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Sant' Alfonso Maria de' Liguori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Saint Alphonsus Liguori ST. ALPHONSUS MARIA De LIGUORI (Napoli, 1696 - Nocera de' Pagani, Salerno, 1 agosto 1787) Born:1696 at Marianelli near Naples, Italy Died:1787 at Nocera Venerated:1796 by Pope Pius VI Beatified :1816 Canonized:1839 by Pope Gregory XVI Alfonso = valoroso e nobile, dal tedesco(noble ready; battle ready) 윤리 신학의 수호자, 고해사제의 수호성인
이탈리아 성 알퐁소(1696-1787년)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태어나 불과 16세의 나이로
교회법과 민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던 유능한 젊은이였으나,
어떤 중요한 사건에서 깨달은 바 있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1726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731년 첼레스테 수녀의 환시가 계기가 되어 ’구속회’라는 수녀회를
그리고 2년 뒤에는 남자 수도회를 창설하지만 많은 난관에 봉착하여 지내던 가운데
1734년에 두번째 창립을 맞이함으로써 비로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인근 지역을 다니며 순회 설교 사도직을 수행하였지만, 글을 더 쓰고 싶어 했으며,
신자들 가운데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설교와 저술에 시간을 보냈다.
특히 윤리신학의 대가로 존경 받았다.
1762년에는 산타 아가타 데이 고티의 주교로 임명되나
곧 수도회로 돌아가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구속회의 양분을 기도하는 세력과 싸우다가 노체라에서 운명하였다.
성 알퐁소는 윤리신학과 수학에 관한 놀라운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윤리신학은 얀세니즘과 반 성직주의를 극복하면서
올바른 윤리관을 정립한 저서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의 신심서적인 ’마리아의 영광’은 성모 신심이 돋보이는 저서로 꼽히며,
교황 비오 10세로부터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의 저서에서
(Tract. De praxi amandi Jesum Christum edit. Latina, Romae, 1909, pp.9-14)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영혼의 온전한 성성과 완성은
우리 하느님이시고 우리의 최고선이시며
우리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완성시키는 온갖 덕행의 유대요 보호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랑을 마땅히 받아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네가 나를 사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생각하라.
네가 태어나기 전, 세상 그 자체마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노라.
내가 존재할 때부터 너를 사랑해 왔노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선물을 볼 때 그의 마음이 이끌린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 선물로써 사람의 사랑을 당신께로 이끌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이끌고자 할 때 쓰는 그 끈으로
곧 사랑의 끈으로 나도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이끌고 싶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온갖 선물들을 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는 사람에게 당신 모상대로 된 영혼을 주시어
기억력과 지성과 의지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에게 또 오관을 갖춘 육신을 주시고 그를 위해 하늘과 땅과 거기에 있는 피조물을 지어내셨습니다.
또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시어 모든 피조물이 사람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이렇게도 많은 선물에 감사하며 그 보답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아름다운 피조물들을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 사랑을 얻으시고자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모두 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당신 외 아드님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 모두가 죄로 인해 죽고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또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너무도 큰 사랑으로 사랑하신 나머지
사랑하는 외 아드님을 보내시어,
그가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게 하시고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하시고자 당신 아드님을 아끼지 않고 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선,
즉 은총과 사랑과 천국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선은 당신 아드님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언명하였듯이
윤리 신학은 성서로써 더욱 더 철두 철미해져야 하며,
돈독한 그리스도교적 사명의 존귀함을 드러내고
온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를 보여 주어야 한다.
1950년, 비오 12세가 윤리 신학의 수호자로 선포한 알퐁소는 그 성명에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얀센파의 엄격함에 맞서 윤리 신학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그가 죽은 후 1세기 동안 60회나 간행된 그의 윤리 신학서는
사제와 고해자들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만일 어떤 율법주의와 최소 한도주의가 윤리 신학에 슬며시 끼어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관용과 온건을 지닌 알퐁소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나폴리 대학에서 그는 16세의 나이에 만장 일치로 민법과 교회법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곧 사도직 활동을 위해 법률 활동을 포기했다.
