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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성 식스토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 / 성 가예타노 사제 / 복자 아가탄젤로 순교자

Berardus 2021. 8. 6. 14:57

 

 Sixtus II-BOTTICELLI, Sandro.1481.Fresco, 210 x 80 cm.
Cappella Sistina, Vatican

 

8월 7일
성 식스토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

St. Pope SIXTUS II
Saint Sixtus II and his companions
San Sisto II e compagni Papa e martiri
(Papa dal 30/08/257 al 06/08/258)
Born : Greek
Papal Ascension : 30 August 257
Died : beheaded on 6 August 258 in a cemetery on the Appian Way,
Rome, Italy
Canonized :Pre-Congregation
Sisto = variante di Sesto

 
성 식스또는 257년에 교황 성 스테파노를 계승하였다.
이때 황제 발레리안은 크리스챤을 박해하는 첫번째 칙령을 내렸다.
258년 군사들이 크리스챤을 습격했을 때, 식스또는 무덤 속에 있었다.
식스토 교황은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지하동굴에서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도중에 4명의 부제들과 함께 잡혀 참수당했다.
그 당시에는 로마의 무덤들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삐아에 있는 성 갈리스또 묘지에 안장되었다.
식스또와 함께 체포된 사람은 부제 성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뇨 그리고 스테파노이다.
그리고 이때 함께 있던 2명의 부제
즉, 펠리치시모와 아가비도는 교황 식스또와 함께 같은 날에 순교하였으므로,
로마 순교록에는 같은 날을 축일로 정하고 공경한다.  
성 라우렌시오는 4일후에 순교했다.


집회의 자유는
언제나 독재자들이 국민에게 허용하지 않은 자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발레리아노 황제는 257년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첫 법령을 선포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갖는 것도 금했다.
식스토 교황은 1년 동안 교황의 지위에 있으면서 공동 묘지로 사용하던 지하 동굴에서
미사 성제를 거행하다가  4명의 부제와 함께 붙잡혀 참수 당했다.
함께 있던 2명의 다른 부제들은 같은 날 순교했고, 성 라우렌시오 (8월10일)는 4일 후에 순교했다.
 
식스토는 재임 기간 동안 이교도의 섭歌?유효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이교도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는 희랍 정교의 처사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다.
식스토는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 성 치프리아노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식스토는 오류에 젖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내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했으며
자신은 진리를 꿋꿋이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마침내 오류가 최종적으로 단죄될 때까지 다른 교황들도
 식스토와 같이 행동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던 카타콤베에 관해서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내려온다.
카타콤베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무덤이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식스토 2세 교황은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불시에 들이닥친 로마 군사들에 의해 순교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무덤을 가장 위대한 예식에 사용하였다.
그들은 죽음에 들러 싸여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믿고 기뻐하였다.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인 이야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 붙들어 매는 끈이나 집착을 끊어 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기적인 욕망과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것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이 가득찬 카타콤베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St Sixtus Ordains St Lawrence-ANGELICO, Fra
1447-49, Fresco, 271 x 197 cm.Cappella Niccolina, Palazzi Pontifici, Vatican

성 치쁘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ist. 80: CSEL 3,839-840)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멸망하지 않고 월계관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이 박해의 폭풍에 눌려
이 경황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므로 형제에게 즉시 답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경건한 생활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천상의 영광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로마에 보낸 사신들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불확실하고 모순되는 여러 소문만 떠돌기 때문에
우리에 관해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 이 사신들을 통해 확실히 알고 싶었습니다.
 
사태의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에 칙서를 내렸습니다.
이 칙서에 의하면 주교와 사제와 부제는 즉각 사형에 처하라는 것이고,
원로들과 저명한 인사와 로마의 기사들은 자기 지위가 지니는 특전을 상실하
고 재산을 압수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재산과 특전을 몰수당한 뒤에도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계속 고백한다면 목을 베겠다는 것입니다.
부인들은 재산을 압수당하고 유배형에 처하며,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전에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건 현재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건
재산을 압수당하고 투옥되어 황제의 소유지에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또 지방 총독들에게 보낸 우리에 대한 편지의 사본을 그 칙서에 첨부시켰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이 편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는 변함이 없고 순교 앞에서의 우리의 각오는 확고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에서 영원한 생명의 월계관을 받으리라는
 확신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씨스또와 그의 네 부제들이 8월 6일 묘지에 있을 때 치명했다는 소식을 알려 드립니다.
더욱이 로마의 집정관들이 이 박해를 무자비하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혐의를 받은 사람이 그들 앞에 끌려 오기만 하면 처형되고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께서 이런 사실들을 다른 주교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권고의 말씀으로 어디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튼튼히 하고
이런 영적 투쟁을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각자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는 것 보다 불사 불멸을 생각해야 하고,
열렬한 믿음과 전력으로 주님께 헌신하며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기뻐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멸망하지 않고 월계관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 안에서 내 내 안녕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 치프리아노(카르타고) 주교 순교자 축일:9월16일,인창동성당게시판643번.1366번.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8월10일.게시판131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8월 7일
성 가예타노 사제

