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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Berardus 2019. 4. 20. 10:47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였습니다. 부활은 큰 변화를 의미합니다. 엠마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나중에서야 예수님임을 알아차리면서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커다란 마음가짐을 가져 봅니다. [금주의 말씀 묵상] 2019년 4월 21일 (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사도 10,34ㄱ.37ㄴ-43) 제2독서(콜로 3,1-4) 복음(요한 20,1-9)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명하신 아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습니다.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서 죽음이 곧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시작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도 진정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진정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무덤에 묻히시는 모습은 따르던 많은 이들을 허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을 위한 전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허술한 모습이 맘에 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긴가민가하는 모습, 의심하며 우왕좌왕 대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히려 정겹습니다. 뭐랄까…, 들쭉날쭉한 우리도 그들처럼 변화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투박하고 모난 돌멩이 같던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다듬어 내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베드로처럼 변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겁니다. 사도행전이 들려주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일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마르코복음은 베드로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르코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는데요. 마르코복음에는 유난히 베드로의 실수담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베드로가 자기 허물을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았던 결과일 것이라 추리해 보는데요. 주님과 함께했던 3여 년, 주님의 속을 태우며 이랬다저랬다 했던 자신의 모자람을 끝내 품어 주신 주님 사랑을 추억하며 새 삶으로 도약하도록 이끌어주신 은혜에 감격했던 베드로의 고백이라 싶은 겁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실수까지도 성숙을 향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주실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 헤아려집니다. 이렇듯 자신의 허물을 까발려 들려주면서까지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사랑을 일깨워주는 베드로의 격려에 힘입어 오직 믿음으로 희망과 사랑을 살아낼 각오를 다져봅니다. 하여 지금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내내 '축복의 순간'을 살아가는 참 기쁘고 행복한 부활의 주인공이 되시길 기도드리며 글을 엽니다. 솔직히 성경에서 만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모범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망스러운 지경입니다. 어쩌면 복음서 저자들도 베드로의 이런 모습이 드라마틱한 소재라 여겼기에 다투듯 믿음인의 여정을 일깨우는 소재로 삼았을 것이라 짐작해 보는데요. 베드로의 독특한 면면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를 꿈꾸는 우리에게 주저앉지 않는 용기를 선물해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실수를 한 후에도 구질구질 변명하거나 숨지 않고 내내 주님 곁에 머물렀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야말로 베드로와 우리의 '다른' 모습이니까요. 우리 같으면 적어도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저질렀으면, 민망해서라도 죄송한 표정으로 쭈뼛대며 멀리 물러서는 게 당연지사일 듯한데, 베드로는 그렇지가 않았으니까요. 뻔뻔하다 싶을 만큼 줄기차게 주님 곁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믿음이란 베드로처럼 '낯에 철판을 깔고'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뻔뻔함이야말로 베드로의 최대 강점이라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뻔뻔하게'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의탁하는 삶이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최고 요소라 새깁니다. 솔직히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가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허물로 얼룩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려는 다짐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만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돌멩이처럼 보잘것없는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끝내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신앙적인 고백은 베드로처럼 시도 때도 없이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라 싶습니다. 부활인의 요건은 이처럼 쉽고 간단합니다. 때문에 신나고 벅찬 은혜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잘나고 대단해서 당신의 자녀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더없이 못나고 모자라서 그래서 더욱 우리를 애틋해 하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피 흘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 사업으로 제일 처음 구원한 영혼은 주님의 뜻을 한 치도 어김없이 살아낸 성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강도였습니다. 당신 아들의 수난공로를 이토록 짧고 단순한 믿음의 고백과 맞바꿔주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이렇듯 부활은 우리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이해되지 않을 만큼 벅찬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서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은총입니다. 