사제로 임명되어 신자들의 고해를 들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단체를 만들어 교구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는 1732년, 레뎀토리스트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 수도회는 공동생활을 하는 사제와 수사들로 이루어져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헌신하고,
주로 시골 농부들을 위해 대중 선교 활동을 한다.
얼마 후 그는 한 사람의 평수사를 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첫 동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이것은 장차 일어날 일의 한 징조였다.
그러나 그 수도회는 해체되지 않은 채 계속되어 17년 후에는 비록 문제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알퐁소의 위대한 사목적 개혁은
성직자와 고해 성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 당시 성직자와 고해 성사 제도에, 현란한 미사 여구 대신에 단순함을,
얀센파의 엄격주의 대신에 친절함을 가져 온 개혁이었다.
26년간 교구 전지역에서 설교하고, 나폴리 왕국을 두루 여행했다는 것과 함께
그는 작가로서도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주교가 되는 것을 사양하고자 무척 애를 썼으나 66세에 주교가 되었으며,
그 후 즉시 교구내에 철저한 개혁을 단행했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가장 큰 슬픔을 맛보았다.
그것은 예수회의 해산후에도 자랑스럽게 계속되어 온 레뎀토리스트회가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회칙을 인정받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알퐁소는 그들이 공동 재산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한 국가 관리가 레뎀토리스트회의 고위 장상과 공모하여 회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늙은 데다가 다리까지 저는 보기 훙한 모습의 알퐁소는
자기가 배신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그 문서에 서명했다.
그때에 교황은 교황령에 있는 레뎀토리스트회 회원들을 교황 관할권내에 두는 한편
나폴리에 있는 사람들애 대한 알퐁소의 권한을 박탈하였다.
레뎀토리스트회의 지부들이 통합된 것은 알퐁소가 죽은 후였다.
71세에 그는 불치의 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구부러지는 고통을 당했다.
목을 조금 바로 하게는 되었지만 목이 굽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의 턱이 가슴을 눌러 상처가 날정도였다.
그는 마지막 고통의 18개월을 망설임,공포,모든 미덕과 신앙 계율에 위배되는 유혹에 시달렸으며,
틈틈이 무아경에 빠졌을 때만 빛과 위안을 얻었다.
알퐁소는 뛰어난 윤리 신학자로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또한 교회 신학과 교리 신학 부문에서도 훌륭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마리아의 영광’은 걸작 중의 하나이며,
’축복받은 성찬에의 초대’는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40판이나 간행되었다.
성 알퐁소는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더 잘 다룬 실제적인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일생은, 그리스도교적 삶이 문제와 고통, 오해와 실패가 소용돌이치는 것임을 인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실제적인’ 본보기이다.
그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 줄곧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인이 된 것이다.
한번은 알퐁소의 설교가 끝난 후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잊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십니다."
일찍이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독을 갖고 있는 것과 독에 중독된 것은 다르다고 했듯이
신중한 척 하는 것과 신중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신중한 척 하는 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신중한 척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가끔씩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에 집착하여 불같이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들은 화가 나면 남들도 자기와 같은 판단을 내리고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중한 것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벌컥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넓은 안목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구속주회의 창립자인 알퐁소는 무척 신중했지만 신중한 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주 나폴리의 극장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을 보러 갔다.
하지만 그 극장에서는 뮤지컬에 음란한 장면을 많이 삽입시켰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항상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했던 알퐁소는 가장 먼 좌석표를 사서 음란한 장면이 나올 때면
안경을 벗고 음악만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심한 근시안이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이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구속주회는
1732년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1696-1787, 주교, 윤리신학자이며 고해사제의 수호성인)
성인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인 활동 수도회로서 현재 약 6000여명의 회원들이 로마에 총원을 두고
78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 수도회
Congregatio Sactissimi Redemptoris
공식 명칭은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입니다.
