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기도 생활도 중요하고 말씀의 증거도 중요하였지만,
가장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들이었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실천하며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 복음의 이상을 실현하였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그리스 말로 같은 단어인 “위로부터”와 “다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위로부터(또는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코데모는 이 말씀을 자기가 육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하늘 일”에 관한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세상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현세적인 것에
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진리를 추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의 인간적인 논리로는 “하늘 일”을 담아내기에는 늘 부족하였습니다.
오늘 니코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또한 예수님의 장례 때에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온 것도(요한 19,39 참조),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11).
‘너희’와 ‘우리’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니코데모처럼 우리에게도,
진리를 찾는 마음과 그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공존합니다.
우리가 현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가 왜 하필이면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을까요?
일부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그분을 찾아뵈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와 진실을 찾아 고뇌하고 방황하는 상황을
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