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 of St Stephen, King of Hungary - BERNINI, Gian Lorenzo
Bronze.Cathedral Treasury, Zagreb
8월 16일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노
Saint Stephen of Hungary
St. Stephen the Great
Santo Stefano di Ungheria Re
St.Stephanus Hungariae, Rex. C
Esztergom (Ungheria), ca. 969 - Buda (attuale Budapest), 15 agosto 1038
Canonized :1083
Stefano = corona, incoronato, dal greco
이교도로 태어난 그는 10세에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9세기에 다뉴브에서 침입해 온 잔인한 약탈자인 마자르족의 족장이다.
20세에 그는 지셀라(Gisella)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황제가 된 성 헨리코의 누이동생이다.
*성녀 지셀라 축일:5월7일,성 헨리코 축일:7월13일.게시판1272번
스테파노가 아버지를 계승했을 때,
그는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나라를 그리스도교화했다.
그는 이교도 귀족들에 의한 일련의 반란을 진압했고,
마자르족을 하나의 강한 국가 집단으로 결합시켰다.
성인은 자신의 왕국을 거룩한 성모님께 봉헌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의를 베풀고 교리를 가르쳤다.
베네딕도 수도원의 도움으로 로마 전통의 교루를 설정하여
교회 재건에 놀력하고 온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는 교회 조직을 수립하고
또 자신이 교황에게서 왕의 칭호를 받기 위해 로마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1001년 크리스마스에 왕위에 올랐다.
스테파노는 교회,사제,가난한 이를 돌보기 위하여 십일조 제도를 수립했다.
사람들은 10개 마을을 단위로 교회 하나를 지어야 했고, 사제 한 사람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과격하게 이교도 풍습을 제거하고
성직자와 종교에 봉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에게 결혼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1031년, 그의 아들 에메리코가 죽자 그의 여생은 후계자에 관한 논쟁으로 한층 더 비참해졌다.
그의 조카들은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성 에메리코축일:11월4일)
그는 103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083년에는 그의 아들과 함께 그레고리오7세 교황으로부터
성인 품에 올랐으며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교회는 전세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싫든 좋든 간에 지역문화에 따라 항상 영향을 받는다.
순수한 그리스도교란 없다. 즉 멕시코 그리스도교,
폴란드 그리스도교,필리핀 그리스도교등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헝가리의 영적 수호자이며 국가적 영웅인
스테파노의 삶에서 명백히 알 수있다.
성덕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이다.
사랑은 가끔 궁극적인 선을 위하여 엄격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공격하셨지만,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죽으셨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서에서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근친 상간의 죄를 진 사람들을 파문했다.
어떤 사람들은 무가치한 동기를 가지고 십자군이 되었지만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숭고한 열정을 가지고 십자군으로 싸웠다.
어리석은 전쟁을 겪은 후인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 동기의 복잡성에 대해 더욱 깊은 이해를 하게되어
신체적인것이든 무언의 것이든 어떤 종류의 폭력 사용도 회피한다.
이것은 건전한 발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절대적 평화주의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따금 악마는 무력에 의해서도 격퇴된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교회는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조화는 우연한 사정으로,
언제나 아무런 곤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경험이 증명한다.
이런 어려움들은 반드시 신앙생활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신앙을 더 정확히,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정신의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과학,역사학,철학 등의 새로운 연구와 발견은 새로운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
이 새로운 문제들은 실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며 신학자들의 새로운 탐구도 요구한다."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62항)-
성 스데파노가 자기 아들에게 보낸 권고문에서
(Cap.1.2.10: PL 151, 1236-1237, 1242-1244)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귀담아 듣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보다 충고하고 독려하며 명하는 바는 이것이다.
네가 맡을 왕직의 품위를 높이고자 한다면 열성과 정성을 다해
사도적인 가톨릭 신앙을 간직하여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신 모든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며,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이 너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도록 해야 한다.
네가 만일 그 신앙을 간직하지 않는다면 진정코 너는
그리스도인이라고도 또 교회의 자녀라고도 불리 울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궁전에서 신앙 다음으로 교회가 두 번째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 교회는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씨 뿌려지고 그분의 지체들
특히 거룩한 사도들과 교부들에 의해 옮겨 심어져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온 세상에 퍼져 나갔다.
이 교회는 언제나 새 자녀들을 낳고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이미 오랜전통을 지니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 왕국의 교회는 세워진 지 얼마 안되는 나이 어린 교회이다.
따라서 이 교회를 조심스럽고도 성실하게 보호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이 베풀어 주신 선물을
네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파괴해 버리고 없애 버리면 안될 것이다.
내 마음의 기쁨이요 후손들의 희망인 내 아들아, 너에게 권고하고 명한다.
만사에서 모든 이에게 자애심을 보여 주어라.
가족, 친지나 황태자들이나 귀족이나 부자나 너의 국민들만이 아니라
외국인들이나 너에게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너그러이 대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것은 너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억압받는 모든 이들에게 동정심을 베풀어라.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자비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의 본보기를 언제나 명심토록 하라.
