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 손골
성 도리 헨리코 신부님이 체포된 곳
▲ 손골성지 전경
손골성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번지에 있다. 원래 손골성지에는
교우촌(敎友村)이 있었다.
교우촌은 천주교 박해시기 박해를 피해 신자들만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을 말한다.
손골 교우촌은 현재 ‘손골성지’라고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도리(Dorie, 金, 헨리코) 성인과
오매트르(Aumaitre, 吳, 베드로) 성인을 기념한다.
아울러 박해시대 손골 교우촌에서 살았던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성 도리 헨리코 신부상
●손골 교우촌의 형성
우리나라에 교우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신해박해(1791) 때부터였다.
하지만 손골에 교우촌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단지 교회사의 흐름에 따라 기해박해(1839)
이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초기 교회 가장 큰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 이후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나
충청도 등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도 박해가 일어나
이번에는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이주해야 했다.
어떤 신자들은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나 전라도로 피신하기도 하였지만
어떤 신자들은 서울 가까이로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도 하였다.
서울 가까이 가서 살아야 신자들 상호간 연락도 되고 서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의 가족들이
충청도 솔뫼를 떠나 경기도 양지의 골배마실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나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 가족들이
충청도 청양을 떠나 경기도 안양 수리산 뒷듬이(담배촌)
교우촌으로 이주한 것이 좋은 사례이다.
▲ 십자가의 길 1처
손골에도 이즈음에 교우촌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손골 교우촌은 안정적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아니라면 기해박해 직후에 생긴 것 같다.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서울 근교에는 교우촌이 많이 형성되었다.
선교사들이 자연스레 서울 중심으로 사목을 하게 되자
신부들 가까이 있어야 성사나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서울 근교에 교우촌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박해시기 손골 교우촌의 규모
병인박해 때 손골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도리 신부가 손골에 체류할 당시 손골에는
신자들만 살고 있었고 모두 12가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박해가 끝난 다음 1900년 하우현에 본당이 생겼을 때
그 소속 공소(公所)로 편입된 손골 교우촌의 신자가 47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손골에는 적어도
45-50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 같다.
도리 신부의 말에 따르면,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논이 조금 있기는 하였지만 홍수로 폐허가 되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다.
▲ 야외십자가
●손골 교우촌의 중요성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면 안전한 곳에서
우리나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조선에 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이러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교우촌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그곳에 사는 신자들이
열심하고 믿을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적응기간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신자들을 방문하며 사목하는 것을 잠시 쉬는 여름철이 되면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손골 교우촌은 신자들을 사목하는데도 중요한 장소였다.
손골 교우촌이 박해시대 신자 사목의 중요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오매트르 신부의 사목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오매트르 신부는 1863년 7월말 손골에 와서
다른 선교사들처럼 언어를 배우며 적응기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언어와 풍습을 익힌 오매트르 신부는 다음해인 1864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당시 조선교구장(대목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오매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네 곳을 사목하라고 인사발령을 하였다.
▲ 야외제대와 성인묘
발령을 받은 오매트르 신부는
손골로 돌아와 1864년 10월 말까지 머물며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이때 손골 인근의 묘루니 교우촌이나 신봉리 교우촌 등
아주 가까운 곳의 신자들도 사목하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에
다른 고을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 손골을 떠났다.
그 후 오매트르 신부의 편지를 통해 확인되는 오매트르 신부의 방문지는
미리내, 무량골, 소내실 등이다.
이렇게 볼 때 오매트르 신부에게 사목하라고 맡긴 손골과 가까운 네 고을은
손골과 아주 가까운 곳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경기도 일원인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병인박해가 처음 일어났을 때 오매트르 신부가
수원 지방 새암골에 있었다는 기록을 보아도 가능하다.
이렇듯 손골은
경기도 지역을 사목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축이었다.
손골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을 사목하다가 자리를 옮겨
미리내를 중심으로 사목하고 또다시 자리를 옮겨
옮겨간 곳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찾아보며 사목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손골에서의 생활
도리 신부의 편지를 보면,
도리 신부는 손골에 먼저 왔던 다른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바로 그 집에 묵었다.
더욱이 그 집에서 다른 선교사들을 모셨던 이군옥(李君玉, 요셉)의
가족들이 또다시 도리 신부를 돌보았다.
