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년경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안티오키아에서 외교인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고,
안티오키아 학파이 거두인 타르소의 디오도루스로부터는 신학을 배웠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 369년에 멜레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374년경에 성 바실리오의 지도아래 은수자가 되어 수덕 생활을 시작하였다.
386년에 사제가 되어 12년 동안 안티오키아에서 성 플라비안 주교를 도왔으며,
설교직에 헌신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390년부터는 신약 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 관습을 개혁하는 데 힘씀으로써
참된 목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특별 기부금 제도를 마련하였고,
교회의 사치와 남용을 단죄하였으며, 동방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그는 우상숭배와 비윤리적인 행락과
사회의 사회 부조리에도 단호히 대처한 만큼, 원수들도 많았다.
그는 정직하고 엄격한 자신의 삶을 살므로써 원수들에게 대항하였다.
왕실의 증오와 원수들의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두 차례나 유배 생활을해야 했다.
403년, 그를 미워하던 테오피로를 비롯한 36명의 주교들이 오크 시노드에서
29개 조항을 들어 단죄하고, 유배시켰다.
그러나 내란과 지진이 일어나자 황제는 그의 명을 취소시켰다.
그러나 404년에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재차 그를 귀양 보냈다.
이때 그는 238통의 편지를 남겼다.
콘스탄니노플의 신자와 교황
성 이노첸시오 1세 및 서방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신앙을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로 인해
"황금의 입" 즉 크리소스또모라는 별칭을 얻었다.
개인적 성성 뿐만 아니라 설교와 주석학 그리고 전례적 개혁등으로 유명한 그는
특히 설교에 있어 반복과 비약으로 구조가 허술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지성과 그리스적 균형 감각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과 청중에 대한 제어력들
동시에 지닌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설교는 박수와 눈물로 자주 중단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의 희랍계 박사 4분 가운데의 한분으로 공경받는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그는 451년의 칼체돈 공의회에서 교회박사로 선언되었고,
비오 10세에 의하여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ICON] JOHN CHRYSTOSTOM.
Corfu, Michael Damaskenos.Late 16th
안티오키아 출신의 위대한 설교가인
요한을 둘러싸고 있는 애매모호함과 흥미 진진함은
대도시에서 살던 위대한 사람의 생애답다.
시리아에서 12년 동안 사제로서 봉사한 다음, 콘스탄티노플로 온 요한은
자신이 제국의 가장 큰 도시의 주교가 됨으로써 황제의 계략에 희생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금욕주의자로 눈에 띄지 않는 품위가 있는 요한은 수도자로서 사막생활을 하는 동안 얻은 위장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제국 정치하에서 주교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의 신체는 약했지만, 그의 혀는 강했다.
그의 설교와 성서에 대한 그의 주석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허망한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설교의 요점은 고관들과 권력자들을 괴롭혔다.
어떤 설교는 2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궁정에서 그의 생활 양식은 몇몇 대신들만이 알아챘다.
그는 황실과 교회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는 교구청 관리들에게 간단한 식사를 제공했다.
요한은 고위 관리들 앞에서 그에게 상석을 내어 놓는 궁정 의례를 비판했다.
그는 매수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열성이 그를 결정적인 행동으로 이끌었으니 승진을 위해 뇌물을 쓴 주교들은 면직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설교에서 가난한 이들과 재산을 나누어 쓰는 구체적 단계를 제시했다.
기혼 남자들이 그들의 아내들만큼 부부간에
성실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아담 때문에 사유 재산이 존재했다는
요한의 설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요한은 정의와 애덕이 실현될 때,
이 두 가지 가치 기준이 하나로 결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연하고 정력적이고 솔직한 요한이 특히
설교대에서 흥분할 때에는 개인 문제에도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였다.
그는 좋은 포도주와 훌륭한 음식을 몰래 실컷 먹는다는 비난도 받았다.
부유한 과부인 올림피아의 성실한 영적 지도자였던 그에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부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 위선자라고 험담을 했다.
소아시아에 있는 무능한 주교들을 반대한 그의 행동은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탐욕적이고
교회법에서 부여한 권위를 크게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요한을 개인적으로 공공연하게 비난하던 두 명의 유력한 인물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필로와 에우독시아 황후였다.
테오필로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요한에게 이단을 추종하고 있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테오필로와 분노한 다른 주교들은 에우독시아의 지원을 청했고 황후는
황실 궁정 생활의 사치를 복음적 가치와 대조시키는 그의 설교에 분개하고 있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사악한 이세벨과 간악한 헤로디아에 대한 설교들은 황후와 관련되었고,
황후는 마침내 요한을 추방시켰다.
