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ry of St Eusebius - MENGS, Anton Raphael.
1757, Fresco.Chiesa di Sant’Eusebio, Rome
8월 2일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 주교
Saint Eusebius of Vercelli Sant' Eusebio di Vercelli Vescovo (Sardegna, inizio IV secolo - Vercelli, 1 agosto 371/372 ) Born :283 at Sardinia Died :1 August 371 Canonized :Pre-Congregation Eusebio = uomo pio, timorato di Dio, dal greco
사르디니아의 어느 순교자 집안에서(283년?)
태어난 에우세비오는 로마에서 교육받고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345년 사르데냐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피에몬테에 있는
베르첼리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
교구 신자를 성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체 안에 살면서
엄격한 미덕을 쌓아가는 성직자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기의 원칙에 따라 교구 성직자 공동체를 만들고,성직자 생활과 수도자 생활의
일치를 시도했던 서방교회의 첫번째 주교로 꼽히는분이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함께 최초로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아리우스 이단이 없었더라면 많은 초기 성인들의 일생을 서술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두루 전파하고, 자기 교구에 수도 생활의 기초를 놓았다.
에우세비오는 교회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교회를 옹호한 사람이다.
신앙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유배형을 받아 많은 고난을 겪었다.
리베리오 교황은 가톨릭과 아리우스 이단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회의를 소집하고자,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그를 파견했다.
에우세비오는 비록 가톨릭 신자가 수적으로는 많지만 아리우스 이단이 우세한 것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밀라노를 방문했다.
그는 아타나시오의 유죄 판결에 반대하고 니체아 신경 선포를 무기한 연기했으며,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모든 이가 그것에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에게 압력을 가했지만, 에우세비오는 여전히 아타나시오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정치 권력이 교회 결정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황제에게 상기시켰다.
처음에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던 황제는 그를 팔레스티나로 추방했다.
그곳에서 아리우스 이단자들은 그를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4일을 굶긴 후 놓아 주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다시 박해를 계속했고 그의 유배 생활은 소아시아와 이집트로 계속 이어졌다.
새로운 황제의 명령으로 마침내 베르첼리 주교좌로 되돌아오게된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올바른 신앙의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일했다.
아타나시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 참석했으며 마음이 흔들렸던
주교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했다.
그는 371년 92세에 자기 교구에서 평화로이 선종했다.
에우세비오주교는 프와티에의 성 힐라리오와 함께
일생동안 아리우스 이단과 싸우는데 정열을 쏟았던 정통파 주교로 기억된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 예로니모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가 앞서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 주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있다.
미국 가톨릭 교회는 때때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
특히 가톨릭계 학교의 분리 원칙에 대한 부당한 해석으로 궁지에 몰렸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다행스럽게도,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서
하나의 교회로 공인된 이래 교회에 가해지던 엄청난 압력으로부터 자유롭다.
적어도 오늘의 우리는 다행히도 황제를 교회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청하는 교황이나
동로마와 협상하도록 황제에게 파견된 교황 요한 1세,
또는 교황 선거에 미치는 왕의 압력에서 벗어나 있다.
교회가 어떤 특정인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목 활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특히 같은 본당에서 일하는 사제들의 공동 생활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로써 사도적 활동을 촉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도들에게
사랑과 일치의 모범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30항)-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2,1,3-2,3; 10,1-11,1: CCL 9,104-105. 109)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고 믿음을 지켰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간절히 바랐던 대로 여러분이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받자,
천사의 손에 의해 다니엘이 있는 곳으로 운반된 예언자 하바꾹처럼 나도 갑자기
땅 극변으로부터 운반되어 가 여러분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의 편지를 받고 그 안에 담긴 여러분의 거룩한 심정과 사랑의 증거를 보았을 때
눈물과 기쁨의 정이 뒤섞여 읽고 싶어도 눈물이 가려 제대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기쁨과 눈물의 두 정감은 각각 갈망에 대한 이러한 성취를 보고 사랑의 의무에서
서로 앞서고자 할 때 그 두 가지 정감은 모두 필요 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며칠 동안 지나면서 여러분과 대화하고 있다고 상상하여
내 지난날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충실한 신앙과 사랑과 선업을 보고 온통 기쁨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그렇게도 큰 추억에 젖어 있을 때 나는 흡사 유배지에 있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있는 듯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의 신앙을 보고 기뻐하고 그 신앙이 가져다 주는 여러분의 구원을 보고 기뻐하며
또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먼 곳까지 뻗쳐 나가는 여러분의 선업을 보고 기뻐합니다.
잘 자라고 열매를 풍성히 맺어 농부가 도끼로 잘라 내지도 않고
불에 던져 버리지도 않는 그런 나뭇가지로 접목하는 것처럼,
나 역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나의 육신적 봉사뿐만 아니라
내 생명까지 바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다만 몇 시간이라도 보초병이 다른 데에 바쁘도록 해주시고,
또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내 고통의 소식 대신에 안부의 편지를 가지고 가게 해주시도록
하느님께 간구하면서,힘든 가운데 여하튼 이 편지를 다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온갖 주의를 기울여 믿음을 지키고 화목을 보존하며 기도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온 세상을 통해서 고통당하는 당신 교회를 해방시켜 주시고
포로 된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도 중에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나는 또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간절히 청합니다.