▲ 성 도리 헨리코 김신부 순교비와 돌 십자가
그런데 다른 선교사들이
그 집을 찾아와 함께 자면서 쉬어갔다는 사실을 보면,
이군옥은 다른 선교사들이 편안히 쉬다 갈 수 있도록
그 뒷바라지까지도 성실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군옥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는 스승 역할까지 하였다.
도리 신부는 자신도 이군옥에게서 조선어를 배웠는데,
이군옥이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손골의 교우인 이군옥과 그의 가족은
지적 수준도 상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심이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며,
선교사들을 최선을 다해 모시려고 노력한 충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손골 교우들은 물론 선교사들에게서 큰 신뢰를 받아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던 것 같다.
이군옥이 음식과 풍습이 다른 선교사들을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은
그가 도리 신부를 위해 서툰 솜씨로 빵을 만들어 대접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귀한 개고기를 마련하여
도리 신부에게 대접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도리 신부 등 선교사들은 손골에 머무는 동안
하루 종일 작고 좁은 방에서 조선의 말과 풍습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도리 신부는 신자들이 만들어준 집 앞의
작은 산책길을 어쩌다 잠시 거니는 일도 있었지만 행여나 비신자들의 눈에 뜨일까봐
얼른 방으로 되돌아가곤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도리 신부는 이런 생활을 답답하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활을 마음의 평정과 하느님과의 만남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활용하였다.
▲ 예수성심상
손골에서 생활하는 선교사들에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방이 곧 경당이었다.
그 방에 널빤지로 제대를 만들어 흙벽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매일 이곳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도리 신부의 편지를 보면 도리 신부는 손골과 가까운 묘루니
교우촌에 머물던 친구 볼리외(Beaulieu, 徐, 루도비코) 신부를 찾아가기도 하고
또 볼리외 신부가 도리 신부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모처럼 만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이들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침묵과 단식을 하며 함께 피정을 하기도 하였다.
●손골 교우촌의 순교자들
손골 교우촌과 관계있는
순교자로는 우선 도리 신부와 오매트르 신부가 있다.
도리 신부는 1866년 2월 27일 오후 1시경 체포되어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오매트르 신부는 도리 신부 순교한 후인 3월 11일 충남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두 순교자 모두 103위 성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두 성인 신부들 말고도 손골 교우촌에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던 신자들 중에도
순교한 이들이 여럿 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도리 신부는 손골 교우촌에 함께 있던 신자들을
모두 손골에서 떠나게 한 뒤 홀로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다.
손골 교우촌 신자들은 도리 신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골을 떠나지만
다른 곳에 가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많이 순교하였다.
그 중에서 다음의 삼대(三代)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 성 도리 기념관 외부
이 요한,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3대가
경기 손골에서 병인(1866) 첫 군난에 쫓기어 용인 남성골로 내려와
베드로가 용인 포졸에게 9인이 함께 잡혀 일곱 사람이 배교하고 다 나오고
베드로하고 다른 사람하고 둘만 걷혔더니,
포졸 행수(行首)가 원(員) 모르게 놓아 또 그곳에 살더니,
정묘(1867) 10월에 또 삼 대가 잡혔더니,
그 포교 하는 말이 “다 누구냐?” 하되 베드로 말이 “다 내 식구라” 하니
그 포교 말이 “지금 영(令)은 엄하나,
그럴 수 없으니 하나만 가자” 하니 베드로 말이 “가자” 하니
베드로의 부친 요한의 말이 “하나만 갈테면 내가 가겠다”고 부자 다투니,
그 포교 익히 생각하다가 다 놓고 간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쇠재 가서 살더니,
경오년(1870) 2월 23일 야경에 서울 좌변(左邊) 포교와
본골 장교하고 와서 잡으며 묻는 말이 “성교(聖敎)하느냐?” 한 즉 “물을 것 없다.
성교 아니 하면 내가 너에게 잡힐 것 없다” 하고
그 길로 본읍(本邑)에 들어가 하루 묵고 본골 장교하고
요한, 베드로, 프란치스코 3대가 함께 서울 좌포도청으로 들어가서
문목(問目)할 때 대답이 한결같다 하더라.
이렇듯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잡혀가겠다고 하였던 할아버지
이 요한과 아들 이 베드로, 손자 이 프란치스코는 1871년 3월 19일(음)
좌포청(左捕廳)에서 다 함께 순교하였다.
