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하여라”를 뜻하는 그리스 말 단어는
‘복된, 행복한, 부유한’을 지칭하는 형용사로서 주로 신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 살아가는 사람과 구별하여 신들은
복되고 자유로운 분들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들은 우리 인간이 겪게 되는 절박함이나 노동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분들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죽은 영웅들에게도 신과 동일한
이 복된 상태를 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안에서 이 단어는
특별히 하느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에게서 분출되는
특수한 기쁨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기뻐서 뛰노는 사람들이고,
이 내적 기쁨은 스스로 자제할 수 없기 때문에
저절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살면 나중에 복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너는 지금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군중에게,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기 때문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에,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평화를 이루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훗날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특히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이 세상을 거슬러 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행복의 조건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하늘 나라이기에,
지금 그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리고 목마르고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직은 하늘 나라가 아니며,
이 세상도 결코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좇아 경쟁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과연 행복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경제와 부유함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근심 걱정 없이,
그것이 전부인 양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그러나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지금 현세에서도 행복합니다.
그가 헛것을 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 선언에 담긴 예수님의 말씀은 물질의 소유와 집착에서
자유로울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사되고
우리가 주워 모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과 의존적인 관계 안에서 생각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