라틴어로는 Congregatio Sanctissimi Redemptoris,
영어로는 Congregation of the Most Holy Redeemer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를 줄여서 ’구속주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알폰소 성인은 1696년, 나폴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이미 16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가진 실패를 모르는 법률가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법관으로서의 영화를 버리고 사제로서의 삶을 택하게 됩니다
(1726년).
열정적인 사제였던 그는 도시의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의 바깥 산 기슭에서 양치는 가난한 농부들을 만났을 때,
당시 나폴리에 많은 사제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 하나 도시 밖의 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들,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알폰소 성인은 구속주회를 창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루가4,18) 하신 복음 말씀을 따라
나폴리의 서민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참다운 삶을 살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에 전념하여 ’
윤리신학’을 비롯한 여러 책들을 저술하였고 특히 윤리 분야의 대가로 존경받았다.
산 아가타 데이 고티의 주교가 되어 말년에 건강 상의 이유로 주교좌를 물러나기까지 열정적으로 일하였다.
후에 수도공동체로 되돌아와 1787년 캄파니아의 노체라 데이 파가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구속주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함으로써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회헌 1항)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당에서의 신자 재교육과 영성지도,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영성지도와 피정지도,
그리고 기타 다양한 선교사업을 수행함으로써,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Our Mother of Perpetual Help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께 드리는 구일 기도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를 저희에게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신뢰와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부르나이다.
온갖 아쉬움과 위험과 고통 중에 드리는 자녀들의 청원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이 유래 깊은 성화 앞에서 구일 기도로 청하는 저희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어
그 힘있는 전구를 깊이 체험하게 해주소서.
자애로우신 어머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 안에 실천하게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이 저희 안에 날로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원의 힘을 얻게 됨을 믿게 하시고,
믿는 이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저희의 삶이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해주소서. 아멘.
구속주회홈에서 www.cssrkr.com
1730년부터 90년에 이르는 동안
사제로서 유명한 분으로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가 있다.
이분은 1696년 9월 29일 이탈리아의 나폴리 부근 마리아넬리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재산은 보통 정도에 불과했다.
알폰소는 일곱 자녀 중에서 장남이었다. 알폰소의 탄생 후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예수회의 성인 같은 신부가 와서
그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90세까지 오래 살아 주교가 되어서
하느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은 후에 어김없이 적중되었다.
알폰소는 하느님의 보호아래 정성어린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성체 성사와 성모께 대한 신심이 두터웠다.
학교 성적도 매우 우수했으며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는 법학을 전공해
일찍이 법학 박사의 학위를 획득했다.
그는 장래에 정치가가 되려 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성품인 그는
사람들이 신망과 호평을 받았으며,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빈민을 돌보며 병자를 방문했다.
그러니 가는 곳마다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와 같이 환했으므로
매우 만족한 그의 아버지는 하루 속히 그를 결혼시키려 햇다.
그러나 알폰소는 그것을 쉽게 승낙하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반대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시련을 주셨다.
그것은 어떤 중대한 소송 사건인데 그의 생각은 꼭 승소였다.
그런데 우연히 중요 서류의 미비 관계로 그만 패소 당하고 말았다.
이를 대단히 수치스럽게 생각한 알폰소는 법정을 나오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방문을 잠그고
이틀 동안이나 단식을 하며 울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여러가지로 달래서 다시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돌변했다.
그는 변호사직을 버리고 그 후부터는 신앙의 길로만 나아갈 결심을 했다.
어느 날, 불치병자만 수용하는 요양소를 방문했을 때의일이다.
알폰소는 돌연 지진과 같은 강한 충격을 두 번이나 받았다.
"세상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하는 확실한 이런 엄숙한 말씀을 들었다.
그는 그 말씀을 따라 곧 수도원을 결심을 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그것을 반대했고,
적어도 그런 결심의 이행을 나중으로 미루도록 권고했으나,
서품준비 하기를 열망하는 그의 원의 만은 아버지인들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준비를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며 고행을 했고 틈만 있으면
아이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곤 했다.