●순례지가 된 손골
손골이 순례지가 된 데에는 참으로 재미있는 역사가 있다.
한국에서가 아니라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주도하여 순례지가 된 것이다.
도리 신부는 프랑스 방데(Vendee) 지방의
쌩 틸래드 드 딸몽(Saint-Hilaire de Talmont) 본당 출신이다.
죠셉 그럴레(Joseph Grelet)라는 신부가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이 본당의 주임으로 있었는데 도리 신부를 비롯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 성지 사무실
그럴레 신부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 이전에
도리 신부 등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시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교황청 시성성(諡聖省)을 비롯하여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
한국 주재 교황대사, 프랑스 주교회의, 한국 주교회의 등에 편지를 보내
시복을 속히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렇게 노력하던 그럴레 신부는
1963년경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손골을 순례하였다.
당시는 비행장이 서울 여의도에 있던 시절이었고
지금처럼 한불간의 교류가 많은 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손골을 찾아와
손골과 도리 신부 고향 딸몽을 연결하였던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간 그럴레 신부는 1964년
“조선, 순교자들의 땅(La Coree, Terre de Martyrs”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럴레 신부의 노력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도리 신부가 살았던
한국 용인의 광교산 산속의 손골과 도리 신부의 고향 프랑스 방데 지방의 딸몽을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연결하였다.
그럴레 신부는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화강암(granit)으로 된 맷돌에서 똑같이 생긴 십자가를 두 개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하나는 고향에 두고 다른 하나는 한국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도리 신부가 탄생하였던 곳과 도리 신부가 선교하러 와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곳을 연결하고 싶어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돌 십자가 하나는
1966년 3월 8일(원래 순교일은 3월 7일인데
프랑스에서는 8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도리 신부 순교기념일에
도리 신부 생가 벽에 모셨다.
그리고 한국에 보내온 다른 돌 십자가는 당시 손골 공소(公所)를 사목하던
수원 북수동 본당 주임 류봉구(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받았다.
류봉구 신부는 그 돌 십자가를 근거로
손골에 도리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碑)를 세웠다.
한국산 화강암으로 큰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을 쌓아
탑 모양의 현양비를 세웠던 것이다.
이 비의 맨 꼭대기에는 딸몽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올려놓았고
이 비는 1966년 10월 24일 축복되었다.
▲ 경당 제대 좌우편 성 도리 헨리코 신부 사진
이렇게 현양비를 만들면서
손골 순례가 시작되었고 손골에서 도리 신부를 적극적으로 기념하게 되었다.
도리 신부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직접 손골을 순례하기까지 한 프랑스인 그럴레 신부의 수고가
이런 좋은 결과를 낸 것이다.
●손골의 도리 신부 현양비
손골에는 도리 신부 현양비가
지금도 있지만 처음에 만든 현양비는 아니다.
그러나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그 돌 십자가는 손골에 그대로 잘 있다.
처음 현양비는 벽돌을 사방으로 10개씩 쌓아 만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10층짜리 현양비였다.
그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그러다가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되자
새로운 도리 신부 현양비를 만들었다.
기존의 현양비에다 벽돌을 사방으로 8개씩 더 쌓아
18층짜리 현양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맨 위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1990년에 손골에 경당(經堂)을 지으면서 이 현양비가 철거되었다.
그러다 1991년 경당을 준공하면서 새 현양비를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그 맨 뒤에 도리 신부 고향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모셨다.
▲ 성모상
처음으로 만든 현양비 머릿돌에는
“김 베드루 신부 순교 기념”이라고 쓰여 있었다.
도리 신부를 “김 베드로” 신부로 소개한 것이다.
도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김”이라는 성(姓)을 택하였다.
요동에 있을 때는 성을 두(杜)로 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성이 낯설기 때문에 고쳤을 것이다.
도리 신부가 우리나라에서 김씨 성을 택하였으니 김 신부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도리 신부의 세례명을 “헨리코”가 아닌 “베드로”라 한 것이다.
실제로 도리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사용한 것 같다.
도리 신부를 심문한 문초기록에서도 도리 신부가 “김 베드루”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도리 신부는 “김 베드로” 신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1968년 10월 6일 시복식이 있은 후 만들어진
24위 복자전 등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 성지 전경
도리 신부의 부친은 삐에르 도리(Pierre Dorie)이고
모친은 즈느비에브 비뇬노(Genevieve Bignonneau)이다.
