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공간 ▒▒/∞·성지♡성당

[믿음의 고향(故鄕)을 찾아] 안동교구 / 곧은정

Berardus 2020. 11. 19. 12:27


안동교구 / 곧은정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살던 교우촌

 

건사골에서 일월산(1219m)의 깊은 계곡을 따라

다시 동북쪽으로 1.5㎞가량 내려가면 현재의 남회룡5교 부근

 왼쪽으로 봉화군 곧은정 교우촌 터가 있고,

조금 더 가서 남회룡4교 부근 오른쪽으로

 영양군 곧은정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곳은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의 경계지역으로

계곡 좌우로 봉화군 남회룡리와 영양군 신암리에

 고가(古家)들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영양군 쪽 곧은정 교우촌 터

 

안동교구의 영양군 쪽 곧은정 교우촌 터 모습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남회룡4교 전 계곡 옆을

교우촌 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건사골에서 일월산의 깊은 계곡을 따라 다시 동북쪽으로 1.5㎞가량 내려가면

현재의 남회룡5교 부근 왼쪽으로 봉화군 곧은정 교우촌 터가 있고,

 조금 더 가서 남회룡4교 부근 오른쪽으로

 영양군 곧은정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의 경계 지역으로,

계곡 옆의 영양군 곧은정 터에는 고가(古家)들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계곡 건너편 봉화군 쪽 산 밑에는 약 2,000여 평의 공터가 있는데,

이는 안동교구에서 곧은정 성지 조성을 위해 구입해 놓은 곳입니다.

그러나 곧은정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당시 곧은정 교우촌에는 충청도 여사울 사람으로

 중인 계급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피난 와서 살았습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 김광옥 안드레아가 순교한 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거룩한 신앙심으로 모든 재산을 버려두고

가족과 함께 이곳 일월산 깊은 산골에 있는 곧은정으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고,

 교회 서적을 읽으며 기도로써 굳건한 신앙을 키워갔습니다.

 1815년 3월 을해박해 때 안동 진영의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자

 아들에게 가족을 부탁하고

, 아내에게는 신앙을 지켜 자녀들을 잘 가르친 뒤 장차

자기 뒤를 따르도록 권고한 후 순순히 포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준 그는

 1816년 12월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군(郡) 경계 지역인 계곡 길 바로 옆,

즉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지역의 우거진 낙엽송 밭에는

여기저기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으며 야생 약초들과 칡덩굴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옛날 집들이 있었던 흔적의 표시로 흙으로 덮여진 구들장과 굴뚝도 있다.

구들장이 있는 집터 바로 옆에는 물을 긷던 샘이 이끼가 낀 채 나뭇잎으로 덮여 있다.

 샘터는 아직도 물이 질척하고 깊이는 약 50㎝ 정도이며 이미 허물어져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이곳이 곧은정 교우촌이 아닌가 싶다.

 

▲남회룡4교

 

곧은정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의 남회룡4교 모습입니다.

다리 전 왼쪽으로 봉화군 쪽 교우촌 터가 있고, 오른쪽으로 영양군 쪽 교우촌 터가 있습니다.

 

영양군 신암리 곧은정 교우촌 건너편 봉화군의 남회룡리 방면,

즉 남회룡5교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200m 정도 올라가면 우측 산 밑에

 약 2,000여 평의 공터가 있는데, 이곳은 안동교구에서

 곧은정 성지를 조성하기 위해 구입해 놓은 곳이다.

그러나 곧은정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 당시 곧은정 교우촌에는 충청도 여사울(예산군 신종면 신암리) 사람으로

 중인 계급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김희성 프란치스코(金稀成, 1765-1816년)가 피난 와서 살았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 김광옥 안드레아(金廣玉, ?-1801년)가 순교한 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거룩한 신앙심으로 세상일을 우습게 생각하여

 모든 재산을 예산에 버려두고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소백산맥 준령을 넘어 이곳 일월산 깊은 산골에 있는

경상도 영양 고을 곧은정으로 이주하였다.

 

▲곧은정 교우촌 터 가는 길

 

곧은정 교우촌 터 가는 길 모습입니다.

영양 터널 왼쪽 길로 들어서서 개내골 삼거리에서 계속 직진하여

 남회룡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남회룡5교 부근 왼쪽에 봉화군 쪽 곧은정 교우촌 터가,

조금 더 가서 남회룡4교 부근 오른쪽에 영양군 쪽

곧은정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그는 김광복(金光福)을 비롯한 몇몇 다른 신자 가족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였다.

김희성은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고,

 교회 서적을 읽으며 기도로써 굳건한 신앙을 키워갔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배교자

전지수의 밀고로 안동 진영의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자

그는 아들에게 남아서 가족을 잘 보살피라는 부탁을 하고,

집에 들러서는 아내에게 신앙을 지켜 자녀들을 잘 가르친 뒤

장차 자기 뒤를 따르도록 권고한 후 순순히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영양 터널 입구

 

곧은정 교우촌 터 가는 길목에 있는 영양 터널 모습입니다.

터널 왼쪽 길로 가다가 개내골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건사골 교우촌 터가 나오고,

직진해서 남회룡리 방향으로 더 가면 곧은정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습니다.

 터널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우련전 교우촌이 있습니다.

 

그는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주었고,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 등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11일)]


♬ 어머니당신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