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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5월 26일 (일) [(백)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Berardus 2019. 5. 25. 09:34

[금주의 말씀 묵상]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5월 26일 (일) [(백)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제1독서(사도 15,1-2.22-29) 제2독서(묵시 21,10-14.22-23) 복음(요한 14,23ㄴ-29) 사랑이 필요한 오늘 오늘은 부활 제6주일이며 청소년 주일입니다. 교회는 해마다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기립니다. 미래의 주인공인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깨달아, 주님의 은총 속에 건강하게 자라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우정을 길러 감사하는 마음과 평화의 기쁨을 간직하고 자신의 삶의 길을 발견하여 사랑의 밀알이 되기를 삼가 청합니다. 교회는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시대문화에 청소년들이 어떻게 적응하고, 이성에 입각해 신앙의 신비를 깨달으며,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생명의 문화를 창조하고 소명을 찾아 봉사할 수 있도록 일러주는 「YOUCAT」(청년들을 위한 교리서)을 발간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사랑의 삶에 응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나라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1984) 때 한국을 최초로 방문하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꿈을 간직한 세계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찾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데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2~3년마다 세계청년대회를 개최하시어 오늘에까지 이어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영상으로 하신 훈화(2018. 5.)를 통해 "신앙은 디지털혁명의 선두주자"라는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교회의 미래인 젊은이들이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하시고 더욱 신심을 길러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닌 평화의 밀알이 되기를 기원하십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의 말씀은 예루살렘 사도회의(49~50년경)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인 안티오키아(Antioch, 고대 시리아의 수도)와 소아시아 지역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사도 15,1)고 주장합니다. 신생교회에서 목숨을 걸고 선교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들에게 맞섰지만 분쟁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소수의 신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 이 문제를 제기합니다.(사도 15,2)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모 교회였으며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예수님의 공생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산증인으로 교회의 공동체생활과 전례규정 등을 결정하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찬송할 수 있도록 신생교회의 이방인들은 유대교율법에서 원칙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유다와 실라스가 공한을 소지하고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우상에 바친 제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불륜은 삼가라는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 실천규정을 제외하고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알립니다.(사도 15,22이하) 오늘의 제2독서인 묵시록의 말씀은 저자인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란 영적 상징을 제시하고, 하느님과 어린양이 주권을 가진 터전인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세워졌음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도성은 모든 민족들이 함께 모인 거룩한 교회로 이해됩니다.(시편 48,2; 87,3; 이사 60,14) 이 도성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있는 열두 성문은 교회가 열두 사도와 예언자들의 기초위에 세워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빛으로 드러내시는 교회의 등불이십니다.(묵시 21,11. 22-23)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기에 그분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며, 둘이나 셋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요한 8,12; 마태 18,20) 거룩한 성전은 그리스도의 가족들이 자라는 신앙의 샘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드러냅니다.(시편 87; 에페 2,19-20)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이끄신 교회사 속에 이룬 사도전승,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지혜에 힘입어 신앙의 신비를 쉽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지요. 오늘의 복음 말씀이 전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을 지키게 되고, 주님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고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며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요한복음 말씀은 성령은 세 가지 기능을 밝힙니다. 성령은 교회에 주님의 영원한 현존(14,23)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은 예수님(진리)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복음을 증거(14,26)하게 합니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함께하기에 이젠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낼 일도 없습니다.(14,27) 청소년 주일을 맞아 성령의 은총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깊이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 덕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압니다. 가난과 실업, 불평등과 소외, 어둠과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은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의 밀알이 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각자의 소명대로 일상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자비의 손길을 펼치는데 성령께서도 함께해 주시고 필요한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19년 5월 27일 (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5,26─16,4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당신을 '증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그들에게 '박해'도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을 '증언'하게 되어 세상의 '박해'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부를 때 '진리의 영'이라고도 하고 '증거의 영'이라고도 합니다(1요한 5,6 참조). 