1726년 마침내 알폰소는 바라던 신품을 받게 되었다.
그의 독실한 인품을 아는 신자들은 그의 미사에 참여하고 그의 강론을 듣고
그에게 성사를 보기위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가 애정으로써 순순히 설교하는 말씀에는 설복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어떤 사제회에 입회해 사방을 다니며 묵상회를 열었다.
포디아에서 묵상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알폰소가 열심히 묵상회원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즉 그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 성상이 미소를 띈 사건이다.
이러한 일은 그의 일생에 있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또 한가지 사명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수녀가 묵시를 받은 것인데 그것은 많은 신부들이 알폰소를 둘러싸고 묵상회,
특히 배우지 못한 이들을 상대로 묵상회를 여는 광경이었다. 그 수녀는 이 이야기를 알폰소에게 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충분한 조사도 없이 어떤 환상만을 믿고 그대로 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학자들과 유지들이 그에게 수도원을 창립하기를 권고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아버지와 이별하고 독실한 동료 수명과 더불어
외떨어진 깊은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그들은 엄격한 생활로써 장래활동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런 곳에도 시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간에는 그 회의 목적과 활동 범위가 기타 활동 방법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그 결과 알폰소를 야심가 혹은 고집쟁이라고 욕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의 사업은 정신 이상자의 꿈과 같다고 조소하는 이도 있었다.
성인은 역시 성인으로서의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조소 중에도 알폰소는 아무 말없이 참고 겸손으로 자기를 훼방하는 이들을 애정으로 대해주며,
오로지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게 의탁했다. 이러한 시련은 그의 일생을 통해 중단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가 타인의 존경을 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는 세 곳에 새 수도회의 수도원을 설립하는데 성공햇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 중 두 수도원은 박해로 인해 폐쇄되고 말았다. 물론 그 후에 새 수도원이 설립은 되었지만...
지금 그 수도회는 각국에 진출해 그 회원들은 오늘도 열심히 묵상회 지도자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창립자의 정신에 입각해 설교, 저서, 교수로서 전교를 하고 있다.
실지 알폰소는 일생을 통해 많은 설교를 하고 허다한 신심서와 심원한 신학서를 저술했다.
그가 교회 학자의 명칭을 받게 된 것도 실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성인은 고령에 달해 최후의 큰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성녀 아가타 대성전의 주교로, 다음 종신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중책을 물론 그는 원하지 않았으나 교황의 특별한 엄명이기에 수락했다.
어떻든 간에 그가 교황께 자기 수도회의 허가를 얻은 것은 1749년의 일이다.
그래도 나폴리 정부에서는 인가를 좀체로 내 주지 않았다.
1779년에 겨우 그 숙망을 달성하게 되었을때에는
그는 중병으로 눕게 되었으므로 일체를 타인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용이하게 인가를 얻기위해 마음대로 회칙을 변경해 버렸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고 알폰소가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정부는 그 변경된 회칙대로 인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창립자는 괴로웠다.
그 괴로움은 회원 일부가 새 회칙을 따라 분리 탈퇴함으로서 더욱 심각해졌다.
교황은 나폴리 왕국 내 수도원의 수사들을 전부 제명시켜 버렸다. 그 중에는 알폰소도 끼어 있었다.
이러한 소식들은 그에게 극도로 괴로움을 주었다.
그는 묵묵히 심중의 비애를 억제하며 겸손한 태도로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의 번민과 고통은 그 뒤에도 많았다.
게다가 그의 신병은 1787년, 그가 임종할 때까지 끊임없이 그의 육신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알폰소의 임종일은 8월 1일 삼종의 종이 울릴 무렵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졌다.
