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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0년 12월 27(일) [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Berardus 2020. 12. 27. 06:13

    [금주의 말씀 묵상]

    2020년 12월 27(일)
    [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집회 3,2-6.12-14) 제2독서(콜로 3,12-21) 복음(루카 2,22-40)
    세상의 모든 가장들, 힘냅시다. 제대로 된 제물 바치지 못한 요셉 성인, 힘든 가장의 모습 보는 듯 그러나 화려한 것으로 치장하는 것은 신앙의 삶과 거리 멀어 성가정 조건은 풍족함이 아니라 하느님과 대화하며 친해지는 것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에 교회는 하늘 아래 가장 향기로운 곳, 성가정을 기리며 온 세상을 축복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한 해를 추억하는 우리의 마음은 그리 밝지가 않은데요. 지난해의 삶들이 결코 예사롭지도 평범치도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온 세상이 참으로 독특하고 생소한 날들을 경험해야 했으니까요. 때문에 저는 지금 이 글을 통해서 이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 사랑이 오롯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성가정의 축복을 고스란히 전달하여 모든 이들의 삶에 생기가 되살아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믿음인의 찬미와 감사는 편치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래서 더욱, 아무런 조건 없이 마냥 기뻐하며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하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아기 예수님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기뻐하시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으니 말입니다. 우리 삶을 스산케 하는 모든 어둠은 빛이신 주님을 결코 이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성경은 성가정의 가정사를 세세히 들려주지 않지만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분들의 삶이 결코 특별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키운 남자, 요셉 성인의 심정이 마음에 담기는데요. 그날 요셉 성인이 봉헌한 예물, 비둘기 두 마리는 양 한 마리를 바칠 여력이 없는 가난한 이를 위한 예외 조항이었다는 사실이 괜스레 아프게 다가오는 겁니다(레위 11,8 참조). 하느님께서는 산모의 정결례를 위한 예식에서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를 바치고 속죄 제물로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바칠 것을 명하셨는데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예물을 마련했던 걸 보면 성가정의 살림살이가 결코 풍족하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는 걸 알려주니까요. 오늘도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를 배려했던 요셉 성인의 성정과 됨됨이를 깊이 추앙하며 기립니다. 하지만 그날,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하느님께 바칠 제물로 일 년 된 어린 양을 마련할 수 없었던 가장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옹색하게 작은 새 두 마리를 준비하면서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마음속 그득, 못 난 가장의 미안함이 쌓이지는 않았을까요? 문득 아내를 마구간에서 몸을 풀게 했던 일도, 아기 예수님을 추위에 떨게 했던 것도 다 자신이 못난 탓이라 싶지는 않았을까요? 스스로 기가 죽어서 말도 조심조심히, 눈길도 조심조심히 성모님과 예수님을 살피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오늘 이러한 요셉 성인의 모습에서 이즈음, 고단한 삶으로 힘에 부쳐 계신 가장들의 처진 어깨를 봅니다.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 늘 작아지는 가장의 시린 뒷모습을 봅니다. 그날 요셉 성인의 모습이야말로 홀로 모든 걸 짊어지고 감내하며 쓴 소주 한잔 들이키며 힘을 내는 우리네 아빠들의 모습이라 싶은 겁니다. ‘힘내세요’ 큰소리로 응원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성가정을 이루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더 크고 넓고 으리으리한 삶을 선망합니다. 이런저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갖기 위해서 애를 쓰며 지냅니다. 그런데요. 만약에 성가정의 삶이 그런 세상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마련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요. 성가정을 꾸리기 위한 조건이 풍족하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에 있었다면 그분들의 삶이 그렇게 옹색할 까닭이 없었겠지요. 그래서 저부터 반성하게 됩니다. 제 주위에 놓인 많은 것들, 방안에 겹겹이 자리한 이 허다한 것들을 부끄러워합니다. 이 잡다한 것들로 하느님과의 사이에 벽이 쳐진 것은 아닌지, 주님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은 아닐지, 우려합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고 구경하는 처지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염려합니다. 성경 말씀마저 지식으로 간직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철렁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의 삶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는 모습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성가정은 매일 매일 시간 시간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가 살아있는 곳입니다. 하느님 앞에 정직하고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기도의 골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평화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때문에 마구간처럼 초라해도 상관없습니다. 작은 새 두 마리밖에 마련할 수 없는 처지라 해도 문제없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께 마음의 지성소를 내어드리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수시로 주님과 대화하며 그분과 친해지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첫걸음임이며 성가정을 꾸리는 제일의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무한 긍정의 존재로 살아갑시다. 세상의 세파가 제아무리 험할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참 평화를 잃지 않는 하늘가정의 가족이 되어봅시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 주님의 평화 덕분에 “영혼이 꿰찔리는”아픔마저 튼튼한 믿음과 탄탄한 희망의 근거로 삼는 참 지혜의 소유자가 되시길, 마음 모아 축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한주간 전례] 2020년 12월 28일 (월) [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 버렸다. 이때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성대한 축일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아기 예수님 때문에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복음묵상] 마태오 2,13-18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뒤 그분의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다음의 네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별을 보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들 살해, 성가정의 무사 귀환입니다. 이 네 사건은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출생과 그 어린 시절을 비교할 때, 나름대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일관성이 있습니다. 탈출기의 처음 장들은 모세의 출생과 청년 시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는 모세와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탈출 1,16.22 참조). 그러나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고(탈출 2,1-10 참조), 청년 시절에는 이집트인을 죽인 탓에 파라오에 쫓겨 미디안 땅으로 달아났다가 그가 죽자 이집트로 돌아갑니다(탈출 2,15.23;4,19-20 참조). 이러한 모세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은 신약 성경이 쓰일 때 폭넓게 활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 1,21)이라는 예수님 탄생 예고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언제나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합니다. 출생 배경에 대한 열등감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데 빈틈없고 잔인하였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느님을 거슬러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마는 파라오와 헤로데의 비겁함을 우리는 과감히 던져 버려야 합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이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오늘 함께 나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29일 (화) [백]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복음묵상] 루카 2,22-35 예수님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올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힙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과 약혼한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그가 낳을 아기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하시며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1-33 참조). 즈카르야도 자신의 찬미가에서 세 번씩이나 하느님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실 일을 노래합니다(1,69.71.77 참조).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밤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선포한 기쁜 소식의 핵심도 ‘구원자’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2,11 참조). 루카는 이어서 시메온을 등장시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로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봅니다. 