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모니카(331-387년)는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크리스찬 부모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으나
외교인 남편 파트리치우스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는데,
아우구스티노와 니비지우스 그리고 페르페투아가 곧 그들이다.
모니카는 370년경에 남편과 사별하고, 맏아들의 개종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 당시 아우구스티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하던 중에 마니교에 심취 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띠노의 회개를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했다.
기도 생활로 자신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덕행으로 그것을 빛나게 함으로써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로마까지 쫓아갔고, 386년에는 밀라노까지 갔는데,
거기서 아우구스티노가 크리스찬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그녀의 한을 풀었던 것이다.
성녀 모니카는 아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크리스찬 어머니상의 모델이요,
기혼 부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387년 오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우구스티노는 젊었을 적에 마니교를 믿었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모니카는 그런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들 때문에 늘 애태우며 노심초사하는 모니카에게 성 암브로시오가 했던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녀는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아주 유명하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축일:12월7일,인창동성당게시판790번,1509번.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하기까지 어머니의 속을 무척 썩였는데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한번은 그가 고향인 북아프리카에서 로마로 가면서 어머니를 따돌리려고
출항 시간을 거짓말로 알려 주었다.
그러자 모니카는 다른 배를 잡아타고 그를 쫓아왔다.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노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귀찮을 정도로 아들을 따라 다녔다.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를 따돌리고 자기만의 원을 그렸지만,
그때마다 모니카는 더 큰 사랑의 원으로 아들을 품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www.ofmconv.or.kr)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Lib. 9,10-11: CSEL 33,215-219)
영원한 지혜를 찾읍시다.
그녀가 이승을 하직할 날
우리는 모르는 채 당신만이 아시던 그날 - 이 가까워 왔을 때,
정녕코 그것은 당신의 그윽한 손길로 마련된 줄 아옵니다만 우연히도
그와 나는 단 둘이서 창문에 기대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 맞은 쪽에 집안의 정원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 곳은 오스티아 티베리나! 지루하고 고달프던 여행 끝에 속간을 멀리한 우리는
거기서 배를 타려고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둘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즐겁기만 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잊고, 눈앞의 일에만 열중하고
우리는 진리이신 당신의 어전에서 더듬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성자들의 영생,
"눈에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고,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은"
그 미래의 생활을 우리는 차라리 마음의 입을 벌리고 당신께 있는 생명의 샘,
그 샘물의 하늘스런 흐름을 목말라했사옵니다.
꼭 이 말 이대로는 아닐망정,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오나 주여, 당신은 아시나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던 그날,
말하는 동안 이 세상은 그 온 가지 쾌락과 더불어 하찮게만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
그랬더니 천주께선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이 말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런 지 닷새가 다 못 가서 아니,
더래야 얼마 못되어서 그는 열병으로 눕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앓던 어느 날, 실신하여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바삐 가서 보니 이내 정신을 회복하고는 나와 내 형이 곁에 있는 것을 익히 보더니
무엇을 묻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디 있었더라?" 그는 다시 눈을 들어 슬픔에 당황하는 우리를 보고 말했습니다.
"어미를 여기다 묻어 다오."나는 말문이 막히고,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내 형은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차라리 고향에서 돌아가셔야 마음이 편하지, 남의 땅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찌푸린 얼굴로 나무란 다음,
나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보아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어서 또 우리 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몸뚱이사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들 말거라.
한 가지만 너희한테 부탁한다. 너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 다오."
어미는 간신히 이런 말로 그 뜻을 전하다가 뚝 그치고,
치열해 오는 증세 때문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축일:8월28일. 게시판607번,1336번
Saint Monica - VERROCCHIO, Andrea del.Panel. S. Spirito, Florence
성녀 모니카의 평소 환경은 잔소리가 심한 아내,
모진 며느리,절망적인 부모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 같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들은 그리스도이었던 그녀를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 있는
그녀 집에서 함께 살던 이교도인 파트리치오와 결혼을 시켰다.
파트리치오는 격렬한 성격에 방탕하기까지 했으나 자신을 반성할줄 아는 사람었다.