성령의 힘으로만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진리로 믿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 사랑을 드러내는 데에는 죽음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15,13 참조). 성령께서는 진리를 증언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순교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시어, 당신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진리를 증언하시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말합니다(사도 7,55 참조).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테파노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60)라고 기도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듯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이 품고 계신 진리인 사랑의 본성을 드러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28일 (화) [(백)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6,5-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위로자이십니다.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성부 곁에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보내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은 이들은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 알게 됩니다. 성령으로 그만큼 우리가 변화되니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가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믿지만, 성령을 받으면 죄는 성령을 따르려 하지 않는 자신의 ‘옛 본성'임을 알게 됩니다. '의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자신이 의로워지려고 하지만,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로워짐을 알기에 함부로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인데,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 심판을 이긴다고 믿지만,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을 닮은 본성'으로 심판을 이길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의로움'도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얻게 되는데, 그 분께서 아버지께 인정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품은 우리도 인정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29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6,12-15 아이는 처음에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지내기에, 아버지가 자신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때 어머니는 중간에서 자녀에게 아버지를 알려 줌으로써 자녀가 아버지를 존경하게 합니다. 이렇게 아내는 자녀 앞에서 남편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고 하십니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받아 교회에 주십니다. 교회는 또한 그 받은 모든 것을 자녀들인 신자들에게 베풉니다. 이 '받은 것을 자녀들에게 내어 줌'이 신부로서 신랑을 영광스럽게 하는 가장 완전한 방법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새로 태어나는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피 흘리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당신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오시면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자녀 앞에서 아내가 하는 역할을 교회 앞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할을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교회의 가르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배운 지식과 받은 은총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교회를 드러내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이도 교회의 사랑을 받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30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6,16-20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은 '시야의 범위'에서 차이가 납니다. 오래 산 이들은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조금만 참아.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 줍니다. 그만큼 오래 살아 보았으니, 지금 기뻐도 조금 지나면 슬퍼지고, 지금 슬프더라도 조금 지나면 기뻐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야가 좁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하늘이 무너진 듯, 금방 지나갈 것도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절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라며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이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고 사흘 뒤면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뒤면 세상은 기뻐하고 제자들은 슬퍼할 것이며, 또 잠시 뒤면 제자들은 기뻐하고 세상은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세상이 끝나는 줄 알고 다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만은 그 순간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골고타 언덕 위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시야의 범위가 넓은 사람은 어떠한 역경도 이겨 냅니다. 우리가 성숙한다는 것은 바로 "조금만 있으면"이란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의미를 알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고, 기쁜 일이 있어도 들뜨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영원의 관점으로 보게 되어 이 세상 작은 변화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5월 31일 (금)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가 된다. [복음묵상] 루카 1,39-56 아이가 자라면서 '혹시 나 입양되어 온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어떨까요? 아이에게 믿고 살아갈 든든한 부모가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의지해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어 아는 것이 많아지고 몸집도 커지게 되면 부모보다 자신을 더 믿게 됩니다. 