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6월 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사도 2,1-11)
제2독서(1코린 12,3ㄷ-7.12-13)
복음(요한 20,19-23)
누구도 어느 것도 방해할 수 없는 힘, 성령
인간을 가장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 것은 오해와 불통,
소통에 대한 거부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세상의 모든 오해와 비난,
굴욕을 견디게 하는 힘은 진정어린 소통과 직관적 이해일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전례 본문들은 소통과 이해,
그로 인한 일치로 시작된 교회의 탄생을 선포합니다.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 부활시기의 절정에서,
성령의 오심을 통한 생명의 활기와
그 장엄한 역동성을 힘차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요한복음은 '부활 사건'에 대하여
모두 2개의 장(章)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는 공관복음에 비하여 현격히 많은 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차이를 드러내는데,
공관복음서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적이고
분명한 사실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보이는 반면,
요한복음은 십자가상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과 영광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 여정임을 강조하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당신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심에 집중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부활 사건과
제자들에게 준 '성령'을 연결시킴으로써, 제자들이 ‘
다시 살아나신 분'의 '숨'으로 새 창조됨을 표명합니다.
■ 성령과 새로운 숨
이 새로운 창조는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9)에 발생합니다.
곧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것은 부활하신 날 저녁의 일이고,
이는 성령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임을 암시합니다.
고대 근동인들에게 바람은 매우 신비로운 것이었습니다.
비(非)가시적 존재이기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고(오히려 바람이 인간을 통제),
소유하거나 잡을 수 없지만 감각을 통해
그 존재 여부를 감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신성(神性)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바람과 연관된 또 다른 소재가 '숨'인데,
인간에게서 나오는 바람이 '숨'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숨' 역시 잡을 수 없고 뚜렷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아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사물 안에 침투하여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바람과 유사한 특성을 갖습니다.
창세 2,7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콧구멍에
숨을 불어 넣어 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하느님의 숨이 인간 안에 들어가 '생명체'가 됨을 선언함으로써, ‘
숨'(생명)이야말로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피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22절) 넣으시는데 이는 새로운 창조의 선언이며,
이후 제시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 부여가(23절)
예수님께서 수행하셨던 당신의 일을 이제 제자들을 통해
지속하시고자 하는 것임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생활이 마무리될 무렵,
당신의 현존과 동일한 연속성을 가진 존재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 성령과 혀 모양의 불꽃
제1독서를 통해
루카가 전하는 오순절(사도 2,1-11)의 이야기에서도
성령의 존재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2-3절)라는 '상징'을 통해 묘사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 전통에서 '바람'은 언제나
신적인 현존을 드러내는 소재였습니다.
'불' 역시 동일한 기능을 갖는데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절대적 힘이고 그 어떤 장애도 소멸시키는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불"은 오늘 본문에서 "혀"의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리고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3-4절)
그리고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5절) 합니다.
창세 11,1-9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4절)을 건설하던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가 달라지자, 이해하지 못해 갈등을 빚고 결국 분열됩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는 반대로,
듣는 사람들 모두가 각기
자신의 언어로 알아듣고 상호 일치하는 상황이 전개됩니다.
성령에 의해 새롭게 구성된 교회 공동체의 특징은
서로의 말을 잘 알아듣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상호 소통과 교감, 그로 인한 일치인 것입니다.
■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이처럼 성령은 서로 간의 차이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제2독서에 등장하는 코린토 교회는
서로의 다름 때문에 위기를 겪던 공체였고,
이러한 혼란의 상황에서 바오로는
그의 유명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전망을 제시합니다.
바오로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은 3개의 기능을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게 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두 번째로 성령은
우리 각자의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고유하고 다른 선물을 주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4-6절)
세 번째로 성령은
서로 다른 각자의 현실을 한 '몸'의 기능처럼 움직이게 합니다.
몸의 다른 부위들이 하나의 의도 안에서 통합적으로 움직이듯
성령에 의해 새로 창조된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 각자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2,13)
즉 성령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로 만드시고 분열과 경쟁,
반목을 막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본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성령에 대한 매우 신학적인 통찰들을 제공합니다.
