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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님 말씀] 나는 착한 목자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 강론)

Berardus 2021. 8. 24. 07:0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

 

2021. 08. 21(토) 11:00 성모당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탄생하신 지 20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200년 전에 태어나셨는데

김대건 신부님보다 한 5개월 빠른 3월 1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3월 1일에 이곳 성모당에서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시복을 위한 기원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저는 이 두 분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두 분이 남기신 편지들을

이번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김신부님 집안의 천주교 신앙은 증조부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1738~1814) 비오께서

1814년 12월 1일에 충남 해미에서 옥사하셨고,

작은할아버지 김종한(金宗漢, ?~1816년) 안드레아께서는

1816년 12월 19일에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치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은 지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서 복자로 시복되셨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가족은 거듭되는 박해로 인하여

고향 솔뫼를 떠나 유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27년 정해 박해의 여파로 서울 청파(靑坡)를 거쳐서

용인 한덕동(寒德洞,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에 살다가

골배마실(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12)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소년 김대건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소의 꿈을 키웠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소년 김대건은 열다섯 살 되던 1836년

모방 신부님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중국 최남단에 있는 마카오로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학식만이 아니라 신덕과 용덕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두 번이나 국경을 넘어 잠시 입국한 바가 있습니다.

1842년 12월 29일에 의주 변문을 통해 1차 입국을 하였고,

1844년 3월 8일에는 훈춘을 거쳐 2차 입국을 하여

조선의 사정을 살피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1843년 1월 15일에

중국 요동성 백가점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계획대로 12월 23일에 출발하여

나흘 후 아무런 장애 없이 변문에 도착하였습니다.

변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다가 굉장히 큰 무리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가는 조선 임금님의 사신 일행을 만났습니다

. 하느님의 안배로 그 일행 중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의 연락원이 저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저도 그를 모르고 그 역시 저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그에게 신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고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따라가면서

우선 조선에 계신 신부님들의 안부부터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의하면 신부님들은 종교의 이유로 살해되었고

2백여 명의 신자도 처형되었는데 그들 대다수가 지도급 인사였다고 합니다.

저희 형제 토마스의 부모도 살해되었는데 부친은 곤장으로,

모친은 칼로써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 역시 많은 고난을 겪고 부친은 참수되었으며

모친은 의탁할 곳 없는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 집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여섯 번째 편지 중에서 1843년 1월 15일)

이 편지에 나오는 김 프란치스코는

포항 청하 출신으로서 한양에 가서 신자가 된 후

천주교 밀사로서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박해가 끝난 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와 증언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참조 1884년 5월 8일, 5월 24일)

이런 분들의 수고와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103분의 성인들을 우리가 모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김대건 신학생은 1844년 12월 15일에

중국 길림성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 당시에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일은

공부보다는 조선으로 가는 안전한 길을 개척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부제님은 조선 교회의 밀사의 도움을 받아

1845년 1월 1일에 조선에 입국하였고 1월 15일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김대건 부제님이 서울에서 1845년 3월 27일자로

리브와 신부님께 쓰신 편지(열 번째 편지)를 보면,

자신이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엄중히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만 8년이 넘어서 조국에 돌아왔는데 왜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사실 그것을 알렸을 경우 두 사람 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하루빨리 중국에 계시는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안전하게

조선으로 모시고 와야 하는 일이 긴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부제님은 배를 한 척 구입하고

11명의 교우들을 모집하여 4월 30일에 제물포항을 출발하였는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나 온갖 고생을 하고

한 달 여만의 항해 끝에 중국 땅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페레올 주교님께서는 이러한 김대건 신부님의 용기와 추진력 때문에

김 신부님을 신뢰하고 좋아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김대건 신부님은 8월 17일에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8월 31일에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풍랑을 만나 바로 오지 못하고 떠내려가다가

제주도의 차귀도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배를 다시 고쳐서 조선으로 올라오는데 10월 12일에야

충청도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여 조선 땅에 잠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김대건 신부님은 어렵게

조선 땅에 들어와서 숨어서 사목을 하시다가

이듬해인 1846년 5월에 중국에 남아있는 선교사들을 모셔올

방도를 찾기 위해 연평도와 백령도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순위도에서 6월 5일에 그만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맙니다.

그래서 황해도 해주 감영에 갇혔다가 한양 포도청으로 이송되어서

많은 심문과 고초를 겪고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김대건 신부님이야말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사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감옥에서도

편지를 쓰셨는데 세 통이 남아있습니다.

음력으로 1846년 6월 8일자 편지는 중국에 남아있는

여러 신부님들을 대상으로 쓰셨는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

잘 있게. 이후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그리고 내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혹독한 모든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 안녕히 계십시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조선 선교지의 교황 파견 선교사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이 편지에서도 나타나듯이 김 신부님께서는 사제로서,

그리고 선교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순교의 열망과 각오를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김 신부님께서 감옥에서 쓰신

두 번째 편지는 페레올 주교님께 쓰신 것입니다.

자신이 체포되는 과정과 심문받았던 내용들을 적고 있습니다.

이번 희년의 주제어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입니다.

이 말은 이 편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관장이 ‘당신이 천주교인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스무 번째 편지 중에서, 1846년 8월 26일)

김 신부님께서 쓰신 마지막 편지가

스물한 번째 편지로서 유일하게 한글로 쓰신 편지입니다.

‘교우들 보아라.’로 시작하는데 문장 한 마디 한 마디에

천주께 대한 사랑과 교우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편지의 마지막 단락을 묵상하면서 이 강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잘 있거라.”

(마지막 회유문, 1846년 8월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