그는 아내의 자비심과 동정심을 비난했으나 항상 그녀를 존경했다.
모니카는 심술 궂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모니카의 기도와 모범은 마침내
그녀의 남편과 시어머니를 그리스도교에 귀의시켰다.
그녀의 남편은 영세한 지 1년 후인 37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모니카에게는 유년기를 넘긴 세 자녀가 있었다.
그 중 맏이인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유명하다.
파트리치오가 운명한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17세였으며,
카르타고의 수사학 학생이었다.
모니카는 자기 아들이 마니교도가 되어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슬퍼했다.
얼마 동안 아들이 집에서 먹고 잠자는 것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아들이 신앙을 되찾는 확실한 환상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면서 아들 가까이에 머물렀다.
사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원하는 것보다 휠씬 가까이에 머물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29세에 로마로 수사학을 공부하려 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도 함께 가기로 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어머니에게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하러 선창에 간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로마로 가는 배를 탔다.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계교를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로마에 도칙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밀라노를 향해 떠났음을 알았다.
비록 여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모니카는 그를 만나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니카의 영적 지도자였던
성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모든 일에 있어 그의 충고를 따랐고
그녀의 제2 본성이 되어 있던 몇 가지 행동을 포기하는 겸손을 가졌다.
모니카는 타가스테에 있었을 때와 같이
밀라노에서 신심 깊은 부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육을 받고있는 동안 끊임없이 아우구티누스를 위해 기도했다.
387년 부활절에 성암브로시오는 아우구티누스와 그의 친구 몇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얼마 후 아우구티누스와 모니카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니카는 자신의 삶이 곧 끝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아우구티누스에게 "얘야,이 세상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내게 남겨진 일이 무엇이며, 왜 내가 아직도 이 지상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 고 말하였다.
그녀는 곧 병이 들었고, 죽기 전 9일 동안은 심하게 고통을 받았다.
우리가 모니카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아우구티누스가 쓴 고백록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즉석 요리와 즉석 치료와 즉석 신용 등의 시대에 살면서
시간을 요구하는 일에는 인내심이 거의 없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도 즉각적인 대답을 원한다.
모니카는 인내의 상징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그녀의 기도는 강인하고 잘닦인 그녀의 성격과 어울려
그녀의 격정적인 남편과 심술 궂은 시어머니,
뛰어났지만 제멋대로인 아들 아우구티누스를 개종시켰다.
모니카가
북아프리카에서 밀라노로 갔을 때, 그녀는 새로운 사실을 보았다.
그것은 토요일의 단식처럼
그녀가 평소에 지켜 왔던 관습중의 몇 가지가 밀라노에서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켜 온 관습에 대해 암브로시오 성인에게 물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대답은 "나는 여기 있을 때는토요일에 단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로마에 있다면 나는 단식합니다.
당신이 특별한 곳에서 발견하고 관찰한 대로 교회의 관습과 규율을 따르고 항상
그들과 똑같이 행하십시오."라는 것이었다.
Death of St Monica (scene 13, south wall)-GOZZOLI, Benozzo
1464-65,Fresco, 220 x 230 cm,Apsidal chapel, Sant’Agostino, San Gimignano
어느 날 신앙심이 깊은 과부 요안나
샹탈이 품행이 방정치 않은 아들의 영혼의 구원을 염려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제8편을 읽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말을 듣고 읽어보니 거기에는 역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청년 아우구스티노를 위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몇 년 동안이나 기도를 계속한 끝에
그녀의 소원이 풀어져 자식이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수덕에 힘써 매우 위대한 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요안나는 이에 탄복하고 노력에 노력을 하며
성녀 모니카를 본받았다고 한다
이런 경건한 자모의 거울인
성녀 모니카는 332년 아프리카 북쪽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양친은 신심이 두터운 명문 출신이었으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모니카가 어렸을 대에 주로 그녀의 교육을 담당한 것은 독실한 노부인으로서
다소 엄격했지만 매우 충실한 여자였다.