① 성령은 그리스도의 새로운 '숨'(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 부활하신 분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신
'숨'으로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② 이러한 새 창조의 특징은 소통과 이해입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우리라 하더라도 같은 언어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③ 언어뿐 아니라 각자의 은사와 직분,
활동도 다르지만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치하여 그분의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이나 차이가 불편함이나 갈등이 되면,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폭력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시선과 마음으로
상대의 다름을 바라볼 때 그것은 분명 '함께 함'이 주는 풍요와 축복입니다.
상선벌악으로 숨 막히는 삶을 강요하고,
기복(祈福)과 규제로 인간을 조련하며,
금기와 검열의 무거움으로 권위와 제도를 유지하는 곳…,
교회가 결코 그런 곳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교회 공동체 안에 스며있는 하느님 숨(생명)의 신비와 유기체적 일치,
서로의 삶을 빛나게 하는 연대를
성령의 힘으로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교회 본연의 임무이며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19년 6월 1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 때부터 쓰였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에서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마리아는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어머니로서 돌보았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19,25-3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끝까지 스승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 십자가 곁에 있는 사람들은 성모님을 비롯한 몇 명의 여인뿐입니다.
사랑하는 아드님의 참혹한 죽음을 지켜보시는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과 함께 고통과 죽음을 체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성모님을 맡기시고,
그 제자를 성모님께 아들로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새로운 모자 관계를 맺어 주신 것입니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그 사랑받는 제자는,
일반적으로 요한 사도라고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적으로 깨닫고,
그분의 계시를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제자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청원을 중재하십니다.
우리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려움에 놓인 사람들을 대신하여
아드님께 간청하시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신앙인들은 성모님을 통하여 주님께 간청을 드릴 수 있고,
또 주님께서 그 간청을 들어주시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모자 관계는 또한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 남아 있는
공동체가 지닌 일치와 사랑의 특징을 대변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의 희생으로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애제자와 성모님의 일치는
하느님 교회의 사랑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관계보다 모자 관계는 끈끈하고 강하며,
애정으로 묶여 있는 관계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사랑과 일치가 담겨 있고,
그것이 교회의 특징적 모습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11일 (화)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0,7-13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성 바르나바는 비록 열두 사도에 들지는 않았지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사도로서 인정을 받은 분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였던 성인은 바오로 사도와
마르코와 함께 복음을 선포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분입니다.
그런 성인을 기념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과
동일한 내용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이제 당시 사람들 사이에 이미 실현되었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욕심이든, 명성이든
어떠한 욕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원칙은 사도 시대에 그대로 지켜졌고,
자신들의 이익을 찾지 않는 이런 자세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어서,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고,
여행 보따리, 여벌 옷, 신발이나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신발과 지팡이처럼 예수님 당시에 여행을 할 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마저 포기하라는 말씀대로,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일지라도
복음을 선포하고자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를 기념하면서, 성인의 전구를 청하고,
우리도 복음을 안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12일 (수) [(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며,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적이고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을 인도하기 위한 길잡이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바리사이들처럼
규정 하나하나에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가운데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선한 의지는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무효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명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감히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소한 것처럼 보여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다가는,
결국 하느님 뜻에서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율법이 결국 사랑의 계명,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귀결되고,
또 그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됨을 가르치십니다.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하느님에게도,
이웃에게도 죄를 지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말씀으로서 주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을 가르치실 뿐 아니라
당신의 생애와 죽음으로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시기에,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작은 계명부터 지키려고 노력하는 하루가 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13일 (목) [(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안토니오 성인은
119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성인은 모로코에서 최초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의 유해가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안고 수도회를 작은 형제회로 옮겼다.
선교사로 모로코에 파견되었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많은 이를 주님께 이끌었다.
그러나 1231년 열병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례적으로 선종한 이듬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복음묵상] 마태오 5,20ㄴ-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보기로 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짐승과 풀과 곡식을 음식으로 주셨지만,
인간의 생명은 범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소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창세 9,6)는 율법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는 과거의 원칙,
그 공평한 균형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끼쳐지기를 바랍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배척하는 마음을 곧 살인과 비교하고,
정신적인 살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분노에서 상대방에 대한 독설이 나옵니다.
