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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4월 11(일) [백]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Berardus 2021. 4. 10. 05:52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4월 11(일)

[백]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 4,32-35)

제2독서(1요한 5,1-6)

복음(요한 20,19-31)

‘토마스’를 자비롭게 품어주세요

불완전한 믿음으로 가득 차
주님 부활도 의심하던 토마스 제자들은 그에게 자비 베풀며 사랑과 헌신으로 다독였네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두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세상에 “큰 은총”을 누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특히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길 것“을 천명하는데요.

모두 그분의 자비로우심 덕분에 누리는 축복이기에

오늘 교회는 주님의 자비심을 높이 기리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냅니다.

부활 제2주일을 특별히

자비 주일로 제정하게 된 배경은 예수님께서

파우스티나 수녀님께 발현하시어 부활절이 지난 다음 주일에

온 교회가 자비심 축일을 기념하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당부하신 까닭입니다.

저는 자비심 기도서를 처음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하는데요.

한창 패기 넘치던 어린 사제 시절,

어디를 가던 그곳 성당을 찾아 조배를 드린 후에 일정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낯선 성당 조배실에서 생소한 기도서를 만났는데요.

기도서에 담긴 주님의 고백이 어찌나 절절한지

코가 시큰하고 눈이 젖어 들었지요.

약속시간이 임박한 탓에 얼른 기도문을 옮겨 적고

출판사를 확인한 후에 조배를 마쳤습니다.

드디어 2000년 교황님께서 자비심 축일을 제정하여 선포하셨을 때,

큰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제 좁쌀만 한 공로가 보태졌다는 자부심이 솟구쳤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비심 축일이

어서 제정되도록 기도를 바치며 지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신이 납니다.

주님께 ‘헤헤’하며 실없는 웃음도 날리고 성모님께 ‘아시지요?

히히~’대며 모자란 아들의 헤벌쭉한 모습을 보이게도 됩니다.

그때 구입한 기도서가 낡아빠졌지만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유일 겁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상황을 살피면

토마스에게 그 ‘여드레’는 정말 힘들었을 것만 같습니다.

그날 토마스는 동료들의 들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홀로 왕따 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도 같고

그래서 더 퉁명스럽게 대했을 것도 같으니까요.

그럼에도 동료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머물러 지냈다는 게 대단하다 싶은데요.

어쩌면 토마스는 그 여드레 동안에 자신이 함부로 지껄인 말을 통회하며

홀로 자신의 허물에 가슴을 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통회가 있었기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놀라운 지혜의 고백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하필 토마스 사도가 없는 틈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까닭도

그분의 정겹고 다감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섭리라 싶은데요.

그렇게라도 당신의 자비하심을 제자들에게

‘한 번 더’ 일깨우려 하심이라 생각되는 겁니다.

때문에 그날 토마스가 진짜로 주님 상처에 손가락을 들이댈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나아가 동료들의 말을

진심으로 의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믿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동료들의 기쁨에 동조하지 못했던

토마스의 좁은 속내가 오히려 정겹고 고마운데요.

지금 당장,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갖은 의문과 의심들이 똑 닮았으니까요.

우리도 수없이 하느님의 불공평하심에 불만을 품고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의심하는 불완전한 믿음의 ‘전과자’들이니까요.

신앙을 팽개치고 싶은 의구심에 영혼이 앓기도 하고

믿음에 한기를 느끼는 것도 남 얘기가 아니니 말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도무지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갑갑해하기 일쑤이고 나를 미워하고 차별하는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말입니다.

마침내 이도 저도 성에 차지 않고 이웃의 기쁨마저 눈꼴 사납고

어느새 성당은 외롭고 속상한 곳이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뿐인가요?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상의해 봤자 고작 “하느님만 보고

사람을 보지 말라”느니 “신앙을 재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뻔한 대답만 돌아오니,

바짝 약이 오릅니다. 결국 “나도 그런 거, 충분히 알거든”

싶은 마음에 토마스처럼 팩 토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돼먹지 않은 말에

“뭔 말을 저리 막되게 지껄이냐?”며

‘몹쓸 인간’ 취급을 했다면 토마스는 그들 곁에 머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통하는 저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생각에

열불이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법도 하니까요.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미심쩍은 마음을 품어주고 다독이며

최선을 다했던 모습이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자란’ 토마스의 불신을 지적하지 않고 끼리끼리 수군대지도 않고

더 다정하게 토마스를 대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날 토마스의 불평을 ‘틀렸다’ 하지 않고 ‘다르다’고 구별하지 않았던

열 제자의 사랑과 헌신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주신 말씀의 심지라 싶습니다.

그 배려가 토마스의 발길을 꼭 붙잡았다는 고백이라 듣습니다.

자비 주일, 주님께서는 오늘,

세상을 두려워하며 희생을 미루고 사랑하기 어렵다며

마음을 꽉 잠그고 있는 우리에게 이르십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자유하라 하십니다.

부활인답게 어느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라 하십니다.

설사 ‘참’을 얘기해도 ‘제멋대로’ 판단하며 토라졌던

토마스를 품었던 열 제자의 넉넉한 마음을 닮아 살으라 하십니다.

