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말씀 묵상]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6월 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제1독서(사도 1,1-11) 복음(루카 24,46-53)
달의 뒤편
"등 긁을 때 아무리 용써도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어'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장옥관 시 '달의 뒤편')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그래서 그랬을까.
공자는 하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
이야기하기를 꺼려했다고 해서
하늘을 무시하거나 외면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언어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을 뿐.
'알고' '모르고'는 지극히 언어적인 것에 속한다.
정말 아는 것이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하는 데 있다고 그는 말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모르는 것'이란 나에게서 소외된 것이나
그것으로 나의 무식이 탄로 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
아는 것'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 주는
지평 혹은 배경 같은 것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언제나 함께한다.
시인의 표현처럼
내가 모르는 달의 뒤편인 내 얼굴, 내 눈동자,
귀뚜라미 울음은 내가 알고 있는 너의 얼굴,
너의 눈동자, 귀뚜라미의 날갯짓과
언제나 함께하며 그것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 배경 없이 어떻게 너의 얼굴과
너의 이름과 너의 눈동자를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와 가장 가까운 것들은 실은 나에게서 늘 감춰져 있다.
내 눈동자나 얼굴은 나에게 있어서는
언어로 포착돼야 할 메마른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아가신 것이다. 우리 앎의 영역에서 사라지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는데 교회는 오늘을 홍보 주일로 지낸다.
더욱 열심히 복음을 홍보하고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다.
알려져야 할 분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신 날을 홍보 주일로 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신 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거나
혹은 우리를 완전히 떠나갔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분의 승천은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내 얼굴이나 눈동자 혹은 내 자신이 내게서 감추어지듯이,
내게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감춰지셨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사라짐으로 인해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것,
내 자신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성령 강림을 통해 현실이 된다.
사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하느님은 나보다 항상 나와 더 가까운 분이셨다.
너무나 가까워서 내 눈동자가
스스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느님의 계시는 나에게
달의 뒤편에 있던 것들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십사 청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나는 가끔 나를 포기하거나 미워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적이 없으셨다.
그분의 한결같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기적,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됐다.
그에 비해 내가 '나'라고 믿는 것은
단 한 번도 일관성을 유지한 적이 없어 보인다.
장자가 호접몽(蝴蝶夢)을 통해
꿈속의 나비가 나인지
아니면 깨어 있는 내가 나인지 헷갈려 하듯
우리는 내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나를 미워하다가도
자랑스러워하고 만족스러워하다가도 혐오한다.
그리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의아해하기도 한다.
미워하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나인가,
바라보는 내가 나인가?
아니면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나인가?
이러한 물음은 끝없이 이어진다.
무한히 확장되는 나의 총합이 나라면
그것은 일종의 분열증세지 실상은 내가 아니다.
사실 내가 나라고 믿고 있던 것은
나를 확인해 줄 수 없다.
나라고 할 수 있는 일관된 어떤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나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일관된 어떤 것에 기대야 하고
기대야 할 어떤 존재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 일관성이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신약의 모든 내용은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일관된 사랑 고백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내가 돼야 할 나의 미래다.
그렇다면 나와 하느님 가운데
누가 나와 더 가까우며 누가 더 나다운가?
하느님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은
그분이 나와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오히려 반증해 준다.
그래서 승천을 통한 예수님의 사라짐은
우리에게서 멀어짐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워졌음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복음서의 끝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제 사도들의 시대, 교회의 시대가 새로 시작된다.
사도들의 시대, 교회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영영 떠나가셨는데도 불구하고
크게 기뻐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복음 말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이
그들에게서 떠나가시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린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분을 떠나보내고도
그렇게 '크게 기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눈에서 사라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으로 돌아오셨다.
이제 그들 자신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제 나의 달 뒤편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복음 선포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이라는 앎의 대상,
그 이름에 한정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분 자신이 배경이 되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이어야 할 것이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19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6,29-33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별 담화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이해하고
그분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왔음을 예언하십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이해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결정적인 십자가 사건의 걸림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 신앙의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할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이제야 겨우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고,
주님과의 만남을 체험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세상의 일들이 내 신앙을 흔들어 버리거나,
세상에 휩쓸려 주님을 잊어버리고 마는 경험을
한 번씩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세상의 논리는 신앙의 논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따르는 일입니다.
때로 내 노력에 비하여
세상의 벽이 너무 높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과 생명의 논리가 욕심과 죽음의 논리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현실에서 그 승리를 이미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용기를 내어 신앙의 길,
승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4일 (화) [(백)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7,1-11ㄴ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
고별 담화 이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사제 기도' 시작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 길지 않은 문단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이라는 표현을 여섯 번이나 쓰고 계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라는 첫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주와 모든 인간의 구원이 실현되는 때를 뜻합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성자께서는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성부께서는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비록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음모와 여러 욕심들을 통하여 전개되고,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지만,
그 고난과 죽음은 피동적인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스스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신 능동적 사건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성부께서는 성자께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고,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죽음이 사명의 완성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두고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사명의 완수와 영광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전체로 하느님의 진리를 계시하셨고,
신앙인들은 그 계시와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인도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갑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길 끝에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5일 (수)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보니파시오 성인은
675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회 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성인은 특히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보니파시오 주교는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웠다.