이렇듯 내가 얼마나 온 힘을 쏟아 신앙을 실천했는지에 따른 포상이 아니기에 복음입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당부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 애쓰지 말라고, 다만 함께 당신 곁에 있어달라고 청하실 터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초대받은 그리스도인은 부활인의 긍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랑에 성숙하고 사랑의 참맛'을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누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지혜의 소유자이기에 어둠을 벗어난 빛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진정한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매일 매 순간, 영혼을 헹구고 행실을 고쳐나가는 일에 부지런해지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은 나한테 은혜인 만큼 다른 이에게도 쏟아지고 있는 은총임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영광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내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하늘의 팡파르입니다. 변치 않는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모두 베드로처럼, 달라진 요한처럼 살아가도록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끝까지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내는 지혜의 삶"으로 도약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는 우리이기를 마음 모아 기도드립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한주간 전례] 2019년 4월 22일 (월) [(백)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8,8-15 부활 팔일에 교회는 계속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아타나시오 성인이 말하였듯이, 연속적인 '큰 주일', 곧 부활 50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의 한순간이 아니라 인간의 전 역사, 인간의 생명과 죽음의 정점을 이루고 이를 설명해 줍니다. 부활 팔일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독서들은 사도들의 첫 설교를 담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초기 여정을 반영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 부활에 관련된 두 이야기를 전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무덤을 보러 간 다른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 서둘러 그분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일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마태 28,5-7). 그다음 예수님께서 친히 그 여자들을 만나 이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다룹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궁리한 끝에 부활의 유일한 직접적인 증인들인 군사들을 매수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마태오의 특종 뉴스인 빈 무덤의 소문에 관한 이 논평은 회당과 사도 교회 간의 갈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살아나셨음도 증언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20,11-18 오늘 독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의 고통을 느끼면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베드로 사도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와 세례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리아는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눈물은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녀가 정원지기로 생각했던 분이 실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마자 곧 주님을 알아봅니다. 사랑에 힘입어 눈물을 통하여 너무나 사랑했던 주님을 알아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은 그녀의 눈과 삶을 밝혀 주셨습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을 보고 믿으며 스승을 깨닫게 해 주는 지름길입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였습니다. 사랑에 눈뜬 믿음을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형제들 안에서, 곧 둘이나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어디서 주님을 만날까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24,13-35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를 다룹니다. 루카는 메시아에 대한 실망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열렬한 믿음으로 점점 나아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매우 정교하게 전개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나려고 어떤 여정을 걸어야 했을까요? 오늘은 성경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묵상해 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경은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시려고 열어 주신 길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지만, 그분을 알아채지 못하였고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며칠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그분이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 희망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무덤 속에 감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아 희망은 제자들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한 빈 무덤과 심지어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일러 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들조차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성경에 대한 이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길이고,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도들의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 교회가 따르던 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엠마오의 두 제자와 어떤 점에서 다를까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25일 (목) [(백)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24,35-48 오늘 복음의 첫째 부분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한 저녁 식사 장면을 상기합니다. 그다음 루카는 각각의 주제를 통일시키는 두 단계 위에 이야기의 메시지를 배열합니다. 첫째 단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증거를 바탕으로 하여 제자들이 알고 있던 나자렛 예수님과 당신의 신원을 일치시키는 '변론' 부분입니다. 둘째 단계는 주님께서 성경을 깨닫도록 제자들을 가르쳐 주신 부분입니다. 