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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5월 2(일) [백] 부활 제5주일, 생명주일

Berardus 2021. 5. 2. 09:27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5월 2(일)

[백] 부활 제5주일, 생명주일

제1독서(사도 9,26-31)

제2독서(1요한 3,18-24)

복음(요한 15,1-8)

제자, 되어가는 사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 머물고
진정으로 노력하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열매 맺을 수 있는 것


인간의 보편적 소명은 만년 학생이자 평생 학습자가 되는 것이다.”

-(종교교육학자 토마스 그룸)-

며칠 전 여호수아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여러분이 전에 이 길을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해야 갈 길을 알 수 있을 것이오”(여호 3,4)라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너며 백성들에게 계약 궤를 따라가라고 하는 맥락입니다.

지난주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신 예수님은 오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하며 그분 뒤,

그분 옆도 아니고 그분 안에 머물라고 가르칩니다.

■ 복음의 맥락

요한 15장 1-8절이 속한 15-16장은 13-14장 주제인

‘사랑과 친교’라는 같은 주제를 더 심오하게 확장시킵니다.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요한 13,31)은 그분께 매달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그분 사이의 심오한 일치에 대해서 말합니다.(14장)

이 일치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포도나무와 가지라는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단일한 식물이며 같은 수액을,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최후 만찬이라는 상황, 향기롭고 맑은 포도주를 기억하게 하는 포도나무 이미지는 성체성사를 암시합니다. 그분 살을 먹고 그분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 분에 ‘머물고’ 그는 주님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요한 6,54-58)

■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요한 15장 4-8절에서

‘머물다’(메네인)라는 말이 여덟 번이나 나오는데 이 본문의 핵심 주제입니다.

‘머물다’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동사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표현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보이듯이 가시적인 인격체로서

예수님과 맺는 관계에만 제한되지 않고 부활한 분,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곧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분과 맺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영국 시인 테니슨은 그가 쓴

‘더 높은 범신론’(The Higher Pantheism)이라는 시에서 이 점을 묘사합니다.

“당신은 그분께 말하라. 그분은 들으시기 때문이다.

또 영과 영은 만날 수 있다. 그분은 숨결보다 가까이 계시며

손과 발보다 더욱 가까이 계시다.”

“예수님 안에 머물다”라는 말은 경이롭고 신비롭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살아가면서 되새겨야 하는 말입니다.

설명이 아니라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에서

‘그리스도 안에’를 후렴구처럼 되풀이하는데 요한의

‘예수님 안에 머문다’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바오로와 요한은 같은 체험을 다르게 전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르심을 받고

로마 교외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할 때까지 그의 그리스도 체험의 중심이자 생명,

그의 신앙을 요약한 표현입니다.

바오로는 이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표상을 사용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세례입니다.

세례는 온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신앙이 인간을 철저히 변화시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듯이 한 몸이 되는 것,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고 말하는 것,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온전히 내 삶을 이끌어가도록 그분의 힘에,

성령의 인도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준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4)

■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머무는 것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몇 년 동안 블루베리 농사를 같이 하면서 농부인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블루베리 나무인데도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당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삶을 진정하게 살아 내는 노력과 관련됩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거저 주는 은총이지만 인간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첫째, 열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간직해야 할 덕목, 성품을 가리킵니다.

열매는 가시적인 행위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그 전에 먼저 성품으로 드러납니다.

제자라는 말의 의미는 ‘배우는 사람’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제자직의 첫째 요건입니다.

함께 있으며, 그분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하며,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해 보며 점점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하느님 자녀에 합당한 성품으로 바뀌어 갑니다.

습관화된 신앙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 안에 빚어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맺을 수 있는 열매들이 다양한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도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모든 은사의 절정은 아가페,

즉 사랑, 순수하고 절대적인 자기 증여라고 말합니다.

바오로는 이 사랑의 찬가에서 온갖 영적인 덕,

심지어는 자기 재산과 목숨마저 내어줄 정도의 일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사람에 대해 묘사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며 일련의 덕을 탄생시킵니다.

인내, 아량, 선, 겸손, 비애착, 관대함, 존중, 용서, 정의, 진리, 일관성, 희망….

정말 사랑이 우리 안에서 스러져 버리면 이 고귀한 덕들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사랑에서 출발하는 덕스러운 삶은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스도에게서 항상 배우고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의 표징입니다.

그런 삶은 사도직과 선교에서 좋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교 입문 예식 때도 사용되는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 줍니다.

제자는 완성품이 아니라 ‘되어 가는 사람’,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는 것을

세월이 흐를수록 절실히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도처에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시기에

하느님과 예수님은 우리 개인,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함께 많은 일을 하기 기대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할 수 있는 힘도 줍니다. 아멘!

