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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9월 22일 (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이동)

Berardus 2019. 9. 22. 07:23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9월 22일 (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이동)

    제1독서(지혜 3,1-9) 제2독서(로마 8,31ㄴ-39) 복음(루카 9,23-26)






      시(視)와 견(見). 시(視)와 견(見). 우리말로 번역하면 둘 다 ‘보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시(視)는 보여진 것(示, 표시된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견(見)은 눈동자에 맺혀진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알아챔(각, 覺)과 연관된다. 흔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도 같은 의미다.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視)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수동적이다.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비춰지는 것을 보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텔레비전을 시청(視聽)한다고 하지 견문(見聞)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견문(見聞)을 넓힌다고 할 때 견(見)은 단순히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저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모험은 언제나 두렵지만 희망적이고 이때 희망을 지탱해 주는 것이 믿음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모험과 희망 그리고 믿음에 의한 결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불확실하지만 그 안에는 신뢰나 믿음이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이다. 신뢰나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환상이거나 망상에 불과하다. 동물적인 삶과 인간적인 삶은 희망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희망하지 않는 삶은 주어진 대로 보거나(視) 들을(聽)뿐이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법. 희망함의 두려움을 견딜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주어진 조건들에 자신의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출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죽음의 고통이 두려웠지만 새로운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셨다. 이러한 희망과 믿음이 부족할 때 취하게 되는 선택은 단순한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탐하고 적립하며 다투는 것이다. 동물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2-4) 오늘 제1독서 지혜서 말씀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 의인들은 생존만을 위해 사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기에 죽은 것처럼 ‘보일(視)’ 것이다. 똑같은 눈이지만 의인들의 눈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생존을 유지하면서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초현실에 정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눈을 감는다. 왜냐하면 생존 너머의 가치들은 삶이 대면하고 있는 다양한 불안을 해결해 줄 것 같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의인들은 생존 너머에 존재하는 삶에 희망을 두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육체적 생명이 소멸하지 않는 희망이라기보다 육체적 생존을 넘어선 영원한 가치에 대한 희망이다. 누구나 죽음보다는 삶을 원하지만 때론 삶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인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맹자의 살신성인(殺身成仁)도 같은 의미다. 목숨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챈(見) 것이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완성하려는 그것은 바로 사랑(仁)이다. 누군가를 사랑해 모든 것을 포기해도 두렵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통해 우리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할 때 그것이 가져다 줄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음에도 모험을 감행한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희망하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 기초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이해한 인물이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 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사랑 고백이라기보다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자녀로서의 사랑은 믿음으로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목숨마저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희생하신다. 인류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을 포기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랑을 받는 존재다. 모든 것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죽음이나 삶, 천사나 권세, 현재와 미래 이 모든 것들은 그분 앞에서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모든 이에게 베풀어졌지만 그것을 알아챌(見) 만한 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것을 외면하려 할 뿐이다. 그래서 이미 선포된 복음을 듣고도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그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순교자들은 죽음을 희망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이 세상 것 너머의 삶을 희망해 육체적 생존에 연연하지 않았을 뿐이다. 희망이 지닌 불확정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존만을 추구하던 자들은 생명을 얻고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육체적 죽음으로 더 이상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소멸되는 완전한 종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오직 보이는 것에 자신을 매어 둔 탓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었던 그분들은 모든 것이신 하느님으로 인해 육체적 목숨 이상의 것을 얻게 된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으므로 육신의 죽음이 종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순교자들께서 목숨을 잃은 이유는 단 한가지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분들보다 앞서 목숨을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見) 것이다. 그에 비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죽음만을 보았을(視) 뿐이다. 그런 자들에게 부활이 보일 리 만무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를 희망하며 살 것인가. 순교자들의 증거에서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눈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 사람의 아들은 요나의 기적 말고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던 예수님 말씀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이번 주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가을의 높은 하늘과 따사로운 햇볕이 교외로 나가게끔 합니다. 차제에 가까운 성지를 방문하여 해당 순교자의 발자취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한주간 전례] 2019년 9월 23일(월)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 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8,16-18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은 기분 나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창세 4,6)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카인은 자신의 나쁜 기분(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죄에 떨어지기 이전에 먼저 마주하는 것이 ‘기분’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말은 이미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의 기분은 어떨까요? ‘감사와 기쁨과 찬양’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더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주시는 선물의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주님과 머물고 증언판을 받아 내려올 때 얼굴이 빛나고 있었는데도 자신은 몰랐다고 합니다(탈출 34,29 참조). 가난과 재채기, 그리고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그 러면 그 빛이 나는 사람을 사람들은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더 사랑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을 켜서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그 기쁜 표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기쁜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나에게 기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받은 이는 늘 기뻐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9월 24일 (화)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8,19-21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무리든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법칙이 있습니다. 