여러분 각자는 이 편지를 각 사람에게 문안하는 편지로 생각해 주십시오.
전에 했던 것처럼 여러분 개개인에게 쓰는 것을 이번에는 할 수 없이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모든 형제들이여, 그리고 자녀들이여,
남녀 노소 관계없이 이 문안에 만족하기 바라며,
나를 사랑하는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도
나의 인사를 전해 주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순교자라고 하면 그리스도교를 믿기 때문에 형벌을 당하고,
마침내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이를 말함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에우세비오는 순교자가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그를 순교자 반열에 둔것은 그 성인이 교회를 위해 순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특수한 형벌로 순교에 상응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라고도 불리는데,
같은 이름의 성 교황, 성 사제며 또 유명한 역사가 에우세비오와 명백히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는 3세기 말엽 지중해에 있느 사르디니아 섬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모두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는데 아버지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박해때 잡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 도중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그 어머니 레스지타는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가서
당시의 교황 에우세비오 성인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고 한다.
그의 본명을 에우세비오로 한 것은 그 날을 기념하고
또한 그 교황의 성덕을 본받기 위한 어머니의 의도에서였던 것이다.
에우세비오는 신심이 두터운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더욱 경건한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낼 생각을 하고, 또 사제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성 실베스테르가 교황이었던 당시 로마 교회내에서 독서직을 했고,
후에 북 이탈리아의 베르첼리 시에서 성직 임무를 맡았으며,
그곳에서 교회 일반의 성스러운 표양으로서의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는 그곳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교로서의 공적은 성 아우구스티노나 성 바실리오 같이
사제들 간에 공동 수도 생활을 장려한 것이다.
즉 그는 베르첼리 시의 모든 성직자와 공동생활을 하며 서로 절차 탁마(切磋琢磨)하며,
다른 도시, 마을에도 신부가 두 명 이상이면 공동생활을 장려하고,
서로 협조하며 완덕에 나갈 것을 희망했다. 그 결과는 매우 좋았으며, 그
런 생활의 실천을 많은 훌륭한 성직자를 양성했고, 교회에 공헌한 바도 매우 컸다.
그동안 로마의 동부에서는 아리우스 이단이
세력을 펴고 타오르는 불꽃같이 서부 지역에까지 미쳤다.
그리해 콘스탄시오 황제까지 이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으므로
교황 리베리오는 매우 염려하여 에우세비오와다른 주교를 황제에게 보내어
라벤나에서 전국 주교 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얻었으나,
그 회의는 불행하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에우세비오는 아리우스파 이단에 가담하라는 황제의 명을 거절했으므로,
주교좌에서 추방되고, 소아시아의 스키토폴리스에 유형당했는데,
그곳의 주교는 파느로필로라는 이단자였다.
그는 고령이나 신분에 아랑곳없이 에우세비오를 대했고,
그것에 대한 에우세비오의 육신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었다.
그래서 에우세비오는 파트로필로를 비꼬아 나의 옥사장이라고 할 정도였는데,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감수 인내했다.
에우세비오는 얼마 후 다시 이집트의 사막 지대로 호송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콘스탄시오 황제가 서거한 뒤 그 후임 율리아노 황제는 유형된 주교,
신부를 모두 소환했으므로, 그도 정든 베르첼리 교구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도중에 알렉산드리아에 들러 성 아타나시오를 만났고
, 여러 주교들과 모여 신앙 문제에 대해서 토의 하고,
그 후 소아시아 각 지방을 순회하며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했는데,
드디어 베르첼리에 발을 딛자,
그곳 성직자, 신자 일동은 일제히 그를 환영했다.
에우세비오가 오랜간만에 본 교구에 돌아와보니, 자신의 부재중에도
수하 사제들의 신앙에 대한 열의는 그대로였고,
또 작은양들이 이리떼인 이단에서 무사함을 보고
매우 안심하여 하느님께 눈물겨운 감사를 바쳤다.
이때 이미 에우세비오의 나이 80세의 노령이었으나,
그 후 8년 동안 더 맡겨진 양을 잘 돌보다가 371년에 하느님의 나라로 떠났다.
그는 유형생활 중에 여러가지 교리에 관한 서한과 저서를 다수 집필했는데,
이 모두 오늘까지 교회의 보물로써 보관되고 있다.
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St.Athanatius (295-373) 알렉산드리아
인창동성당게시판 1137번.1742번.
1월 13일
성 힐라리오 주교 학자
St. Hilarius. 프와티에. 367년
인창동성당게시판869번.1565번.
아리우스주의
라틴어 Arianismus 영어 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 삼위 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 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 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동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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