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는 것 .
성경이
시종일관 주지하는 인간관은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약 평등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햇빛, 공기, 물은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것의 관리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유대 안에서만, 평등하게,
이 요소들을 공유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 신성한 의무를 무시한 채
사적 소유가 허락되지 않은 요소들을 사유화하여
자본을 만들었고, 급기야는 계급 간의 선이
분명한 불공정 사회를 만들었으며, 처참한 착취와
서로에 대한 혐오로 심각한 대립과 양극화를 양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하여
소외와 낙오를 만들어내고,
우아한 선긋기를 통해 열등한 것,
이질적인 것, 불편한 것은
자기 영역에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배타성을 고발합니다.
■ 복음의 맥락
이번 주 복음의 내용은
지난 주(연중 25주)에 읽었던
‘약은 집사’에 대한 내용
(루카 16,1-13)과 대조를 이룹니다.
약은 집사는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만들어”(16,9)
살 길을 마련하였다면, 화려한 옷을 입고
늘 잔치를 벌이던 오늘 복음의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던
거지 라자로를 상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와 이번 주의 본문들은
모두 도입부분에 “어떤 부자가 … 있었다.”
(그리스어 ‘엔 플루시오스’)라는
동일한 표현을 배치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16,1절과 19절)
교회는 두 주간의 대조 본문을 통해
‘부와 재물’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을 건네지 않는 것
“어떤 부자”라고
지칭되고 있는 인물의 묘사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그에 대한 묘사들이
화려함과 즐거움에 집중되어 있지,
그로 인한 방탕함이나 환락의 부도덕함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19절 참조)
라자로에 대해서도 그의 지독한 가난과 비참은
묘사되어 있지만 그의 윤리적 태도와
덕행들은 표현되지 않습니다.(20-21절 참조)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또 다른 장치는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던
‘선’(線)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선으로 인한 분리와 차단은 그들 사이에
그 어떤 상호 관계나 교류, 교감도 불가능하게 했는데,
바로 대문 앞에 존재하던 라자로의 고통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때로는 이러한 소통의 불능 상태야말로
진정한 지옥의 실체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부자는 죽어서도 라자로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주십시오.”(24절)라며
아브라함과 얘기할 뿐입니다.
결국 지상에서의 선긋기는
저승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그들 사이에 “큰 구렁”(26절)을 만들었고,
절실한 고통 중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의 후반부는
무엇이 사후에 그들의 운명을 역전시켰는지
그 원인을 알려주는데 중요한 단어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입니다.(23.25.29.31절 참조)
아브라함의 등장은 부자와 라자로가
모두 유다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알리고,
동시에 그들이 지켜야 할 계약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모세오경의 여러 구절은
같은 동족을 돌봐야 할 책임을
율법으로 명시하고 있는데
(탈출 22,20-26; 신명 8,12-14; 15,7-12 참조)
특별히 신명기 법전에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된다 …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비열한 생각이 들어 …
괄시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신명 15,7-9)고 선언합니다.
부자는 바로
이점을 무시했던 것이고
그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부자가
고통 속에 지내게 된 것은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계약과
그에 따른 율법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자는 지상에 남은 형제들에게
이를 알려주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31절)
■ 아랑곳하지 않는 것
복음의
부자가 누렸던 화려한 일상은
제1독서에 더욱 섬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극심한 물질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를 비판하면서,
사치와 문란함으로 야기된
당시의 사회악과 부조리를 고발합니다.
상아로 만든 침대와 안락의자, 넘치는 음식들,
환락을 부추기는 음악,
값비싼 술과 요란한 치장들…. (아모 6,4-6 참조)
모두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감각적 요소들이지만,
이런 것에 매이고 중독되다 보면 국가와 사회가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6절) 상태로
의식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그것을 따르려는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국가와 사회, 타인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된 상태는
사실 하느님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 그러나 당신은
제1독서의 “걱정 없이 사는 자들”과
“마음 놓고 사는 자들”에 반대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제2독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규정합니다.(1티모 6,11)
그들은 “상아 침상”과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이들이고
“믿음을 위해 훌륭히 싸우는” 사람들이며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11-12절)
한국어 번역본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리스어 본문의 첫 문장은
“그러나 당신은”(그리스어 “수 데”)으로 시작합니다.
한국어 성경에서처럼 “하느님의 사람이여”로 시작해도
문맥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그리스어 본문은
굳이 ‘접속사’(그러나)와 ‘인칭대명사’(당신)를 명시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어조를 바꾸어 무언가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하느님의 사람이여”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일반 사회와 분명히 차별되는
특징을 가져야 함을 피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돈과 재물을
소유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에 죄가 됩니다.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가 살던 시절은
어쩌면 우리 시대보다는 더
‘공동체적’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라자로는 그나마
부자의 집 대문 앞에라도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은
‘철저한 보안유지를 자랑하는 동네’에는
얼씬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고위층이 사는 곳에는
쓰레기도 구걸하는 걸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아한 선긋기로 수상하거나 불
편함을 주는 타인을 배제한 사회 안에는,
교양과 예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을 향한 진정하고 정직한 존중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옳고 정당한 이해를 갖는 것,
그 은총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개’(메타노이아, 루카 16,29)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탑.