꿀벌은 꿀벌 무리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기러기는 기러기 무리의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꿀벌이 기러기의 법칙을 따르면 더 이상 꿀벌 무리에 속할 수 없습니다. 무리에 속하여 얻는 이득을 위하여 그 무리가 요구하는 법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개미의 경우, 무리를 유지하려면 열심히 일하는 3%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러기의 경우라면,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야 하기에 한 마리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인간 공동체는 더한 법칙의 준수를 요구합니다. 부모는 열심히 일하며 가족을 보살펴야 하고,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며 자기 본분을 다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노력을 하기 싫으면 혼자 살면 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당신 가족 공동체를 만드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랑의 법칙’을 따르는 이들만이 당신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 뜻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성모님을 본받으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고백하셨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는 겸손한 종이셨고, 또한 당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어머니이십니다. 하느님 가족 공동체에 들어가는 데 가장 완벽한 모범은 성모님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9월 25일 (수) [녹]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9,1-6 아기 코끼리를 말뚝에 묶어 두면 커서도 그 말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벼룩도 유리로 덮어 놓아 더 높이 뛰지 못하게 하면 유리를 벗겨도 그 정도밖에 못 뛴다고 합니다. 새도 발에 실 하나만 묶어 두고 지내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도 그 정도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참조). 그런데도 아직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법칙 안에 갇혀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참복음은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기에 인간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가 먼저 복음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지배받으면서 하늘의 법칙을 선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재물보다 버리기 힘든 것이 ‘애착’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애정에도 묶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으셨던,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이셨습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떠나시고, 당신을 찾는 이들을 물리치시고 다른 고을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은 세상 모든 애착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9월 26일 (목)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9,7-9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애벌레는 잎을 보지만 나비는 꽃을 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에 따라 가려지고 왜곡됩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산도 돈이고 물도 돈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예수님도 그런 분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사람들과 헤로데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하고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말합니다. 헤로데도 이런 의견에 동참하며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본당에 소속된 신앙인들도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험생 자녀를 둔 학부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시기보다는 자녀의 성적이 잘 나오도록 도와주시는 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녀의 성공이나 건 강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시선은 내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는 욕망에 따라 왜곡되고 그렇게 내가 바라보는 하느님도 왜곡됩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에 대한 애착과 욕구를 버려야 합니다. 부모가 진정 부모로 보이면 부모에 대한 감사만이 남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고 주님에 대한 감사만 솟구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뵐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9월 27일 (금)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쳐 봉사하였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9,18-22 어니스트는 자신의 동네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어니스트는 온화하고 사랑 가득한 얼굴을 가진 위대한 사람이 그 마을에서 나온다는 전설을 듣고 자랐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니스트는 그렇게도 바라던 큰 바위 얼굴을 닮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품을 지니게 된 어니스트를 보며 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임을 알게 됩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줄거리입니다. 바라보면 닮아 갑니다. 좋아하는 것만을 오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좋아해서 오래 바라보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썩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와 같은 맹수들의 얼굴은 매우 사납습니다. 그러나 초식 동물의 얼굴은 무섭지 않고 온화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이 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군중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군중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군중들이 보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상을 말해 줍니다. 오직 베드로만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보속하시려고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운명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운명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바라보려면 십자가를 가장 사랑하여 오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그리스도로 바라볼 때만 나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9월 28일 (토) [녹]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9,43ㄴ-45 리자는 아기 때 부모에게 버려져 며칠 동안 폐가에 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발견되어 살아났습니다. 그녀를 입양한 이나는 극도의 트라우마와 공포에 시달리는 리자를 인내와 끈기로 가르쳤습니다. 리자는 새어머니의 끈질긴 노력으로 러시아의 유명 모델이 되었습니다. 열 살 무렵 친어머니가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을 때 만나기를 거부하며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생명체도 피 흘림 없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피를 흘려야 진정한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을 위하여 마치 거름처럼 자신의 생명을 바칩니다. 이것이 부모의 자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칭찬하고 놀라워합니다. 아무도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영광의 시간에 죽는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 의아해하면서도 감히 무슨 뜻인지 여쭈어 보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시는 힘이 당신 십자가의 죽음 덕분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세상을 살리는 생명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려는 이는 생명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거부하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의 영광은 자녀에게 생명을 주어 자녀를 살게 할 때 드러내게 됩니다. 하느님 자녀의 영광도 그렇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공소 공동체

      모든 교우님들의 가정에 태풍 “타파”의 피해가 없으시길 기도드리며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해진 기온 차에 건강 유념하시고

      가족 모두의 건강을 기원드립니다. - Berardus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