 마음의 보화입니다.

이 목표에 다다른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이 되고 거기서 멀리 한다면 불행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목표에로 인도하는 것만을 당신에게 선익이 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 목표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을 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번영과 곤고, 부유와 가난, 건강과 질병, 영예와 수치,

그리고 생명과 죽음을 그 자체로 구하지도 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의 영원한 행복에로 이끄는데 이바지한다면 좋고 기대할 만한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의 영원한 행복에 장애물이 된다면

악으로 보고 피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벨라프미노 가문에서 태어난 이 성인은

 성 베드로 가니시오와 같이 예수회 수사 신부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세상을 어지럽게 할 무렵 교회의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하느님께 특별히 간택된 분이었다.

 

그는 1542년 10월 4일 플로렌스 주의 몬테 풀치아노 시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탁월한 재주와 학문에 대한 열심으로 종종 스승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8세때에 예수회 입회를 신청하자 그의 재주의 비상함을 알고있던 원장은 이를 쾌히 승낙햇다.

20세가 되자마자 일찍이도 수사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잠시 그 임무를 완수한 후

다시 철학, 신학을 연구하고자 벨기에의 루벵에 가서 그곳에서 28세에 성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가 자신의 박학과 웅변으로 설교를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품전 신학 연구 때부터인데 특별히 교회의 진리를 지극히 명석하게 설명하므로,

프로데스탄트 신자들도 그의 명성을 사모하여 일부러 영국에서부터 설교를 들으러 와

 그의 조리있는 설명을 듣고,

이단에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루벵 대학을 졸업한 벨라르미노는

 즉시 모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6년간 신학 강좌를 담당했다.

그동안 그이 평판은 멀리 로마에까지 퍼져 1576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그를 초빙하여

 대학의 변증학 교수로 임명했다. 

그 임무를 맡고 있었던 12년 동안, 변증 호교학을 잘 강의하며

당시 새로 일어난 이단설의 오류를 지적 논파하자 마치 쾌도로 난마(快刀亂麻)를 절단하는 거와 같았고,

펜으로는 ’현대 이단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변박서’라는 서적을 저술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는 바가 컸었다.

그 명석한 논지와 온화한 필치는 한 번만 읽고도 반드시 교회로 개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평까지 있어서,

많은 이단자들의 개종을 초래했으므로 이단자들은 대단히 놀라며,

칼빈파의 수장 베자 같은이는 급히 그 저서를 읽는 것을 금했다.

한편 교회측에서는 이 서적에 대해 크게 환영하며 받아들였다.

 

 

그의 강의는 항상 수많은 학생을 끌었고

그 중에는 각국에서 온 많은 개신교 청강생들이 모여왔는데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후 학생들은 자기 고향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임을 전하여

그 영향은 점차 커졌고 벨라르미노의 교회에 대한 공로는 실로 측량할 수 없었다.

 

성 알로이시오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Spiritual father of Saint Aloysius Gonzaga)

이 순결한 청년이 그처럼 빨리 성인이 된것은 주로 은사였던 벨라르미노의 열심한 훈육에 기인한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축일:6월21일,게시판1232번,1830번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축일:12월21일,게시판802번,1531번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7월31일,게시판129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Wood Carving.Horrigan Hall. Bellarmine College.

 

얼마후에 그는 나폴리 왕국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의 관구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곧 그를 로마에 다시 불러들여 교황청의 고문으로 임명하고

1599년에는 교회의 최고 직분인 추기경에 임명했다.

또한 벨라르미노는 두번이나 교황의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를 사양했다.

 

벨라르미노의 저서는 상당한 수에 달하지만 그

중에는 학문에 관한 것도 있는가 하면 ’선종의 길’과 같은 신심서가 있고,

그래도 제일 유명한 것은 교리서인데 이는 실로 60개국어로 번역되고

4백회 이상이나 재판된 기록을 갖고 있다.

 

 

벨라르미노는 이같이 교회를 위하여 다년간 전력한 후

79세의 고령에 달하여 임종이 가까운 줄을 알고 수도원의 한 구석에서 죽기를 열렬히 원했던 바

다행이 그 원이 채워져 1621년 8월 말경 그리운 수도원에 돌아와 9월 17일 그곳에서 선종했다.

마지막으로 병자 성사를 받을 적에 그는 누워서 받으려고 하지않고

 아주 쇠약해진 몸을 일으켜 마루 위에서 무릎꿇고 받았다고 하는데,

이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열심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임종할 때 몸에 걸쳤던 추기경의 의장은 20년 전 교황으로부터 받은 그대로였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옷을 새로 맞춘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생전에 모두 가난한 사람, 고학생, 경영이 곤란한 병원,

수도원 등을 위해 기부했으므로 그가 죽은 후 장의 비용도 없었다고 한다.

이 성인이 얼마나 수도자 다운 가난의 덕을 지켰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시성 조사는 일찍이 1627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자도 없지 않았으므로 한때 시성 조사는 중지되었으나

다시 시작하여 드디어 1930년 6월 29일 성 베드로,

 바오로 두 사도 축일을 계기로 장엄하고도 성대한 예식이 거행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유골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 1923년 로마에 있는 성 이냐시오 대성당에 운반되어

 성 알로이시오 제대 옆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