세력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력 없는 사람들도 참을성을 가지고 대하라.
잘될 때 교만해지지 않고 역경에 처할 때 실망하지 않도록 굳건한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께서 현재와 후세에 너를 높여 주시도록 네 자신을 낮추어라.
중용지덕을 지니도록 하여라.
어떤 사람이건 너무 지나치게 처벌하거나 단죄하지 말아라.
온유한 사람이 되어 정의를 거스르는 것을 피하여라.
성실히 처신하고 누구에게도 수모를 주지 말아라.
정결한 사람이 되어 죽음의 충동인 사악한 유혹을 피하라.
이와 같은 것들이 왕관을 씌워 주는 덕행들이다.
이런 덕행이 없다면 이 지상에서 제대로 왕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영원한 나라에 도달하지 못한다.
성인들 중에는 왕후(王侯)출신도 많은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성인 중의 한 분은 헝가리의 왕 성 스테파노이다. .
당시의 헝가리는 아직 그리스도교를 몰랐고,
오스트리아와 독일 원정에만 급급하여 933년 및 955년의 두 번에 걸쳐 대패를 당했다.
헝가리에 그리스도교가 비로소 전래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으며,
우선 국왕 체살 자신도 그리스도교를 믿기는 했으나 완전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아들 와이에는 매우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으므로
헝가리가 그리스도교국이 된것은 실로 이 분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스테파노는 와이에의 영세 이름이다.
아버지 체살은 997년에 서거했는데, 임종때 국내 중신들을 모으고
자기의 계승자로 와이에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이에 충성을 다할 것을 간곡히 유언했다.
일동은 숙연하게 그의 말씀대로 할것을 맹세하고, 그 후 와이에를 국왕으로 받들었다.
스테파노는 어려서부터 그의 성덕의 일면을 보였다.
그의 깊은 신앙은 전국민이 그리스도교를 믿도록 노력한 데서도 엿보이는 것이며,
그의 인내와 유화함과 견인 불발(堅忍不拔)의 모든 덕은 오로지 그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더구나 그는 교양이 높은 분이며 성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정신을 기울여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도 정의의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일어났다.
즉 왕이 그리스도료를 국교로서 공포함에 반대해 2, 3명의 영주(領主)들이 반란을 기도한 것이다.
스테파노 왕은 우선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바치고 특히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과
성 루치오의 전구를 간구하고 난 후 출정해 대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그는 패군의 장병에게도 대단히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려 번 칼을 들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그는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가능한 한 평화로이 해결하려 했다.
당시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2세의 여동생 지셀라(Gisella)를 왕비로 삼고
서로 격려해 신심과 수덕에 매진했으며,
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하고 빈민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그의 특별한 주보는 성모 마리아였다. 왕은 전국민이 성모를 공경하도록 장려했으며,
성모 승천 대축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성녀 지셀라 축일:5월7일,성 에메리코 축일:11월4일(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
스테파노는 사실상 그때까지 국왕이라는 정식 칭호는 갖지 못했다.
그래서 교황 실베스테르 2세는 그의 포교상의 공적을 참작해
비로소 정식으로 국왕의 칭호를 수여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선사했다.
그 왕관은 그 후 대관식 때마다 사용되었고, 현재는 유일한 국보로서 보존되어 있다.
왕이 된 그는 더욱 정치에 열심해 그 나라는 나날이 번성해 갔다.
스테파노는 위엄 있는 한 나라의 국왕이면서도 매우 겸손하여,
복장은 소박한 것을 택하며 빈민에게도 손수 선물을 나누어 줄 정도였다.
때로는 불량배에게 붙들려 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스테파노는 이런때에도 조금도 분개하지 않고 도리어 무도한 그들에게 사과까지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온화한 왕은 누구에게든지 친절했다.
사람, 특히 성인들이 누구나 다 마찬가지로 겪었듯이
스테파노도 시련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왕은 평화를 사랑했으나,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피치 못할 사정이 전후 세 번 있었다.
세 번의 전쟁 중에 왕자는 다 전사하고 남은 것은 다만 에메리코라는 태자 하나 뿐이었다.
에레리코는 덕이 높고 생활이 성스러워 부왕의 계승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라 하여
스테파노는 대단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자기보다 7년이나 앞서 1031년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 아들이 무덤에서 기적이 계속 일어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에메리코도 현재 성인으로서 존경받고 있는 분이다.
스테파노는 말년에 이르러 더욱 국정을 정리하는데 힘썼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중병에 걸려 병석에 오래 눕게 되었으나, 그 병고를 잘 참아 이겼다.
임종이 가까움을 안 왕은
중신과 주교들을 소집하고 그의 생질인 베드로를 그 계승자로 정한 뒤
여러 번 동정 성 마리아의 성명을 부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때는 1038년 8월 15일, 마침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헝가리에서는 지금도 스테파노 왕께 대한 존경이 대단해,
1938년에는 900주년 기념제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는 1083년에 그레고리오 7세로 부터 시성되었고, 유해는
부다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