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JOHN FISHER
St. Joannes Fisher. E. M
San Giovanni Fisher Vescovo e martire
Born:1469
Died:martyred on 22 June 1535 on Tower Hill, London, England;
buried in the churchyard of All Hallows, Barking, without rites or a shroud;
head exhibited on London Bridge for two weeks as an example,
then thrown into the River Thames
Canonized:1935 by Pope Pius XI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요한 피셔는 보통 에라스무스,토마스 모어,
그리고 다른 문예 부흥기의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언급된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일부 성인들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에도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의 지성인들이나 정치가들과 교제한 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나중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35세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으며 그의 특별한 관심 중의 하나는
영국의 설교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다.
피셔 자신은 완벽한 설교가였고 저술가였다.
참회 시편에 관한 그의 설교는
그가 죽기 전에 일곱 번이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루터파의 등장과 더불어 그는 이단과의 논쟁에 휩싸였다.
그가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 쓴 8권의 책은 그로 하여금
유럽 신학자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갖게 해주었다.
1527년에 그는 헨리 8세와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하고
그리고 후에는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라는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헨리8세의 분노를 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한 첫 시도로 헨리 8세는 켄트의 수녀인
엘리사벳 바튼의 "계시"를 모두 보고하지 않았다고 그를 고발하였다.
몹시 허약해진 그는 새로운 계승 문서에 서약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와 토마스 모어는, 이 문서와 다른 내용들이 헨리 8세의 이혼이 합법적이라는 것과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주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 서약을 거부했다.
그들은 런던탑으로 보내졌고 피셔는
그곳에서 재판도 받지 않고 14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결국 종신형을 언도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두 사람은 더 많은 심문에 소환되었으나 계속 침묵을 지켰다.
피셔는 한 사람의 사제로서 사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계교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왕은 영국 교회의 최고 책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황이 옥중의 피셔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자
더욱 화가 난 왕은 그를 반역죄로 재판에 부쳤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그의 몸은 하루 종일 처형대에 뉘어 있었고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그로부터 2주일 후에 처형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사제들이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요한 피셔는 주교로서 자기 소명에 충실했으며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고수하였다.
그가 순교한 이유는 바로 로마 교황청에 대한 그의 충성심때문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문화적 계몽 단체나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에 모두 참여하였다.
이러한 참여는 그로 하여금
그 나라 지도자의 윤리적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인간의 기본 권리나 인류의 구원
그 자체에 필요하다면 교회가 사회적,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한 일들을 고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세상에서의 정의")
에라스무스는 요한 피셔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직한 생활,뛰어난 학문,위대한 영혼에 관한 한
이 시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인도 다수 배출하고
원래는 가톨릭 국가 중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이
16세기에 이르러 한 국왕의 실수로
이단의 도가니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그때 그리스도교의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모든 계급에서
왕의 무지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훌륭히 신앙을 관철해
용감한 순교자를 많이 나게 한 것은 매우 기쁜일이라 하겠다.
성 요한 피셔도 역시 그러한 사람 중의 한 분이었다.
그는 1469년 요크샤 주의 베라리이
마을에서 태어나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신학을 배워
1501년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 즉시 그 대학 주사(主事)로 뽑혔다.
그는 한편 사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특히 상류의 인사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헨리 7세 왕의 고문으로
취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있었다.
그의 직무에 대한 열의에는 황태후도 매우 감동되어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2학부를 증설할 비용과 수많은 학생에 대한
보조비 등을 하사할 정도 였다.
그리고 국왕은 또한 그의 공로를 생각해
1504년 로체스터의 주교좌를 그에게 주셨던 것이다.
헨리 8세가 즉위했는데, 그도 자녀가 부모를 따르듯이 피셔를 경애하며
"유럽이 넓다 해도 우리 로체스터 주교처럼
학덕 겸비한 위대한 인물은 다른데에는 없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이라 부르며
가톨릭 전래의 교회와 성사등을 다수 폐지하자,
헨리 8세는 호교의 펜을 들어 "일곱의 거룩한 성사"라는 서적을 저술했는데,
이에도 주로 피셔 주교의 권고와 조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를 위해 진력한
헨리 8세가 돌연 마음이 변해 교회를 배반하게 된 이유는
누구나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안나 보레인이라 하는 궁녀에 대한
사욕(邪慾)에서 발단한 것이었다.
