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가 눈먼 이의 길잡이가 될 수 없듯이,
알지 못하면 가르칠 수 없습니다. 공자도 수신제가,
곧 먼저 덕을 쌓아서 자기 가정의 평화를 이룬 다음에 다른 사람 앞에 나서라고 하였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을 넘어설 생각일랑 아예 하지를 말 것이며,
언제나 그분의 모습을 삶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려고 평생 노력을 해도,
보이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가능하다면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가 고치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 또한 형제에 대한 사랑과 책임의 표현이 아닐까요?’
(마태 18,15-18; 에제 3,16-21 참조)
이렇게 넋두리도 해보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형제의 눈 속에 티가 들어 있다고 해서
그에게 화살을 돌릴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형제’라면 그의 눈 속에 든 티는 나에게도 아픔이고 상처이며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보다 더, 나는 그의 눈에 든 티를 짊어질 뿐,
그는 내 눈에 든 커다란 들보를 짊어져야 하지요
.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형제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장 선한 사람에게도 적지 않은 결점이 있듯이,
우리 모두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에 형제적인 충고가 아닌
비난을 위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도 분명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여 헐뜯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을 찾아내서 격려해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종말에
우리를 그렇게 대하실 것이라고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