Saint Cajetan
St. Cajetan of Tienne
San Gaetano Thiene Sacerdote
(Vicenza, ottobre 1480 - Napoli, 7 agosto 1547 )
Born :October 1480 at Vicenza, Italy as Gaetano dei Conti di Tiene
Died :1547 at Naples, Italy
Beatified :8 October 1629 by Pope Urban VIII
Canonized :12 April 1671 by Pope Clement X
Gaetano = nativo di Gaeta, dal latino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차에서 태어났다.
파도바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법률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성인은
36세에 서품을 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일생동안 헌신했다.
 
그는 테아티노회라는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당시의 부패된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다.
베네치아와 나폴리 지방에 이 수도회를 파급 시키는 데 노력했다.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가예타노도 평범한 삶을 살았으며 처음에는 법률가로서,
후에는 사제로서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다.
그는 36 세에 서품을 받고 곧 로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이 단체는 동정과 자비를 위해 헌신하는 회였다.
그는 42 세 때 베네치아에 불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다.
비첸차에서는 가장 하류층의 남자들로만 구성된 평판이 나쁜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문을 손상시킨 사람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러 마을을 다니며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찾아내어 도와주었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요구는
’책임자와 구성원들’이 병들어 있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와 3 명의 동료들은,
개혁의 최선책은 사제의 정신과 열정을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함께 테아티노회로 알려진 수도회를 세웠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후에 교황 바오로 4 세가 됨).
최초의 장상인 그들의 주교가 주교좌를 두고 있던 테아테(치에티)에서
 테아티노회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들은 칼 5 세가 1527 년
로마를 약탈하는 와중에 로마에 있던 그들의 집이 파괴되자 베네치아로 피신했다.
테아티노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있기 전에 일어난 가톨릭 개혁 운동 중 가장 뛰어난 운동이었다.
그는 나폴리에 몬테 디 피에티(자선 기금)를 설립했다.
이는 많은 자선 단체 가운데 하나로서
저당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는 비영리적 신용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기관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고리 대금업자들에게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의 이 작은 기관은 마침내 정치적인 큰 변화와 더불어 나폴리 은행이 되었다.



가스팔 디 티에네 백작과 마리아디 포르토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첸사에서 세례를 받고, 두 살 때 그의 부친이 전사하는 불운을 안았다.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파두아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사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신심 깊은 사제들로 구성된 신애회를 재생시켰다.
1513년, 율리오 교황이 서거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비첸사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성 예로니모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베로나에서 이와 비슷한 회를 창설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후일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요한 피에트로 카라파, 바울로 콘시글리에리
그리고 보니파시오 다콜레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경우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창설하여,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턴회라 부르는 이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정규 성직자들로 구성하고,
서원을 발하며, 사목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1530년, 가예따노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가예따노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는 전당포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요한 마리노니와 함께 몬테스 피에타티스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트렌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이다.
그는 기도 생활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뛰어났으며,
1547년 8월7일 나폴리에서 운명하였고 1671년에 시성되었다.

                    


성 가예따노 사제의 편지에서
(Epist.ad Elisabeth Porto: Studi e Testi 177, Citta del Vaticano 1954, pp.50-51)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죄인이고 내 자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뛰어난 종들의 전구에 당신을 맡기고
그들이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와 그 모친께 기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는 것만큼
다른 성도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열쇠는 당신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해 주시고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먼저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지향을 언제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과 피조물이 당신을 버린다 행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 있을 때
언제나 도와주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승에서 우리는 아직 여행 중에 있는 순례자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교만으로 부풀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바른길에서 벗어나 죽음으로 달려가고 맙니다.
우리는 이땅에 살고 있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스스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것을 되찾아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께 항상 감사 드려야 하고 그분을 사랑해야 하며
그 분께 순명해야 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양식으로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렇게도 큰 은총의 선물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우리는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차지 할 영예를 얻었는데 그분을 포기하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나의 딸이여, 내가 내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당신을 위해서도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으로 얻고자 한다면 하나의 길 밖에 없습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그분의 위대한 아드님과 함께 당신께로 오시도록 간청하고 더 나아가
제단의 거룩한 성사에서 영혼의 참된 양식이 되시는 그분의 아드님을 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동정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당신께 기꺼이 주실 것이고
또 아드님은 당신을 아주 기쁘게 찾아 주시어 당신은 온갖 원수들이 잠복해 있는
이 어두운 숲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원수들은 우리가 그러한 도움에 의탁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멀리 떨어져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딸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당신의 뜻에 복종하기를 희망하면서 그분께 접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자신을 주님께 맡기어
주님께서 당신을 맞아들이시고 원하시는 대로 당신을 인도하시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것을 바라고 이것을 권고 합니다.
또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억지로라도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만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첫 회기중에 바로 중지되었다면 교회 성장에 큰 일격이 가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에타노도 트렌트 공의회에 대해 똑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가에타노가 말했듯이 하느님은 베네치아에서처럼 나폴리에도 똑같이 계시며,
트렌트 공의회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혹은 제3차 공의회)가 있든 없든 언제 어디서 나 계시다.
 
