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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4월 18(일) [백] 부활 제3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Berardus 2021. 4. 17. 05:58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4월 18(일)

[백] 부활 제3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 3,13-15,17-19)

제2독서(1요한 2,1-5ㄱ)

복음(루카 24,35-48)


주님 부활의 증인, 우리는 당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몸을 낮춰 소통하셨고
불신과 의혹을 잠재우고 뜨거운 사랑으로 품어주셨네
주님 부활은 모두의 삶에 지속돼야 할 은총의 선물이며
어둠을 물리치고 더욱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힘이 돼주네


■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

팔뚝만한 물고기를 막 잡아 올렸을 때,

싱싱한 상태에서 즉석 회를 떠먹는 것도 맛있지만,

소금 간을 해서 구워 먹는 맛도 일품입니다.

재수가 아주 좋던 날,

바닷가에서 젊은 수사님들에게 물고기를 구워 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방법도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비늘을 쳐낸 다음 내장을 제거하고,

몸통 부위에다 비스듬하게 칼집을 냅니다.

칼집 사이에 굵은 소금을 뿌린 다음,

숯불에 천천히 구우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른 양념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노릇노릇하게 익힌 다음 접시에 담으면,

임금님 수라상 올라가던 요리 저리가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 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물고기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 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부활 후 제자 공동체에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행동을 취하셨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장난끼가 발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야, 이 겁쟁이들아!”로 시작해서,

그 자리에서 참교육을 실시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들 인생 그렇게 살지들 말어라.

결정적인 순간에 다들 36계 줄행랑을 놓고 말이야! 도망가고 숨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그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애제자

요한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도 이어졌을 것입니다.

“다들 요한 좀 본받아라! 특히 베드로 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질책하거나 공개적인 창피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산란한 제자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는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여인들, 그리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사도단에 직접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육신과 더불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못자국 난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는 광경을 통해

예수님의 완전한 부활을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느 다른 세상에 기다리고 계시다가 내려오신

다른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참으로 죽으셨다가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런 부활은

골고타 언덕 위에서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항구히 지속되는 사건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2000년 전 머나먼 곳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 안에서도 지속돼야 할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


[한주간 전례]

2021년 4월 19일 (월) [백]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6,22-29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 삶의 결정적인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뵈려고 성경 공부를 하고,

열심히 미사 참례하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만나 뵌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자들을 만나면 그 병을 고쳐 주시고, 죄인을 만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시고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다스리는 세상,

곧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자기 삶의 방향으로 정하는 것이 신앙인이 지닐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을 만나 세상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사랑의 구조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이’,

곧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구조로 보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시듯

하느님께서는 인간도 필요하십니다.

오로지 내어 주시고자 전능하시고 완벽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그토록 귀한 존재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도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서로 필요합니다.

이 사랑의 구조로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과 자연을 바라볼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이제 이웃, 자연,

세상을 향하여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내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20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6,30-35

요한 복음서 6장은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의 배경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빵의 기적은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갈릴래아 호수 동쪽 지역,

벳사이다에서 이루어집니다.

저녁이 되어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널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음 날 호수의 서쪽 지역이며 유다인들이 모여 사는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시라고 가르치십니다.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이 이교도 지역에서

유다인 지역으로 물을 건너 공간을 이동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을 연상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간 것과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기적들이 일어난 시기도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요한 6,4)였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

짐승의 희생으로 얻은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

죽음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이 죽음은 성찬례의 의미를 설명해 주며,

예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심을 빵의 표징을 통하여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7.2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군중은 의심하며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0-31).

군중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듯이,

새로운 메시아는 하늘에서 만나보다 더 큰 풍요를 주리라고 여겼기에

예수님께 더 큰 일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빵이었다면,

당신께서는 온 세상을 위한,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21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6,35-40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시자,

군중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라고 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이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날마다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리라는 세속적 욕심에 그 물을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길으러 오는 수고를 덜고 싶어 하고,

만나보다 좋은 육신의 배를 채워 줄 빵을 늘 받고 싶어 하는 욕심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로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나는 …… 이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온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께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결코’를 두 차례 반복하시며 강조하십니다.

이 ‘생명의 빵’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아 먹은 만나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신명 8,3)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만나를 먹으며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지혜 16,26).

따라서 ‘생명의 빵’은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분께 가야 하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22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6,44-51

저는 단팥빵을 보면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린 시절 마당에서 동생들과 뛰어놀고 있으면

해 질 무렵 길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맏손주 어디 있나?” 하고 저를 애타게 찾으시는 할머니 목소리입니다.

그러면 저는 놀던 것을 멈추고 곧바로 할머니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달려오는 저를 향하여 엄지를 척 들어 올리시며

“우리 맏손주가 최고지!” 하시고는 몸뻬 바지 속주머니에서

단팥빵을 꺼내시어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새참으로 나온 빵을 챙겨 두셨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맏손주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루는 맛있게 빵을 먹다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안 드세요?” “응, 나는 욕지기가 나서 안 먹어도 돼.”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느 날 단팥빵을 먹다가 할머니가 주신 빵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농사일하시느라 허기지셨을 텐데

손주에게 주시겠다는 생각으로 참으셨구나!’

그 순간 목이 메어 그 빵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하십니다.

‘내려온’이라는 단어는 과거 시제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어놓으신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셨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어린양으로서

당신의 살을 빵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살”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희생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희생과 사랑으로

당신의 살을 내어 주시어 세상에 생명을 주십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23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6,52-59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의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말다툼을 벌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이들을 군중에서 유다인으로 바꿈으로써,

이들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심을 거부하고 적대시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한발 더 나아가시어 ‘살을 먹고’

‘피를 마시기’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구절부터

성체성사의 선물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언급합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루카 22,19)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 또한 성체성사를 암시합니다.

특히 “내 살을 먹고”에서

동사 ‘먹고’는 ‘씹어 먹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먹는다는 일반적인 동사가 쓰이다가,

여기서부터 소리를 내어 씹어 먹는 행위를 강조하는 동사로 바뀝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씹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이 성체성사 안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생명을 주는 몸을 먹는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재성을 말하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참생명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희생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성제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인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의 피인 성혈을 마실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2021년 4월 24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6,60ㄴ-69

많은 유다인이 생명의 빵과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거북하고,

따를 수 없다며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유다인들뿐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따라나선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자 환호하던 이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살 수 있다고 하시자 그만 돌아서고 맙니다.

이들이 돌아선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영과 육의 대비를 보면서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사람의 마음 안에는 흙으로 빚어진 육에서 나온,

더 받고 싶은 마음, 곧 탐욕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숨에서 나온 하느님의 마음,

더 내어 주고 싶은 마음, 곧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탐욕으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관계가 서로 어긋나

이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들어옵니다.

이 고통과 죽음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드님을 내어 주십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아드님께서는

아파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들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되어 아버지께 건너가시게 되자

그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십니다.

더 받고 싶은 마음,

탐욕이 고통과 죽음을 들여왔다면,

목숨까지 내어 주는 그 마음,

사랑이 생명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내어 주신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살게 되고, 생명을 얻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내어 주는 사랑 앞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지 않는 자들’이 되어 예수님 곁을 떠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나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고단한 사랑의 길이다.

나와 함께 이 고통의 길을 걷겠느냐? 아니면 떠나고 싶으냐?’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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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찾아 왔습니다.
한 낮에도 따뜻하던 날씨가

갑짝스러운 봄 비와 함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고난과 행복이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주님의 부활과 함께 행복한 한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