놀라운 것은, 다른 제자들이 엠마오의 두 제자의 말을 듣고 또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하는 반면(루카 24,34-35 참조), 그들 가운데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이 본 대로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으며, 불과 몇 시간 내에 묻히신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자명한 좌절 앞에서 이 몇 시간은 온갖 메시아 환상과 희망을 깨트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안에서 의심이 생기고 이런 의심에서 그들이 믿는 것을 가로막는 두려움의 망령이 생깁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과 뼈를 가진 인간임을 분명히 해 주는 육체적 증거를 모두 제시하십니다. "나를 만져 보아라." "먹을 것이 좀 있느냐?" “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그분의 몸은 영광을 입으셨고, 이는 제자들이 처음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체험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들을 찾아오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게 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14 오늘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베드로의 세 번째 선교 설교를 듣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서 불구자를 고쳐 준 일로 백성은 나자렛 예수님의 증인들을 믿기 시작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불쾌하게 여겨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둡니다. 이튿날 영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약속은 이루어진다고 베드로는 재판관들과 법정 앞에서 설교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나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힘으로 병든 사람이 낫게 되었고,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신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으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이름은 그분의 이름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있던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으나 주님의 지시에 따르니 그물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렸습니다. 고기로 가득 찬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는데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숯불 위에 빵과 물고기를 구우시며 그들을 기다렸다가 아침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보면, 처음에는 제자들이 바로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분의 말씀이나 행위에 힘입어 믿음을 일깨우는 행동을 통하여 나중에야 알아보게 하는 주님의 계획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한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의 행위는 그의 믿음을 일깨우기 시작하고 다른 제자들도 그분이 주님이시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은 초대 공동체의 부활 신앙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붙여 드린 호칭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6,9-15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다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끝으로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되살아나신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제자들이 믿지 않자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며 선교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는 주님의 발현을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표징으로 이해합니다. 그 표징은 주님의 빈 무덤에 대한 사실을 알려 주고 사도들과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곧 주님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북돋우고 보증합니다. 주님의 발현 이야기들은 부활 신앙의 고백이고 그 믿음의 선포입니다. 그 이야기들의 근본 목적은 일상 사건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으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과 믿음의 체험들을 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 개인의 완전한 변화는 이런 믿음의 결과입니다. 오늘 독서는 주님의 선교 명령을 따르는 사도들의 담대한 활동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서 고쳐 준 병자 때문에 최고 의회 앞에 서 있습니다. 사도들의 말을 믿는 백성을 두려워한 의회는 사도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 사도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백성에게 말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이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의 담대함을 보여 주는 칭찬할 만한 본보기입니다. 모든 협박과 경고에도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언하기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알렐루야(Alleluia) 복음 선포하는 주님을 찬양 전례에서는 말씀 화답 의미 사순 제외 모든 시기에 노래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말로, 사제가 복음을 읽기 전에 공동체가 바치는 복음 환호송. 사순 시기가 끝나고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 신자들은 다시 '알렐루야'를 외친다. 사순 시기 동안 복음 환호송으로 알렐루야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반가운 마음도 있지만, 알렐루야는 어떤 말보다도 부활의 기쁨을 잘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알렐루야의 어원을 살피면 '찬양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할렐'의 명령형 '할렐루'와 하느님을 의미하는 '야훼'의 약자 '야'의 합성어다. 따라서 히브리어로 '할렐루야'는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구약성경 중 시편에서 '할렐루야'가 두드러지게 언급된다. 특히 104~106편, 111~117편 135편,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하거나 끝을 맺고 있어 '할렐루야 시편'이라고도 불린다. 유다인들도 회당의 예식 등에서 응답으로 할렐루야를 사용했다고 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요한 묵시록에서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승리와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등의 장면에서 '할렐루야'라고 응답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알렐루야'가 됐고, 교회 전례 안에서는 라틴어 발음으로 정착됐다. 교회의 전례 안에서는 이미 4세기경에 '알렐루야'의 노래가 자리 잡았다. 전례 안에서 알렐루야는 독서에서 선포된 하느님 말씀에 대한 공동체의 화답이자,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는 노래다. 전례 안에서 알렐루야는 일 년 중 사순 시기를 제외한 모든 미사에서 복음 전에 노래된다. 사순 시기에는 대축일에도 알렐루야를 사용하지 않고, 그 외의 기간에는 장례미사라도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알렐루야가 주님 안에 죽은 이들은 부활한다는 믿음과 희망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알렐루야에 관해 "우리는 부활 백성이며 알렐루야는 우리의 외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주님의 부활로 교우님들의 가정에 행복과 기쁨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