그러면 어릴 적에 느꼈던 부모와 함께하는 편안함의 의미는 잃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 없이 혼자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고통스러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보다는 자신을 더 믿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뱀의 말을 믿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단절되고 행복이 충만한 상태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인간은 어른이 되면서 행복을 잃습니다.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믿어 행복을 잃었다면, 이제 다시 하느님을 믿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다시 인간이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외친 것은, 성모 마리아께서 어린이처럼 믿으셨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당신이 행복하신 이유가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시며, 어린이처럼 믿는 그 겸손한 믿음만이 곧 행복의 시작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행복하려면 아버지 앞에서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유스티노 성인은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 토론을 하고 이를 토대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냈다.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도 한 성인은 165년 무렵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6,23ㄴ-2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기만 하면 바라는 그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마술적인 주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청원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성부이신 하느님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신적 일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는 그 순간에 내 마음에 사적 욕심이 끼어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나오는 충만함과 기쁨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을 받느냐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서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내적인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드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 주십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간절히 청할 때 기쁨이 넘친다는 사실이고, 그 기쁨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타이어 펑크 사건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어느 수도회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신부님은 몇 달 전에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아테네오 대학에 초빙 교수로 가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나와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고, 나는 그 신부님으로부터 필리핀 생활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신부님은 인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마닐라에서 지내는 동안 자기네 수도회 양성소에서 묵었답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강의하러 갈 때마다 그 학교에 다니는 형제들이 동행해서 학교까지 갔었고, 심지어 형제들은 신부님 강의를 신청하기도 했답니다. 또 형제들은 강의가 끝난 후에는 수도원까지 신부님과 동행했기에, 마닐라 생활을 하는 동안 형제애 속에서 지낼 수 있었답니다. 강의 시간은 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이었고, 점심식사는 학교 식당에서 했답니다. 17명의 수강생이 있었는데, 처음 몇 주 동안 서로가 서먹해서 그랬는지, 점심식사를 식당에서 따로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씩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더니, 시간이 좀 지나서는 식탁을 붙여서 17명이 함께 식사를 했었답니다. 마음이 열리니 서로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식탁이 곧 나눔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수도원 수사님은 자기네 공동체에서 자란 바나나를 간식으로 가져와 나누었고, 어떤 수녀님은 간식으로 한국 과자를 나누었고, 또 다른 분은 많은 양의 '비빔밥'이나 '제육볶음'을 만들어 와서 함께 나누어 먹었답니다. 그 밖에 다른 수강생들은 자신들이 묵고 있는 기숙사나 공동체서 싸 주는 점심 도시락을 가져왔는데, 그것 또한 나누며 먹었기에 강의 보다 식사 시간이 더 행복한 시간이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바쁜 일이 있어서 수도원 승합차를 가지고 왔고, 강의 후 신부님과 동료 수사님들은 급히 수도원으로 돌아가려고 차를 타려는데 왼쪽 앞바퀴 타이어의 바람이 다 빠져있었답니다. 한국에서라면 자동차 보험이 잘 되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마닐라 상황은 그렇지 않았답니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라 보험회사에 전화했더니 전화도 안 되고, 가까스로 전화가 연결됐는데 차를 가지러 갈 수 없으니 직접 가지고 올 수 있으면 오라는 말만 했답니다. 신부님과 수사님들은 자동차 정비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발발 동동 굴렀답니다. 그래도 수사님들은 영어로 된 차량 사용 설명서를 읽고 뭔가를 시도했지만, 자동차 몸체를 올리는 장비도, 그 밖의 여러 가지 도구들 또한 없었답니다. 수도원에 급히 가야 했지만,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낙담만 하고 있을 때, 함께 공부하는 학생으로 그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다른 수도회 수사님이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보았답니다. 그러자 그 수사님은 달려와서 마치 자기 일처럼 도울 방안을 궁리하다가, 그 대학 기계실로 달려가서 자동차를 손볼 수 있는 분을 찾았답니다. 그런 다음 자동차 기사 분과 함께 연장을 가지고 달려와서, 모두가 다 함께 합심해 펑크가 난 타이어를 임시 타이어로 교체했답니다. 그렇게 교체가 끝나자 모든 수사님들이 서로 기쁨에 겨워 악수를 하며 감사 인사를 나누었답니다. 순간,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다 같은 수도회인양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다는 마음에 뿌듯함을 간직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그 신부님이 내게 말하기를 사는 동안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우리를 당황시키지만, 평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그 모든 일의 결말은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이 된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평소 사람과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 은총임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가톨릭신문)- +++++++++++++++++++++++++++++++++++++++++++++++++ 5월을 마무리하는 주간입니다.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성모의 밤" 행사를 통하여 성모님과 함께하는 묵주기로를 바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도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오늘 묵주기도를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