-임숙희(레지나)-

▲명동성당 안쪽 성모상



[한주간 전례]

2021년 5월 3일 (월)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며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복음묵상] 요한 14,6-14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명쾌한 주님의 응답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현대인에 비유되고는 하는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제자라기보다 의문이 많은 제자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질문에 온화하게 답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들의 삶은 거칠었고, 힘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좇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28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 8,32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3,16 참조).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우시기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4일 (화)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7-31ㄱ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는 요즈음입니다.

일상적이고 편안한 옷과 같은 자연스러운 평화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느끼는 나날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걱정하고, 힘들어하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믿음을 두기보다,

세속적인 것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으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다툼이 없는 상태나 외적인 안락함은 결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평화를 얻고자 하느님께 나아가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무릅니다.

이러한 머무름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을 얻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며,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며,

자신의 잘못을 기워 갚음으로써(로마 5,6-11 참조) 얻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무덤으로 온 여인들에게

“평안하냐?”(마태 28,9) 하고 물으십니다.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신 그리스도’(콜로 3,11 참조)와 함께 있는 교우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 흔한 인사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콜로 3,15 참조).


-(신우시기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5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 출신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혼란을 줍니다.

선민의식과 편견은 하느님의 구원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에 매어 놓고,

사람들을 분리하고 편을 가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유다에서 내려온 이들처럼,

잘못 이해된 신앙을 맹신하여 나의 신념과 반대되면 가짜이며,

하느님의 구원조차도 내 생각과 다르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줍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좁은 사고 안에 ‘주님을’ 가두려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기도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제자가 되어,

나를 따르며 내가 청하는 것만을 들어주는,

옛날 이야기속의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로 착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신비로운 만남과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우리를 주님과 떨어질 수 없게 하며,

그분 안에 머무르게 합니다.

선민사상이 아니라, 분리와 구분의 삶이 아니라, 용서와 호의를 통한

사랑의 삶이 우리를 주님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초대로 오늘 화답송의 시편 저자의 말은 곧 우리의 말이 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신우시기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6일 (목) [백]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5,9-11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당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속하는 데 있다.”(제27차 청소년 주일 담화문)라고 하셨습니다.

길 가는 아무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방송이나 여러 매체를 통하여 전쟁과 재해,

기아와 무관심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움의 손길이 가장 절실한 사람은 어쩌면 나의 가족,

친구 또는 성당 교우나 직장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따금 익명의 타인에게는 선행을 베풀며 돕고 애덕을 실천하면서도,

정작 가장 친밀한 가족과 형제, 친구들에게는 가깝고 편하다는 이유로

사랑과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처를 주고 미워하며

벽과 담을 쌓아 삶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 지옥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쌓아 올린 미움이라는 벽과 담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때로는 아픔을 인내하고,

용서하며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를 천국의 삶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기쁨이 충만해지게 합니다.

기쁨은 사랑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쁨과 사랑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성령의 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하느님 안에서 기쁠 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 만족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애덕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신우시기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7일 (금)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2-17

신앙에도 나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10대와 30대, 70대가 이해하는 사랑이 각각 다르듯이,

신앙의 나이 또한 사랑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태어나고, 걷고, 자라고, 집을 떠나 독립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루하루 성장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사랑을 얻고,

이해하며, 사랑의 기준에 따라 매 순간

‘예.’ 또는 ‘아니요.’라고 응답하면서 성장해 나갑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의 친구로 살다가,

어떤 때는 예수님의 종으로,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의 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분의 친구로 살지 않아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시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에서는

누가 나의 이웃 곧 친구인지 또는 친구가 아닌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한정되어 이해되던

당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느끼며,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이를 ‘이웃’ 곧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이 구체성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과 가장 먼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를 가르는 기준이 필요성이나 다른 현세적 이유는 아닙니까?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모두 가까운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과 망상, 두려움과 원망 속에 있지 말고 진실되게 사랑을 실천하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타고난 사명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명입니다.


-(신우시기 토마스 신부)-

2021년 5월 8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21

오늘 복음 환호송을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선택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도 당신처럼

적대자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에게 받으신 고통과 어려움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세상의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뽑으신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그분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녹록하지 않은 세상의

많은 어려움 속에 살면서 그분을 따르는 힘은 ‘주님과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성체송을 통하여 전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위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시어

그분 안에서 믿음이 충만하고, 희망을 넘어 희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신우시기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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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시작됩니다.
점차 푸르른 나무를 보면서 성모님을 연상합니다.
성모님의 계절인 5월에
성모님의 전구로 고객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