성인은 선교 활동에 주력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묵상] 요한 16,12-15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내용을 들려줍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에서 교회의 몇 가지 근본적인 특징이 드러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보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공동체이며,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시고,
또한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하고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늘 일치를 지향하며,
분열과 분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셋째는, 기쁨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함으로써,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일치를 통해서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신 그대로입니다.
넷째는, 거룩함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이 세상의 논리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섯째는, 파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인 하느님 구원의 메시지는,
이제 우리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원하셨던
그런 공동체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6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7,20-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기도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일치가 나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 던져진 그물,
곧 물고기가 아무리 많이 잡혀도 터지지 않는 그물로 상징됩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만큼은 아니어도
공동체 안에도 물욕이나 명예욕이 끼어들 여지가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함께 살아가는 묘미가 있습니다.
일치는 절대 획일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요즘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었고,
그것이 나와 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일을 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시작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이나
판단을 부정하거나 억눌러서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일치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일치는 서로의 다름 안에서 공동선의 목표를 향하여
스스로를 조절해 나갈 때 가능한 것이고,
그 다름은 더 이상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풍요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다름을 끌어안을 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일치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 되기를 희망하고 기도하며,
사랑 안에서 일치하여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5-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앙갚음하셨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신 배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가 슬퍼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부인하였던 사실을 떠올리며 회개하였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하셨다기보다는,
당신을 향한 사랑을 굳건하게 하시며,
확고한 다짐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서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고 나면 베드로가 대신
당신 양들의 목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목자 없이 남겨질 어린양들에게 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바라보고,
양들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어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양들을 돌보는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히 성직자나 수도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를 앞세우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주님의 양들을 돌보라고,
우리를 공동체에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굳건히 하고
주님의 양을 돌보려고 떠나는 그런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6월 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21,20-25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한 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제자는 최후 만찬에 등장하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유일하게 십자가 밑에 있었던 제자였으며,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이 제자에게 어머니로 맡기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
곧 요한 사도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제자는 복음서 안에서 자주 베드로 사도와 함께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간 것도 그 제자였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가장 먼저 알아보았던 것도 그 제자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제자였고,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것도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 사도는 그 제자를 두고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대답하십니다.
묻는 사람이 무안해질 만큼 단호한 대답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길과
그 제자의 길은 서로 다를 수 있고 또 다르다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탈렌트가 저마다 다르고, 소명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맡고, 어떤 대우를 받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소명대로 얼마나 충실히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주님께 받은 소명은 다 가치 있는 것이고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어떤 소명을 받았고,
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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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예수 성심 성월에 알아보는 성시간과 예수 성심 신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 감수했던 예수 성심 묵상
겟세마니에서 기도 근거한 성시간
죄인들로 마음 아파한 예수 발현
성심 위로하는 신심 행위로 생겨
알라코크 수녀 환시 메시지 통해 성심 신심 공경 공식화 계기
17세기 후 회칙 반포하며 보급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이 있는 6월을
예수 성심 성월로 지정하고 축일을 기념한다.
또 성시간과 기도회 등을 통해 성심의 신비를 묵상한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성경에 근거하고,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교회의 전통적 신심이다.
예수 성심 성월을 맞아 성시간의 의미를 살피고,
교회 역사 안에서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이
어떻게 확산되고 발전됐는지 알아본다.
죽음의 고통에서 고민하는
예수와 함께 지내며 기도하는 것이 성시간의 주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큰 고통을 받으셨던 예수 성심을 관상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시간이 궁금하다
프랑스 성모방문수녀회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St. Margarita-Maria Alacoque·1647~1690)
수녀는 1673년부터 167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예수 성심의 환시를 체험했다.
그중 1674년 세 번째 환시 체험에서 당신의 성심을 열어 보이시고
죄인들의 냉담과 배은망덕을 탄식하시는 예수의 발현을 보게 된다.
이때 예수는
상처받은 성심을 위로하는 방법으로 첫 금요일 영성체와
매주 목요일 밤 중에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며
예수와 괴로움을 같이 할 것을 가르치셨다.
이는 '첫 금요일 영성체'와 '성시간'이라는
두 개의 주요 신심 행위가 생겨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알라코크 수녀는 환시 체험 후
당시 고해 사제였던
예수회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신부와 함께 성시간 신심을 활성화했다.
같은 예수회 사제였던 로베르 드브로스 신부가 단체를 창설하면서
신심 전파는 더욱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후 비오 8세 교황(재위 1829~1830)이 1829년
성시간 신심 실천을 전대사와 함께 인준했다.
