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시대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독서도 바로 그런 모습을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 유다인들의 회당에 가서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새로 선포되는 복음을
가장 우선적으로 들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된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오로가 전하는 말에 이방인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에 시기심을 느끼고
마침내는 바오로 일행을 쫓아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은 이방인들을 향해 갑니다.
유다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시고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그분의 말씀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연 과학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또한 어떤 경우에는 성경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의 영향으로,
종종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신학적인 설명만 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요한 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많은 표징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의 영광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난 달 우리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도 그러한 믿음과 깨달음에 도달했는지요?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에페소서는 그것을 ‘신비’라고 말합니다(3,5-6 참조).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된다는 신비,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신비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따라
우리도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약속과 권고에 따라
우리는 늘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시고 협조자이신
파라클리토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