도리 신부의 부친은 아들이 내어나자 헨리코(Henri)이름을 붙여주면서
자기와 같은 삐에르라는 이름도 하나 더 붙였다.
그래서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적으면 삐에르 앙리 도리(Pierre-Henri Dorie)이다.
삐에르는 베드로를 프랑스식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에게는 삐에르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으니
“김 베드로” 신부로 불렀다고 해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 경당 감실
하지만 도리 신부는 편지를 쓰면서
언제나 도리 헨리코(Henri Dorie)라는 이름으로 서명하였다.
그러니까 도리 신부의 이름을 전체로 쓸 때는
도리 베드로-헨리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부를 때는
도리 헨리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어떻든 이런 이유로 인해 지금 손골에 있는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에도
비록 작은 글씨이기는 하지만 ‘김 베드로 신부’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즉 “성 도리 헨리꼬 김 베드로 신부 순교비”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손골 순례지의 발전
손골이 순례지로 발전하는 데에는 프랑스 쪽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돌 십자가를 받은 류봉구 신부의 수고도 있었다.
그리고 파티마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립자
이우철 신부의 수고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순교자의 후손인
이우철 신부는 순교자들에 대해 남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손골 가까이 수지 동천동에 모원이 있는 파티마 수녀들에게
손골을 자주 순례하도록 권하였다.
▲ 성지 표지석
이우철 신부는 고아들을 위해 성심원을 창립하였는데
서울 잠원동에서 수지 동천동으로 성심원을 옮겨 파티마 수녀들과 함께 운영하였다.
그런데 이우철 신부는 성심원 후원자들에게도
손골 교우촌을 소개하고 순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이우철 신부 사후(死後)에 결실을 맺었다.
1988년 성심원 후원자들로 구성된 성심가족회에서
손골을 개발하기 위해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원교구의 인준을 받아 1989년부터
사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 경당 내부
성심가족회에서는 1991년까지 손골에 경당을 짓고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 등을 건립하였다.
또한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도 세웠다.
이렇게 하여 손골이 순례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파티마 수녀원에서는
1997년부터 손골에 수녀를 파견하여 신자들의 순례를 돕고 있다.
그리고 수원교구에서는 그로부터 8년 후인 2005년부터
손골에 전담 신부를 두고 있다.
손골에는 도리 신부 기념관이 있다.
비록 임시 건물이고 또 작지만 소장품에는 귀한 것들이 많다.
먼저 도리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이 3통 있다.
특히 도리 신부가 1865년 10월 16일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원본이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친필 편지 원본들은 2007년 10월 17일 도리 신부가 소속되었던
뤼쏭(Lucon) 교구에서 손골을 순례하면서
손골성지에 기증하였다.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집에서 쓰던 침대보가 있다.
이 침대보는 도리 신부의 누이이며 대모(代母)인
뽈린느 도리(Pauline Dorie)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뤼쏭교구 순례단과 함께 손골에 왔을 때 기증한 것이다.
후손들은 침대보 조각에 방데 지방의 표지(mart)를
손수 수놓아 기증하였다.
또한 기념관에는 도리 신부가 신학생 때 쓰던 책들도 있다.
이 책들은 도리 신부 생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인데
손골 도리 신부 기념관으로 기증한 것이다.
아울러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의 머릿돌들이 있다.
처음으로 만든 10층짜리 현양비 머릿돌과 18층짜리
현양비 머릿돌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 성지 입구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유해 이장
2013년 11월 22일 수원교구는
그동안 미리내 성지에 안치되었던 무명 순교자 4위를 파묘해
손골 성지에 옮겨 안치하였다.
이번에 옮겨 안치한 무명 순교자 4위는
병인박해 때
수원으로 끌려가던 중 서봉 인근 개울가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이다.
순교자들의 이름과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근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해
돌무덤을 만들어 '서봉부락 순교자 돌무덤'으로 불려왔다.
1976년 토지소유권 등의 문제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미리내 성지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었다.
▲ 쉼터
손골 성지는 손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무명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모시고자
무명 순교자 묘역을 조성하고 병인박해 160주년이 되는
2016년까지 성지를 개발하며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는
순교자의 길을 마련할 계획이다.
[출처 : 손골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추가
(최종수정 2014년 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