나아가 그는 이구원자께서 온 인류에게 베푸실 은총, 곧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민족들에게도 마련되었음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시메온에게 아기가 구원자로서 장차 당하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이로써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도 통찰하게 하십니다. 분명 시메온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선포합니다. 구원받을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그곳에서 주어질 고통에도 동참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구원자 그리스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으신 분은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성전에서율법에 따라 맏아들을 봉헌하시기에 앞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던 어머니 마리아의 응답을 다시 떠올립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30일 (수) [백]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복음묵상] 루카 2,36-40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십니다. 여기서 시메온과 함께 또 한 사람의 예언자가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뵙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입니다. 그는 루카가 전하는 대로 7년 혼인 생활을 하고서는 여든넷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하고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예언자로서 한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 낸 현명하고 거룩한 여인이었습니다. 한나의 삶은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 속 슬기로운 처녀들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올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에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성실함과, 성전에서 단식과 기도를 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한나의 인내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본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비록 한나가 사람들에게 전한 이야기가 루카 복음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이사 40―55장 참조)을 떠올리며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구원하실 분께서 바로 아기 예수님이시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혼인 생활의 열두 곱절을 성 전에서 보낸 여든넷의 여인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대로 완전하고 거룩한 삶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의 본보기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독서가 한나의 삶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같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12월 31일 (목)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복음묵상] 요한 1,1-18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종말이 언제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마태 24,36)라고 답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그리스도의 적’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거짓말쟁이인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여전히 종말의 날과 시간을 모르는 채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을 보내며 우리가 살면서 겪었던 고민과 갈등을 되돌아봅니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가 진리와 은총으로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은총에 은총을 받아 새해를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한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은 하느님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습니다. 2020년, 우리가 살아온 하루하루를 선물이라고 생각합시다. 각자의 삶의 무게와 감염병의 유행으로 힘겨웠지만 살아온 나날들의 손익을 따지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참빛으로 오신 생명을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영광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고 병에 걸릴 수 있으며, 실패와 실수도 맛봅니다.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과 살아온 경험들이 도움이 되며, 시간도 약이 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시간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진리를 깨닫도록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은총에 은총을 거듭 청해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2021년 1월 1일 (금) [백]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보편 교회의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2,16-21 요즈음 세계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그리고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 말미암아 평화가 사라진 듯한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있습니다. 새해 첫날인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축복과 평화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함께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태어나신 주님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고 은총이며 평화입니다. 우리 주님, 성 자께서 탄생하신 기쁨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강생의 신비를 통한 은총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게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서 이 세상에 일어나게 된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인 목자들의 이야기에서 성모님께서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시는’ 분으로 표현되십니다. 성모님의 잉태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의 삶을 성모님의 돌보심과 전구에 의탁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기도에 나오듯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생명의 근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수 있고, 언제나 축복과 은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불확실하며, 어려움과 불안 그리고 고통과 실망이 얼마나 가득합니까? 또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일들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속에서 얼마나 고민합니까? 성모님과 늘 함께하고 성모님께 의지하는 삶은 우리를 하느님의 계획안에 살 수 있게 하고, 주님의 보호와 축복이 함께하는 기쁜 신앙생활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2021년 1월 2일 (토) [백]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모, 누이 마크리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 주교와 세바스테아의 베드로 주교가 모두 성인일 만큼영 광스러운 가문 출신이다. 은수 생활을 하기도 한 바실리오는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하였다. 370년 무렵 체사레아의 주교가 된 그는 특히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싸웠다. 바실리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수도 규칙은 오늘날까지도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가 따르고 있다. 379년 무렵 선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인 또한 330년 무렵 바실리오 성인과 같은 지역의 나지안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료 바실리오를 따라 은수 생활을 하다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되었다. 그레고리오주교도 바실리오 주교처럼 학문과 웅변에 뛰어났으며,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90년 무렵 선종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19-28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찾아와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와 있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더욱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때로는 물질로 자신을 평가하기도 하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가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신을 알게 되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아 갈수록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이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사명을 완수하게 하듯, 우리의 겸손함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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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도가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올 한해는 코로나19로 시작하여 코로나19로 끝납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굳굳이 버텨온 한 해 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상황이 점차 개선되어 일상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께 경배하고 흠숭 드리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