그는 470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JOHN CHRYSTOSTOM.American stained glass.XX c.
St. John Chrysostom Church,West Roxbury, Massachusetts, USA.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씀과 실례를 들어 설교함으로써
불안한 자를 편안하게 하고 안락한 자를 불안하게 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예시한다.
그의 정직함과 용기 때문에 그는 주교로서
어려운 직무 수행,개인적인 험담,추방 등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주교들은 물질 재화의 소유, 경제 성장과 정당한 분배,평화와 전쟁,
모든 민족의 형제적 공존 등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야 한다."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12항)-
[ICON] JOHN CHRYSTOSTOM.Chelandari Monastery .Athos .XIX c.
성 요한 크리소스또모 주교의 강론에서
(Ante exsilium, nn. 1-3:PG 52,427-430)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며 죽는 것도 이득이 됩니다.
숱한 파도와 험한 풍랑이 위협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우리를 삼켜 버릴까 하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성낸다 해도 그것은 바위를 쪼개 버릴 수 없습니다.
파도가 탑처럼 높이 치솟는다 해도 예수님의 배를 삼켜 버릴 수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죽음입니까?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혹 유배 생활입니까? "땅이며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하느님 것입니다."
혹 재산의 손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나에겐 이 세상의 무서운 것들이 멸시할 만한 것이고 그 좋은 것들도 웃어넘길 만한 것들입니다.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재화를 탐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선익 때문이 아니라면 죽음도 겁내지 않고 살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일어나는 일을 여러분에게 단지 유의시키고
여러분이 확신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바입니다.
[ICON] JOHN CHRYSTOSTOM.
Chrysostom receiving Gospel from Apostle Matthew.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사랑으로 묶인 이 무수한 백성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 분의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진정코 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서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팡이요 나의 보호이며 나의 잔잔한 항구입니다.
온 세상이 와중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성서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읽습니다. 그것은내 성벽이요 내 보호체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파도가 나를 대항하여 일어서고, 바다와 통치자의 분노가 나를 거슬러 밀려와도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거미 한 마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를 막지만 않았다면 오늘이라도 즉시 딴 데로 떠났을 것입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 할 뿐입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나의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것은 나의 보루이고 이것은 나의 움직임이 없는 바위이며
이것은 나의 흔들림이 없는 지팡이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나는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이 아무데라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정해 주신다면 그분께 감사 드릴 것입니다.
[ICON] JOHN CHRYSTOSTOM.
Detail from Greek icon.ca. 1675-1725.
내가 있는 데에는 여러분도 나와 함께 있습니다
. 여러분이 있는 데에는 나도 역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므로 몸은 머리에서 분리될 수 없고 머리는 몸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장소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사랑으로 말미암아 연합되어 있습니다.
죽음마저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육신이 죽는다 해도 계속 살아 남을 내 영혼은
내 백성을 기억에 남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동일한 나의 시민이요
나의 아버지요 나의 형제, 나의 자녀, 나의 지체, 나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보통의 빛보다 더 소중한 나의 빛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나에게 비추어 주는 빛에 비교될 만한 빛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태양 빛은 나의 현세 생활에 유익한 것이지만 여러분의 사랑의 빛은
미래에 얻을 월계관을 나에게 엮어 줍니다.
Porte Saint,Saint Jean Chrysostomo, Saint Basile le Grand.
438년 1월 27일 저녁때의 일이다.
동(東)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해안에는
수십만 명의 대중이 손에 횃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바다 위에도 별과 같이 뜸뜸이 반짝거리며 많은 배 위에서 불꽃을 피우고 있었다.
조금 후 그러한 배들의 영접을 받으며 몇 척의 배가 항구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상륙한 것은 이 백 명에 달하는 주교, 신부와 남녀의 수도자들이 었는데,
그 중의 몇 명은 깊은 애도(哀悼)의 침묵속에 돌로 된 영구(靈柩)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때 해변가에서 서 있던 군중 속에서 앞으로 걸어나간 위풍이 좋은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그 영구에 이마를 대고 경견한 태도로 경의를 표시하고 난 다음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아! 성 요한이여, 동(東)로마 황제 테오도시오인 나는 지금 경건히 경(卿)의 영(靈)앞에서 간청합니다.
경을 고생케 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해 주소서."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성당에 그 영구를 배웅하는 슬픔의 행렬은 그칠 줄 모르는 장사진(長蛇陳)을 이루었다.
이 성인은 누구였을까?