우리 스스로가 처한 환경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전능에 자신을 열어 보이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우리와는 다른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가에타노가 자기 수도회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해 나폴리에 파견되었을 때,
어떤 백작이 그에게 토지 소유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백작이 "나폴리 사람들은 베네치아 사람만큼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돈이 필요할 것이다."하자
가에타노는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두 도시에
 똑같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성인은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근위병 총지휘자였는데 성인이 두 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두 형제는 성실한 어머니 슬하에서 고이고이 자랐다.
가예타노는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될 결심으로 열심히 공부해 24세에 이미 법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는 잠시 교회의 행정관으로 지낸후, 1516년 그의 나이 36세에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로는 예전보다 더 열성을 내어 자기 성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 이듬해 성탄 절, 그가 말구유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아기예수를 그의 품에 안겨 주셨다.
그때부터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1518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시는 어머니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시중해 드린 가예타노는
그 후 오랫동안 비첸자에 머물러 있으면서 병자를 돌보기 위한 형제회를 세웠다.
또한 불치의 환자만을 수용하는 요양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항상 환자들과 지내고자 햇다.
그러다가 장상의 명령대로 베로나에서 베네치아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또한 병원을 세우고 손수 그 간호에 종사했다.
그의 친척들은 그런 사업을 대단히 반대하며 그에게 갖은 비난을 퍼부었으나
가예타노는 아무 말도 없이 겸손과 인내로 모든것을 받아들였다.
 
그를 만난 사람,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은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경건한 모습에 감화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그가 미사 성제를 올릴 때의 모습은 마치 천국에서 움직이는 성인과 같았으며
그의 강론의 힘은 가장 완고한 죄인이라도 능히 움직일 수 있을 힘을 가졌었다.
 

                                               


가예타노는 인류의 구원 사업을 더욱 크게 넓히기 위해 성직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하고
이런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고 심사 숙고하여 열심히 하느님의 가르치심만을 구했다.
그러면서 이 계획을 법학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는 이를 기뻐하며 격려해 줄 뿐 아니라 제일 먼저 회원이 되어 주었다.
 
그 시대의 유명한 주교 가라파가 이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 얼마 안되어서였다.
이분도 역시 성인이시지만 성격 상으로는 가예타노와 아주 다른 분이었다.
대단한 정력가로서 아무리 활동을 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분이며, 대단한 정치적 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가예타노에게 있어서는 수도회의 발전상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수도회 설립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교황의 인가였는데
교황은 새 수도회의 인가를 대단히 주저했으므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가예타노를 아는 많은 명망가들의 간절한 청원도 있고 더욱이 가라파 주교의 덕망을 보고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4년 이 회를 인정했다.


수도회의 창립자는 가예타노지만 명칭은 테아틴회(Theatines)라 했다.
이는 겸손한 가예타노가 그 회의 초대 총장인 가라파 주교의 거주지인 테아티노를 따서
그 회를 불렀기 때문이다.
가라파 주교 역시 그 회의 창립자인 가예타노를
회의 창립자(사부,師父)로 섬기기를 서슴지 않았던 겸손한 분이었다.
 
회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하느님께 대한 흠숭의 예식을 성대히 하며 순명, 정결, 청빈의 서원을 지키며
 자신을 성화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는 곳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게 되어 각 지방에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엇다.
 
그럼으로써 가는 곳마다 그의 덕망이 나타났고 그의 열렬한 기도로 때로는 기적도 일어났다.
가예타노는 쟁론을 조정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명한 재판으로 당사자들을 언제나 감복시켰다.
 