[한주간 전례]
2019년 9월 30일(월)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
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 관리로도 일했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 성경』이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9,46-50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비 자체이신 주님께서 선악과가 아까워
그들을 내쫓으셨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인간이 하느님 행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사람을 심판한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주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심판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아담은 하와 탓을 하였고 하와는 뱀 탓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였던 죄는
결국 마음이 좁아지게 만들어 서로를 심판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은 포용력과 직결됩니다.
가장 작은 이를 받아들인다면
하느님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깊은 계곡이 물을 받아들이듯 깊은 겸손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힘입니다.
교만하면 죄를 짓고
그 죄책감을 무마하려고
다른 사람을 심판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죄가 없으니
이웃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을 심판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판단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도 죄도 따라서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안아 줄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10월 1일 (화) [백]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로마 보편 전례력에 따라
2018년부터 기념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간 그녀는
결핵을 앓다가 1897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데레사 수녀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고행하였다.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그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선종한 뒤에 나온 데레사 수녀의 병상 저서들은
세계 각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하게 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은
그녀를 시성하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녀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소화(小花)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복음묵상] 루카 9,51-56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두 번째 단계인 예
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이 시작되는 단락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으로 전하는
마르코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루카 복음사가가
가지고 있던 선교에 대한 관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시면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전함으로써,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이방인 선교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패망시킨 다음,
사마리아로 사람들을 유배시키고,
이방 민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사마리아는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혼합 민족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른 이방인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생각했어도,
절대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고, 이방인으로 멸시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들어서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이유로
고을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습니다.
이에 화가 난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고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러 오셨고, 세상을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10월 2일 (수) [백] 수호천사 기념일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천사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복음묵상] 마태오 18,1-5.10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특사를 임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호하며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면서,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주고,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악과 불행에서 지켜 주면서
우리가 악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진 뒤
자신들이 누릴 지위와
서열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죄를 아파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 가던 사람이 자기 인생의
모든 진로를 완전히 바꾸는 것,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신중하지도, 독립적이지도,
성숙하지도 않습니다. 그
래서 무능력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며
어른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유치함이나
미성숙함이 아니라 의존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세 번째 조건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존중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얼굴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이가 수호천사를
모시고 있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내 수호천사의 인도를 바라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향합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에서
이방인들이라고 제외될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합니다.
거부당하고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복음 전파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10월 3일 (목) [녹]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0,1-12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 이어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
리는 이 대목에서 복음 전파의 전형적인 가르침을 봅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주님께 지명을 받고 파견됩니다.
곧 복음 전파는 부르심이고 소명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실 곳에 먼저 파견되어,
주님의 오심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 하십니다.
곧 복음 전파의 주인은
파견되는 제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파견된 제자들은 복음 전파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복음을 전파하려면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진 것 같은
거부와 적대감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자기 소명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여행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품마저
지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넷째로,
제자들은 사람들의 집에 직접 찾아가야 하며,
그 집에 평화를 빌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평화는 인사이면서,
동시에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다섯째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찾아
집을 옮겨 다닐 것이 아니라,
같은 곳에 머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런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배척한 것이기에,
소돔보다 더 심한 단죄를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긴박하기만 합니다.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실천하며,
그 복음을 간직하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10월 4일 (금)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0,13-16
오늘 복음 말씀은 무겁고도 매섭습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불행을 선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려면
이 세 도시가 예수님의 주된 활동 무대였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동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바빌론 임금의 생각을
적은 것에서 가져온 말씀인데,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이 하늘까지 올라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질 것을 꿈꾸다가
저승으로 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장소였고,
당신 구원 사업의 중심 장소로서
들어 높여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교만하고 완고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불행을 선고받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배척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도록 이끄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승복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회개의 여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10월 5일 (토) [녹]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0,17-2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복음 전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 보고하는 내용을 들려줍니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교 여행 중에 겪은 일들 가운데,
마귀들까지 자신들에게
복종했다는 사실을 기쁨에 차서 보고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구마 기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내었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었기에
악의 권세가 굴복되고, 사람들이
그 권세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권은,
명예나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바라거나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복음 전파는 참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도취되어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 냈다고 생각할까 염려하십니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을 할 때에도
성취감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지만,
성과에만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을 때가 아니라
실제 생활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갈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오곡이 무르익어가는 계절입니다.
풍성한 계절 10월을 맞아
풍요와 감사를 드리는
10월 되길 빕니다.
- Berardus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