그는 이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로 계시다가 오해를 사서 추방당해 3년후 소아시아의 북쪽
흑해(黑海)의 해변가에서 객사한 당시 유명한 교부이고
또한 무비(無比)의 웅변으로
크리소스토모(황금의 입, 金口)라고 칭했던 성 요한이었다.
[ICON] JOHN CHRYSTOSTOM.
Greco-Byzantine. XVI c.Between Archangels Michael and Gabriel.
그는 354년 2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극히 신심이 두터웠으나 그 중에서도 더 경건했던 어머니는
요한이 겨우 3, 4세 때에 남편을 잃었지만
아들의 종교 교육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과 행동으로 그를 교도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고 일찍부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결심을 가졌다고 한다.
참으로 요한의 어머니 성녀 안쯔사는 성 대 바시리오(축일:1월2일)와
성 그레고리오(니싸,축일:3월9일)
형제의 어머니 성녀 엔레니나나,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축일:1월2일)의 어머니
성녀 논나(축일:8월5일)와 같이 탁월한 인물의 어머니로서의 자연적,
초자연적 소질을 구비하고 있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맏이,축일:1월1일)과 성녀 논나의 아들**
즉 지혜가 밝고 의지가 굳고 애정이 깊고 신앙이 두텁고 높은 교양을 가짐과 동시에
실제적인 분별에도 우수했다.
그러므로 아들 요한이 소년시기 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풍부히 받고 덕행의 길에
크나큰 진보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는 당시의 관습에 의해 18세기 경에 세례를 받고
그 후 3년가 신학을 공부하고 성직자가 될 결심을 했지만,
친구인 성 바실리오와 같이 은수자와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요한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던 안쯔사는 도저히 그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도 할 수 없이 일시 자신의 계획을 중지하고
집에 있으면서 어머니에게 효도를 드림과 동시에 수덕의 길을 걷고 있었다.
[ICON]JOHN CHRYSTOSTOM.
Modern Russian.Vladimir Blagonadezhdin.
그러는 동안에 어머니가 거룩한 임종을 했으므로 아무 거리낌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년간의 소망을 채우려고 우선 안티오키아에서
가까운 산중으로 들어가 4년간 다른 수도자와 같이 엄격한 극기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도 만족을 못 느껴 이번에는 이집트의 데바이스의 은수자를 본받아
다시 2년간이란 세월을 광야로 가서 홀로 기도와 고행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본말(本末)의 오류를 범하는 때는 없었다.
그것은 그는 질서 있게 "불면철야나 단식이 귀중한 것이 아니다.
마음에 불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귀중한 것이다.
모든 고행은 이 사랑의 불꽃을 점점 치열케 하는 수단으로서만 뜻이 있는 것이다. "
하고 말한 사실로써도 명백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이 기간에 구약과 신약성서를 모두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었고
그 심원한 도리를 깊이 깨달을 수가 있었다.
전후 6년에 걸쳐 고행을 한 다음, 요한은 이런 엄격한 생활에 자기 몸이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때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레시오는 그가 학덕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란 것을 알고
그에게 부제의 성직을 주었다.
지금까지 겸손에 숨겨 있던 요한의 성덕과 학식은 촛대위에 놓여진 촛불과도 같이
찬란하게 근방 일대는 물론 먼 나라에까지 비추게 되었다.
그는 부제로서 주로 자선, 박애의 방면에 활약하고 또한 저술 방면에도 우수한 업적을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4년후 주교는, 신품을 받기에 부당하다고 고집하던 요한을 사제직위에 오르게 하고
안티오키아의 대성당의 주임 설교가로 임명했다.
[ICON]JOHN CHRYSTOSTOM. Russian.XVII c.
이와 같이 되어 그의 무비(無比)한 웅변은 자유자재로 발휘할 수가 있게 되어,
먼저, 6년간의 수양 시대에 수시로 쌓아놓은 성서에 대한 지식은
소위 금구(金口)에서 무한히 솟아나는 샘과 같이 콸콸 솟았으며,
신자들에 대해 훈계하고 혹은 권면하고 혹은 위로함으로써 유감없이
선도(善導)의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리고 거의 성 바오로 사도가 다시 태어나지나 않았는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이 학덕 겸비한 성인의 이름은 널리 사방에 퍼졌던 것이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그다리오가 서거하자
, 황제 알가디오의 재상인 오이도로피오는
겸손되이 그에게그 후임이 되어 주기를 원하며,
그로 인하여 일부러 황제의 마차를 보내는 등 특별한 예의로써 그를 안티오키아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모셔왔다.