하여 모두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한마음으로 찬미할 그 날을 고대합니다.

-장재봉 신부-

 

 


[한주간 전례]

2021년 4월 12일 (월) [백]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3,1-8

가끔 신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신부님, 도대체 왜 그러세요?”

그러면 저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변명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보고 배운 신부의 모습은

가부장적인 팔·구십년대 사회에서 사목하던 모습입니다.

눈으로 보고 배운 모습은 아주 가까이 있고,

말씀으로 배웠던 ―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

목자의 모습은 아직도 머리에만 있어 몸으로 옮겨 오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변하고자 노력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다음 질문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고 대답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엇이고,

가장 많이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보고 배운 것은 무엇이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무엇입니까?

방송이나 다른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또 성당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왔고,

그것들이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이루는 데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일까요?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가 이 땅의 부모에게 받은 모습은 벗어 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살고자 함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신앙의 완성이요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완성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세례의 삶으로 묵은 인간은 죽고 새로이 태어나도록,

사랑의 삶으로 태어나도록 노력합시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13일 (화) [백]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3,7ㄱ.8-15

어른 입교 예식의 ‘맞이하는 예식’에서

주례자와 세례 후보자들은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그대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또 유형무형한 만물의 주님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대가 오늘 세례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미 들었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으며,

형제들과 일치하여 기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신자가 되려고 행한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어른 입교 예식』, 247-248항).

우리가 성당에 다닌다고 말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무엇일까요?

요한 복음서 17장 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알다’라는 동사가 현재형이기에, 영원한 생명이란

먼 훗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그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온 마음과 온몸, 온 생애를 통하여 깨우쳐 상대와 온전히 결합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의 삶을 살고자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충만하게 참여하여 그분을 닮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요한 6,68 참조)을 듣고 지키며,

또한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요한 6,57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며 내어놓으신

헌신적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14일 (수)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3,16-2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말씀입니까?

믿는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시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내어 주시는 분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까지 내어 주십니다.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시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를 닮은 아드님께서는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찾아 만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것을 온전히 내어 주십니다.

마침내 당신 생애의 결정체인 몸을 내어 주실 뿐 아니라, 목숨까지 내어 주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그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우리는 이제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아파하는 이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께서 저를 죽기까지 사랑하심을 받아들입니다.’라는 뜻으로

십자 성호를 그어 몸에 새깁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아멘.”이라고 응답함으로써

‘저도 이웃에게 나아가 내어 주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15일 (목) [백]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3,31-36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지만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기에

당신께서 몸소 하느님 아버지와 나누신 친교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늘 복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와 마치실 때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1-22).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1요한 4,16 참조).

사랑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주시는 분이신 아버지께서 사랑을 주시려면

이를 받으실 아드님께서 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주시고자 하실 때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아드님 손에 내주십니다.

그러면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다시 아버지께 온전히 내어 드리십니다.

순수한 영이신 아버지와 아드님께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내어 주시고 또 온전히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계시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 일치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그 아드님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명을 거부하여 죽음의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2021년 4월 16일 (금) [백]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6,1-1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이방인들의 도시 벳사이다로 가십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던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요한 5,9 참조) 목격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은 빵의 기적을 체험한 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욕망을 채우는 길이 아니라, 당신을 내어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시험하시며 당신의 길을 뚜렷이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필립보가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필립보는 그 많은 돈이 어디 있으며, 그 돈을 누가 내어놓을 것이며,

그렇게 한들 턱없이 모자랄 것이라고 계산하는 세상의 논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가진 보잘것없이 적은 것으로,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논리를 보여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특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혼자 하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떤 일을 하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 주시는데,

부자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시간,

재능, 그리고 재물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이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어놓은 것을 가지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은 내어놓음,

감사의 기도, 그리고 나눔으로 이루어집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17일 (토) [백]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6,16-21

사제품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 수 있을까?

제의를 입은 채 관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 할수록 자신은 더 없어지고 두려움만 점점 커져 갔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나 저의 첫 질문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았는가?

그 말씀을 외우고 되새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가?

그렇게 성경을 다시 읽어 나가다가 ‘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병자들의 치유와 빵의 기적을 옆에서 직접 보았음에도 큰 파도에,

또 그 어둠 속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고 소리 지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고자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이 만나 주셨는데도 ‘사제품’이라는

큰 관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네가 울부짖을 때마다,

네가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마다 만나주었던 나다.

나는 살아 있는 하느님이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이 말씀이 마음속에서 울리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고,

가끔 스멀스멀 그 두려움이 피어올라 올 때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묵상하던 가운데

‘그렇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려 노력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가려는 곳,

하느님 품 안에 가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어느덧 사제로 산 지 26년이 되어 갑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시간이 가겠지요.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려고 노력만 한다면 말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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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에 접어 들면서

한 낮엔 제법 따사로운 햇볕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 아침과 저녁나절엔 쌀쌀해
옷맵시에 신경이 쓰이는 요즘입니다.
주님 부활과 함께 행복한 한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