1933년 비오 11세 교황(재위 1922~1939)은 성시간에 참여한 자로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교황 지향대로 기도하는 이에게
전대사를 허락하는 등 신심을 장려했다.
성시간은 마태오복음 26장 40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겟세마니에서 번민과 고통 속에 기도하던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고 했던 말씀이다.
알라코크 수녀에게 발현한 예수는
불꽃 가운데 있는
성심을 보이시며 상처받은 성심을 위로하는 것으로서,
즉 세상의 죄악을 배상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성시간을 지시하셨다.
그런 면에서
'죽음의 고통에서 고민하는 예수와 함께 지내며
기도하는 것'이 성시간의 주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핵심은 예수 성심께 바치는 공경과 보속이다.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큰 고통을 받으셨던
예수 성심을 관상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홍근 신부(대구대교구 원로사목자)는
「예수 성심 신심과 성시간」에서
"성시간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죄를 보상하고
그리스도의 상한 성심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희생을 곁들여 바치는 사랑과 배상의 기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대사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시간을 통해 원한 것은
친히 사람들 마음을 향하여 말씀하며 형식적인 대답이나 태도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응답을 듣는 것"이라고 밝힌다.
결국 성시간은 예수의 성심에 대한 단순한 경배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수난에 대해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우리 삶 안에서 기워 갚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성시간은 성체현시(聖體顯示)와 함께
예수 수난에 대한 묵상, 장엄 기도, '성 토마스의 성체찬미가'와 '
예수 성심께 천하 만민을 바치는 기도', 성체강복 등으로 이뤄진다.
공동체에서나 개인적으로 할 수 있고,
시간은 목요일이나 금요일 저녁 때가 권장된다.
이홍근 신부는
"성당에서나 가정에서나, 들에서나 일터에서나,
여행 중에는 기차나 배 등 어디에서나 되도록
조용한 마음으로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를 본받아
한 시간 동안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 좋다"고 책에서 조언한다.
#예수 성심 신심, 어떻게 발전됐나
▲성경, 그리고 교부들
그리스도의 마음에 공경을 드리는 근거는
신·구약성경과 교부들, 교황들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다.
호세야, 이사야, 예레미야 등 구약의 예언자들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
혹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충실한 사랑으로 서술했다.
이는 신약에서 등장할 메시아의 희생적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이기도 했다.
교부들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예수 성심을 초자연 은총의 근원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옆구리를 찔려 피와 물이 흘러(요한 19,34 참조) 내린 것을 두고
교부들은 예수 성심을 초자연적인 은혜의 보고로 비유했다.
즉, 피와 물은 성체성사로 풀이하며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듯이
새 아담인 그리스도로부터 교회가 탄생했다고 했다.
예수 성심을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통찰했던 인물로는
성 베르나르도(1090~1153), 성녀 제르트루다(1256~1302),
성 알베르토(1200~1280), 성녀 가타리나(1347~1380) 등이 꼽힌다.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는 예수 성심 공경을 공적 예절로 발전시켰다.
예수 성심 공경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널리 보급된 계기는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에게 예수 성심의 메시지가 전해지면서였다.
이는 예수 성심 신심의 교회 공인 및 신심이 권장되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교회는 알라코크 수녀의 시복을 준비하면서
특히 예수 성심에 대한 계시 부분을 살폈고 이것이 믿을 만한 것임을 인정했다.
17세기 이후부터 교황들은
예수 성심 신심을 승인하고 널리 보급했다.
비오 6세 교황(재위 1775~1799)은 예수 성심 신심에 반발하던
얀센주의에 대적하기 위해
1794년 예수 성심 신심을 공적으로 옹호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그 후 비오 9세 교황(재위 1846~1878)은
1856년 성심 축일을 전 세계 교회 축일로 확산시켰다.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은 1899년 5월 전 인류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는 내용의 회칙을 발표하고
6월 11일 예수성심께 전 인류를 봉헌했다.
성 비오 10세 교황(1903~1914)은 매년 이 봉헌을 갱신하도록 했다.
'성심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은 1956년 성심 축일이
보편교회 전체로 확대된 100주년을 기념해 회칙 「물을 기르리라」를 반포했다.
이 회칙은 이전의 가르침과는 달리,
예수 성심 공경의 교리적 근거와 기원을 신학적으로 제시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도
교황들의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강조는 계속됐다.
성 요한 23세 교황(재위 1958~1963)은 예수 성심과
성체성사를 영성의 중심으로 삼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재위 1978~2005)은 회칙 「인간의 구원자」
(1979)에서 구원의 원천인 하느님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심을 통해 나타나고 실현됨을 밝혔다.
또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1980)에서 "성심 신심은
현대인이 하느님 자비를 고백하는 가장 합당한 방편이며,
교회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가장 탁월하고 필요한 길"이라고 했다.
-이주연 기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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