그러나 이 큰 명예가 그에게는 수난의 길의 시초였다는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제4세기에 일어난 아리우스파의 이단은
교회 내에 해독을 많이 끼쳤고, 성직에 있는 자들까지도
그 해독에 침범되어 사도 시대의 열렬한 신앙과 소박한 정신을 상실하고,
사치생활로 흐르며 냉담하는 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평소 엄격한 수도 생활에 습관이 된 요한은 이것을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적어도 자기의 주교좌인 콘스탄티노플에 있어서 만큼은 그러한 악페의 개혁을 결심하고,
호화스러운 모임을 가진다던가 화려한 저택을 건립하는 대신에,
여행인의 숙박소나 병자의 수용소를 건립하고 행동으로써 모범을 나타내었다.
San Giovanni Crisostomo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그의 이러한 행위는 악습에 젖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성인을 공격하고
주교, 사제 중에서도 성인에게 불만을 가진이가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요한은 다른 사람에게 훈계할 것이 있으면 사정없이 훈계했고,
궁전내의 여관(女官)에 대해서도 거리끼는 바가 없었고,
황후 에우도시아에게 까지도 어떤 과부의 재산에 관한 문제로
직언(直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황제나 황후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단에 가담한 교직자나 유력자의 모함이 성공되어 그를 수도에서 추방하게 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것은 전에 대단한 환영으로 이 도시의 대주교로 받아들일때에 비하면
참으로 비참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성인 자신도 현세의 영광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필연코 느겼을 것이다.
그가 치욕을 당하자 갑자기 대지진이 일어나고, 황후에게도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으므로
에우도시아는 이것이야말로 천벌이라고 생각하고 무서워하며
자기 잘못을 후회하고 성인을 다시 불렀으나, 다시 황후의 기념비의 제막식 때
요한이 너무 소란하게 제사를 지내는데 대해 주의시킨 것을 근거삼아,
재차 그를 수도에서 먼 아르메니아로 추방하고 말았던 것이다.
성인은 체포되려고 할 때 자신의 주교좌 대성당에서 최후의 기도를 올리고 나서,
"나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길을 달렸습니다.
나는 이제는 다시 여러분들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최후로 나는 여러분들이 가끔 나를 위해 간단하 기도나마 바쳐 주기를 원하는 바입니다"하고
비통한 고별사를 신자들에게 남기고,밤중에
멀고 먼 이역 땅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ICON] JOHN CHRYSTOSTOM.Modern, unknown.
성인이 처음에 유배간 곳은 인기척 없는 구그소라는 산중이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서간을 보내어 착한 신자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며 신앙을 위해 진력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박해자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그는 또다시 적적하고 기후가 나쁜
흑해의 해변가 폰투스의 코마나라는 곳에 유배 가게 되었다.
성인은 그곳으로 가던 도중 지금까지 쌓이고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돌발하여
,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아! 하느님이시여, 만사에 있어서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하는 최후의 말씀을 남겨놓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리운 하늘의 고향으로 떠났던 것이다.
때는 407년 9월 14일이었다.
그 후 천 5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성인의 육체는 비록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의 금구(金口)에서 말한 불멸의 말씀은 지금도 서적위에 남아 방황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길을 비추어 주는 횃불이 되고 있다.
그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고, 비오 10세에 의해
설교자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ICON] JOHN CHRYSTOSTOM.
Modern American.Matthew D. Garrett.
황후에 대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직설적인 비방에 대해 어떤 처벌을 내릴 것인가를 토의하기 위해
동로마 황제의 법정이 개정되었을 때 다음의 가능성들이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1.그를 감옥에 넣는다.그러자 그들은 말햇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도할 기회를 갖고 그가 항상 바랐던 대로 주님을 위해 고통을 받을 것이다."
2.그를 추방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3.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러면 그는 순교자가 될 것이고주님께 가려는 그의 열망을 만족시킬 것이다."
즉 그 어느 것도 그에게 처벌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그는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4.죄를 짓게 한다.
"세상에는 그가 대단히 두려워하고 온몸으로 미워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죄가 그것이다.
그러니 그가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이 오직 죄뿐이라면 여러분의 힘은 비할 데 없이 클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며- 구엔 반 투안 주교님 글 중에서.-
[ICON]JOHN CHRYSTOSTOM. Modern Greek
[ICON] JOHN CHRYSTOSTOM.
Constantinople.1350-1400.
[ICON] JOHN CHRYSTOSTOM.
Holy Transfiguration Monastery (Boston) (XX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