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 신나무골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품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 4번 국도 상에 위치한 신동 초등학교에서 왜관 방향으로 약 3.3km 정도 가면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유서 깊은 교우촌인 이곳은 좁게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를 중심으로 한 ‘신나무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 완정 · 왜관의 가실 · 동명의 어골 등 인근의 교우촌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20km 가량 떨어진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서 필수 조건인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라는 점 외에도 대구 읍내에서 하루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편리성 또한 매우 큰 장점이었다.
신자들이 처음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 산중의 우련전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해 겨우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대구 교회 첫 본당터 앞마당에 세워진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崔良業) · 다블뤼(Daveluy) · 리델(Ridel)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Chastan)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곤 했다.
최양업 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삼남 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 신나무골 성지 김보록 신부상 대구 교회 첫 본당터 마당에 세워진 김보록(로베르) 신부 흉상.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면서 로베르 신부는 이곳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에 걸친 로베르 신부의 사목 활동은 이 지역에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8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계성 학교의 전신인 한한 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 학교였다.
신나무골은 1894년 왜관 가실 본당 소속의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신나무골 성지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명상의 집) 등을 복원했으며 로베르 신부의 흉상도 건립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신나무골성지의 성모상 이선이 엘리사벳 묘 -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교우촌을 이룬 이래 영남 지방 선교의 요람이 된 신나무골에는 1860년 경신박해 당시 큰아들과 함께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가 묻혀있다.
이선이 엘리사벳 묘소 뒤에 반원형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그 뒤로 대구 교회 첫 본당터에 복원된 사제관 등이 보인다 묘소 주위에 새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와 묘소 한쪽에 잘 보존되어 있는 옛 제대가 풍취를 더해주는 순교자 이선이의 묘소 앞에 서는 순례자들은 여린 아낙이면서도 장정들 못지않은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 그녀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 신나무골 성지의 사제관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그녀가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안양동) 산 21번지에 위치한 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장한 것이다.
이선이의 남편인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문의 배정모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0년 경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지방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읍은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정모의 가족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칠곡읍에서 20여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신을 했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선이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김도율 신부가 그린 이선이 엘리사벳과 배도령 스테파노 모자 초상화가 사제관에 걸려 있다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 쪽으로 총총히 쫓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 말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따라 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성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배교를 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과 맏아들 스테파노(속칭 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母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남편은 가슴을 후벼 파는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맏아들의 시체를 그 자리에 묻었다가 얼마 후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체만 이장했다.
대구대교구 왜관지역 5개 본당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9월 순교자 성월 동안 매일 신나무골 성지에서 차례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성지를 관리하고 있는 신동 성당은 1984년부터 신나무골 성지에서 해마다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묘소 뒤에 반원형으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앞에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신나무골 성지 십자가의 길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한티 성지 순교자 묘역 입구의 대형 십자가와 야외제대.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 신나무골성지의 이선이묘 전경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 (“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리)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 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신나무골 성지 십자가의 길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 ·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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