어린 모니카는 선량한 성격을 지닌 재미있고 온순한 아이로서
기도나 성당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남달랐고 특히 병중에 있는 빈민에게는
따뜻한 동정의 손을 펴 가끔 자기의 음식물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때도 있었다.
또한 그녀는 용감스런 순교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 가족 중에서
누가 순교자의 이야기만 하면 언제나 열심히 듣는 편이었다.
이와 같은 성격으로 보아 동정으로 일평생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야말로
모니카에게 적합한 성소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양친은 그녀를 결혼시키려고 결정했으므로 그녀는 온순히 부모의 뜻에 따랐다.
상대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파트리치오라 하는 이교인이었다.
그는 가난한데다 나이도 모니카의 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으로
난폭하고 걷잡을 수 없는 한량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젊은 아내를 사랑했던 것 같았으나
후에 마음이 변해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모니카에게는 큰 고통이었는데 게다가
시어머니마저 까다로운 성격으로 매사에 모니카를 괴롭혔던 것이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자신의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최후에는 승리를 얻어
남편과 시어머니를 회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었다.
이리해서 우선 그녀의 아름다운 태도에 감복하여 신앙을 갖게 된것은 시어머니였다.
그 후 남편 파트리치오도 모니카의 일상 생활에 감명을 받아 행동을 고치며
종교 이야기에도 점차 귀를 기울이게 되어 마침내 세례를 받고
신앙심이 깊은 신자가 되었다.
모니카는 세 자녀를 낳았다.
그 중 두 자녀인 나비지오라는
남아와 페르페투아라는 여아는 어머니를 닮아 탄복할만한 아이였으나
다만 장남인 아우구스티노는 오랬동안 그녀를 괴롭힌 불효자였다.
그의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성질은 이미 소년 시대부터 나타났다.
그는 카르타고의 학교에 있을 때에 신앙을 져버리고 못된 향락에 빠졌으며,
또 오래지 않아 마니교에 들어갔다.
이런 일이 안 어머니 모니카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아들의 학교 성적이 우수하다는 점은 그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이대로만 나간다면 아들의 앞길에는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남편 파트리치오도 죽어
모니카는 모든 가사를 도맡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노의 품행이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를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도리어 부드러운 태도로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남몰래 눈물을 끊임엇이 흘리며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는 아들의 죄의 보속으로 고신 극기를 행하고, 가난함 중에서도 될 수 있는 한
자비를 베푸는 사랑스런 마음가짐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의 일이다. 아들을 생각하다 참지 못하게 된 모니카는
타가스테의 주교를 방문하고 자기 고민을 털어 놓았다.
주교께서는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말하는 모니카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안심하십시오. 그런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될 수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녀는 그 말씀을
천상으로부터 받은 대답으로 생각하고 더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아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다.
카르타고에도 갔다가 이탈리아의 밀라노에도 갔다.
그녀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정으로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로 있었던 성 암브로시오의 강론을 아우구스티노는 가끔 들으러 갔다.
그러는 동안에 성스러운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효험이 겨우 나타나게 되어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아들 위에 내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직접 암브로시오를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두뇌가 명철했던 주교는 즉시 이 청년의 영혼 상태를 간파하고
온화한 태도로 일일이 확증을 들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해 주었다.
아우구스티노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의 마음은
대단히 감동되었으나 아직 자기 거취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을 때
거룩한 이집트의 은수자들의 전기를 읽게 되고 그 고행의 생활에 매우 감동되어
"이 사람들이 한 것을 어찌 난들 못할 것이냐!"하고 부르짖었다.
그의 마음은 이제야 안정되어 즉시 교회의 품으로 들어왔다.
바라고 갈망하던 것이 마침내 실현된 것을 본 어머니 모니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는 세상에 바랄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고 이렇게까지 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눈물과 더불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 개종한 후 모니카는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스티아에서 중병에 걸려
급히 달려간 아우구스티노와 그 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때는 387년 5월 4일이었고, 그녀의 나이 56세였다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홈에서 www.osakore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