 
이런 성인에게도 고통이 없을 수는 없었다.
1547년 나폴리 지방에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가예타노에게 불의 부당한 비방과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마침내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담당 의사의 모든 치료에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다른 의사를 또 초청하려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가예타노는
"저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의사 한 분 이면 충부합니다"하며 거절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편안함을 찾지 않았다. 오직 열렬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고,
동료들에게는 자기의 부덕함을 깊이 사과하고
그들의 후의(厚意)를 감사하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547년 8월 7일이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1671년에 시성되었다.
 

 




8월 7일
복자 아가탄젤로 순교자


Beato Agatangelo Noury Martire
Blessed Agathangelus of Vendôme , OFM Cap. MM (AC)
(Tours, 31 agosto 1598 - Gondar, 7 agosto 1638 )
Born:31 July 1598 near Vendome, France
Died:stoned to death or hanged with the cords of their own robes (records vary)
on 7 August 1638 at Dibauria, Abyssinia
Beatified:23 October 1904 by Pope Pius X; formal recognition on 1 January 1905
Canonized :pending
 
  
복자 까씨아노 순교자
Beato Cassiano Lopez-Netto Martire
Blessed Cassian of Nantes, OFM Cap. MM (AC)
(Nantes, 15 gennaio 1607 - Gondar, 7 agosto 1638 )
Born:1607 at Nantes, France
Died :stoned to death in 1638 in Abyssinia (modern Ethiopia)
Beatified :1904
Canonized :pending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방돔에서 태어났고,
 21살 되던 해에 르 망의 카푸친회에 들어갔으며,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뽀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회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630년에 카푸친회는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이들 중에 낭뜨의 카시아노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카시아노는 즉시 아카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가 이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로 갔다가,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0세는 이 두 분이 17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이콘]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6세기.루브르박물관,파리
 
목판에 그려진 이콘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콥트 교회에 기원을 두고있다.
(이콘.신비의 미-장긍선신부편저.참조)
이집트 정교회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이콘 가운데 하나로서,
구세주 예수님과 곱틱(Coptic)교회의 수도원장 성 메나(Mena)와의 친교가 잘 담겨져 있다.
(정웅모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여러분들은 나의 벗들입니다.
이 이콘을 자세히 보면 메나스라고 전해진 성인 곁에 나란히 서서 그의 어깨에
다정히 당신 오른 손을 얹고 계시는 예수님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계십니다.

메나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함께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런데 메나스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체험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길에서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말재주도 없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체험도 부족합니다’라고 거듭 고백합니다.
그런 메나스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예수님께서 정겹게 어깨를 마주하시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서,
가장 소중한 친구로서 예수께서 늘 함께 계심을 체험합니다.
"혹,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혹 어미가 어린 젖먹이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메나스의 나약한 믿음이 하느님 안에서 굳건해 집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분께서 함께 가시기에 자신의 약점이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함께 가시니 힘이 납니다.
(소공동체길잡이2003년7,8월호에서)

요한 15,11-17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콥트교회 Coptic church
이집트인의 콥트 국민교회.
639∼640년 아라비아인 지배아래 성립,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밑에 속한다.
교회법은 위사도서간(僞使徒書簡), 고대 공의회문서, 비잔츠, 시리아 법률자료, 여러 주교의 지령에 따라 성립.
교의상 가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황의 통치권교도권상의 수위(首位)에 관한 점이다.
전례는 콥트어를 사용. 신도수 약 85만명, 콥트인 프로테스탄트 5만명, 가톨릭 귀일교회 신도 3만명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
이슬람권 이집트에 압도적으로 많은 주요 그리스도교 교회.

7세기 아랍인이 점령하기 이전의 이집트 민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아이지프티오스’(아랍어로는 qibt, 콥트는 서구화된 발음임)라 불렀다.
그뒤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아이지프티오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자
이 용어는 소수 종교집단인 그리스도교도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5세기 이래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그리스도의 단성만을 인정하는 견해) 교회에 속했으며,
스스로를 이집트 교회라 불렀다.
19, 20세기에는 콥트 정교회로 자칭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콥트인들 및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동방정교회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4, 5세기에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451)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콥트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중단했다.

■콥트 성가 Coptic chant
7세기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 전 그리스도교에 귀화한 고대 이집트 후손들의 예배음악.
아랍어 ’qibt’에서 유래한 ’콥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ios(’이집트인’ 또는 ’이집트어’)의 전와어(轉訛語)이다.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로 이집트인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계속 믿던 소수인들에게만 이 명칭이 적용되었다.
함셈어족인 콥트어는 997년에 아랍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콥트의 예배용 언어로만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콥트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리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콥트의 의식이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콥트인들은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은 근래에 와서 필사 악보와 예배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한국브리태커 온라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