멍청이라고 하는 자와 바보라고 하는 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화를 내면서 자기 형제를 욕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와 같다는 말씀이고,
중앙 법정에 넘겨지거나 불붙는 지옥이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살려면
증오와 적개심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정신적인 살인으로 여기시는 주님의 뜻을 되새기며,
어렵더라도 용서와 화해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7-32
오늘 복음은
여섯 번째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이 계명은
혼인의 유대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안정은 가정의 안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혼인 생활의 순수성을 보장하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음은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지적하시며,
그런 생각 자체를 뿌리 뽑으라고 하십니다.
죄의 유혹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별로 죄의식을 느끼게 되지 않는 부분부터 차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 두 번 거듭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것이 죄인지,
그게 무엇 때문에 죄라고 하는지 혼란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육신 자체가
그렇게 나쁘거나 악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의 인간적 조건이 그렇게 약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죄에서 단호히 멀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눈과 손을 언급하신 것은,
유혹이 사람의 육신을 이용하고,
특별히 눈과 손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이 덮칠 때 신자들은 철저히,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빼어 던져 버리고,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신 것은 이런 단호함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유혹은 아주 조그마한 틈이라도 발견하면 그 틈새를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 때,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안에 활동하십니다.
그런 하느님께 의지하며 우리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15일 (토) [(녹)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33-3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리라는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주님을 두고 하는 맹세입니다.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
하느님을 증인으로 하는 맹세이기에
거기에는 어떤 거짓이 들어가서도 안 되고,
하느님과 한 약속은 성스러운 의무로서 꼭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느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없을뿐더러,
하느님을 두고 맹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이름 대신
하늘이나 예루살렘을 두고는 맹세할 수가 있었고,
그런 맹세가 남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늘이 하느님의 어좌이고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사 66,1-2 참조)이라면,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은 사람들 사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도 그렇게 쉽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예.'와 '아니요.'로 대답하는 것이 어렵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엇에 '예.'를 하고, 무엇에 '아니요.'를 해야 하는지
구분하는 것이 어렵고, 또 '예.'라고 대답한 것을 실제로
내가 실천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며,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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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복자(福者, the Blessed, Beatus·Beata)
하느님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지복직관' 누린다는 뜻의 호칭
특정 지역 등에서만 공경받아
◈복자(福者, the Blessed, Beatus·Beata)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공식적으로 선포된 사람들에게 붙이는 경칭.
우리나라에는 124위의 복자가 있다.
현재 조선왕조 순교자 133위와 근현대 순교자 81위를
복자로 추대하기 위한 활동이 진행 중이다.
'성인'이라고 하면 '거룩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전해지는데,
복자(福者)라고 하면 어쩐지 그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는다.
복자는 그들이
'지복직관'(至福直觀)을 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복직관은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直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지극히 복된 상태(至福)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의인을
하느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 안으로 끌어들인 상태를 뜻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 순례의 목적인 완전한 지복직관을 누리게 될 것이며,
하느님이 이끄는 섭리의 길을 알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314항)
일반적으로 복자가 된 후에,
복자를 성인으로 선포하기 때문에
복자보다 성인이 더 높은 지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복자·성인의 칭호는 해당 복자나
성인이 행한 공덕이나 누리는
영광의 차이를 일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자는 성인과 마찬가지로 지복직관,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을 의미한다.
복자·성인을 선포하는 시복시성은
그 사람을 복자나 성인 반열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다.
복자는 교황이 허락한 특정 교구와 지역,
국가, 또는 수도 단체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공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인과 차이가 있다.
복자가 성인으로 선포되면 세계교회 어디서나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다.
복자는 대상자가 실제로 영웅적 성덕을 갖추거나
순교했는지의 여부, 역사연구, 기적심사 등의 조사를 통해 이뤄진다.
또한 복자의 전구로 보이는 기적이 보고되면 시성심사가 진행되고,
그 결과 시성이 결정되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인으로 선포된다.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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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연중시기(年中時期)입니다.
부활(復活)기쁨에서의 생활(生活)에서
일상생활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신앙생활(信仰生活)이 되시길 빕니다.
-천주교 자천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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