전에 그 수도회를 탈퇴한 수사들은 4년 후 다시 귀환해 본 회치대로 수도 생활에 노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알폰소는 1816년에 시복되었고, 1839년에 시성되었으며,
1871년 비오 9세 교황으로부터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알퐁소는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 마리아넬리에서 9월 21일 태어난, 궁중 범선의 선장 아들이었다.
그는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나폴리 대학교에서 교회법과 민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8년 동안 성공적으로 법을 잘 다스렸다. 즉 그는 혈기왕성한 젊은 변호사였다.
그러나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는 변호사를 포기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여,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으며, 1726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2년간 나폴리 근방을 돌며 선교사로 봉직하였고, 1년은 가르쳤다.
1730년, 그의 교수법을 지켜 보던 토마스 팔코이아 주교의 초청으로 까스뗄라마레로 갔다.
그가 스칼라에서 수녀들의 피정을 지도할 때 마리아 첼레스떼 수녀를 만났고,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그녀의 환시를 확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팔코이아 주교가 로마에서 경험한 환시와 일치하였다.
그리하여 그녀가 1731년의 환시에서 받은 규칙에 따라 그녀의 수도원을 승인하게 되니,
이로써 속죄 수녀회(Red-emptorines)가 창설되었다.
알퐁소는 1732년, 스칼라로 이주하여 속죄회(Redemptorists)를 창립하고
선교사업에 헌신하였는데,
본부는 스칼라 수녀회의 숙박소를 이용하였으며, 명예 원장은 팔코이아 주교를 모셨다.
그런데 초창기에 중대한 알력이 일어나서,
마리아 첼레드떼 수녀가 떠나가서 포찌아에 따로 수도원을 창립하고,
또 1733년에는 한명의 평수사를 제외한 모든 회원들이
그들 자신의 수도회를 세우기 위하여 떠나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지원자를 모집하여,
1734년에 빌라 데글리 스키아비에서 두 번째 창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수도회가 발전해 갔는데,
1743년, 팔코이아 주교가 사망하므로써 총회는 알퐁소를 총장으로 선출하였고,
베네딕또 14세는 1749년에는 남자 수도회, 그 익년에는 여자 수도회의 회칙을 승인하였다.
이 기간 동안 알퐁소는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설교 사도직을 열렬히 수행하였으나,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그는 팔레르모의 주교 임명을 거절하였으나,
1762년 산따 아가타 데이 고띠의 주교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성직자, 수도원 그리고 전 교구의 혁신을 계획하였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병을 얻었고 또 죽을 때까지 괴롭혀온 류우마티즘으로 마비될 때가 많았으므로,
그는 1775년에 주교직을 사임하고, 노체라로 돌아 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반 성직주의자의 기수인
마르끼스 베르나르도 따누치아와의 논쟁에 휩쓸렸는데,
따누치는 1734년 나폴리를 점령했던 스페인의 챨스 3세의 수상으로서, 나폴리를 관장하던 사람이었다.
따누치는 속죄회의 국가 승인을 거부하고, 예수회를 혐오하던 것과 꼭같이
알퐁소의 수도회를 끊임없이 위협하였다(예수회는 1767년 스페인 영에서 추방되었다).
1780년, 알퐁소는 수도회를 양분시킬 수 있는 문서에 서명해야 할 계략에 빠졌다.
거의 18개월 동안 그는 영적 위기를 접했고, 유혹에 빠지기도 했으나 이를 끝내 극복하였다.
그는 1839년 8월 1일 노체라에서 운명하였다.
알퐁소는 윤리, 신학, 수학에 관한 놀라운 저서들을 남겼다.
특히 그의 윤리 신학은 얀세니즘과 반성직주의를 극복하면서
올바른 윤리관을 정립한 저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신심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책은 <마리아의 영광>이다.
그는 1839년에 시성되었고, 1871년, 비오 10세 교황으로부터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구속주회 성인:
*성 제랄드 마젤라(어머니들의 성인)축일:10월15일.게시판701번.1422번.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축일:3월15일.게시판1660번.
홍천 수련소.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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