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목적은 ‘인권보호와 증진’ 교회도 약자 돌봄의 의무 지녀 고통받는 이웃 위해 연대하는 거리미사는 적극적 사랑의 행위 ■ 교회의 사회 참여? 거리에서 미사하시는 신부님, 정치 얘기 자주 하는 신부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에 필요할 때에는 교회가 정치질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2246항)라고 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교회는 거리로 나와야 한다”(「복음의 기쁨」 49항)고 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거리미사, 정치 얘기 하는 것이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침묵과 식별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용감하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를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무조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런 거리미사가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전락할 심각한 위험도 항상 존재합니다. ▲2018년 3월 1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복음적 해결을 촉구하는 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정치의 본질과 가톨릭교회가 이야기하는 정치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약한 이들, 슬퍼하고 우는 이들에게 각별한 사랑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역할도 바로 그것입니다. 교리에 따르면 “정치생활의 토대와 목적은 인간이며, 인권보호와 증진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384, 388항)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괴로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배려와 위로, 사랑이 필요합니다. 거리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분명히 예외적입니다. 그러나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가신 것처럼, 그것은 고통받는 이웃에게 찾아가는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입니다. 재론하지만 거리미사는 예외적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특정 집단의 이해문제를 두둔하고 정치선동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또한 거리미사를 드리며 비난과 단죄, 증오와 불신의 이야기가 난무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고 아픈 이들이 위로받으며 모든 이가 화합한다면 그 미사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생생하고도 적극적인 표징이 됩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피어나야 어떤 분들은 노동사목에서 소임한다고 하면 좌파 신부라는 인식을 하십니다. 또한 빈민사목, 정의구현사제단이라고 하면 “신부님은 좌파이신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좌파, 우파가 아니라 저는 그리스도파입니다.”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사제로서 약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데 충실할 뿐입니다. 정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건전한 진보와 건강한 보수의 논리들을 통합해 국민들의 삶을 돌보고 고통받는 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요? 좌우라는 낡고 케케묵은 색깔론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이처럼 인간의 길, 생명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올바른 정치가 구현되도록 그 누구보다도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권위를 내려놓으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바로 그 노력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지배욕의 유혹을 받는 인간 권위에게 권위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봉사에 있음을 드러내신다.” (「간추린 사회교리」 383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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