왕은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왕후 가타리나와의 결혼이 무효였다는 것을
피셔 주교나 토마스 모어 재상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 두 사람은
모두 정의에 강한 분이었으므로 왕의 부정한 요구를 거절하고
성심성의로 그에게 간(諫)했다.
그러나 사욕에 눈이 어두워진 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두 사람을 미워하며
드디어 그들을 런던 탑의 감옥에 가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67세의 고령에 달했던 피셔는 옥중의 고통을 인내하기를 1년,
체력이 몹시 쇠약해져
재판 받으러 나갈때에도 걸을 수가 없어 테임즈 강 위를
배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였다.
그러나 정신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고 고난이 심하면 심할 수록
그만큼 마음에는 열렬한 신앙의 뜨거운 불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죄목은 국왕에 대한 배반이란 것이었다.
재판관이 "그대는 그 죄를 인정하는가?"하고 물으니
피셔는 정색을 하고 나서서 "나는 반성을 해 보아도
국왕에게 대해 불경한 행동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하고
명백히 단언하며 일일이 논고를 변박했다.
그런데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재판은 다만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피셔의 변론이 모두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사형의 선고는 드디어 그에게 내려진 것이다.
사형 집행의 명령은 1535년 6월 21일이 밤에 내렸으나
다음 날 아침 5시에야 비로소 그 뜻을 전하였던 바
피셔는 태연한 태도로 "그렇소, 고맙구려"하고 대답하고는
집행의 시간이 오전 9시라는 것을 듣자
"그러면 아직 두시간 가량 더 쉬게 해 주시오"하고 말하면서 다시 침상에 누웠다.
일곱 시에 눈을 뜨자
주교는 몸에 걸치고 있던 고복을 호화스러운 의복으로 갈아입고
형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관리들이 모시러 오자, 그는 성호를 긋고,
복음성서를 들고 서서히 감옥을 나왔다.
사형장에 가는 도중 그 성서를 펼쳐 보니, 눈에 띈 것은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 3)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자기의 현 처지에 적합한 말씀인가 생각하며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노(老)주교께서 사형대에 서게 되자
형 집행인은 옆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이에 대해 그는 온순한 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형제여,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죽음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으니 결코 근심을 말아주시오"라고.
그리고 나서 피셔는 단(壇)위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최후의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함을 듣고 나서는
다만 자기가 신심을 위하여 죽는다는 취지만을
간단히 말하고 조국과 국왕을 위해 기도를 바치고
군중에게 고별 인사를 하고 나서 소리높이 떼 데움을 읊고
"주여, 우리는 당신을 신뢰하오니 영원히 멸망치 말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마치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팔을 벌리고 이어 참수 순교했다.
때는 1535년 6월 22일 이었다.
피셔 주교는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바오로 3세에 의해
로마 교회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요한 피셔는 토마스 모어와 함께 1886년 12월 20일 시복되고,
1934년의 성령 강림 축일에 시성되어 영원한 영광을 획득하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ir Thomas More - HOLBEIN, Hans the Younger
1527. Tempera on wood, 74,2 x 59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자의 교서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함
QUIBUS SANCTUS THOMAS MORUS
GUBERNATORUM, POLITICORUM VIRORUM
AC MULIERUM
PROCLAMATUR PATRONUS
2000. 10. 31.
영원히 기념하여
1. 성 토마스 모어의 삶과 순교는 인간 양심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을 수세기에 걸쳐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메시지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에게, 인간의 양심이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6항) 하고
상기시켜 줍니다.
인간이 진리의 외침에 귀 기울일 때마다
양심은 그들의 행동을 확실하게 선으로 이끌어 줍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진리가 권력에 우선한다는 것을 목숨을 바쳐서까지
증언하였기 때문에 도덕적 고결함의 영원한 본보기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밖에서까지, 특히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봉사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정치 제도를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몇몇 국가와 정부의 수반,
많은 정치 인사들, 일부 주교회의와 주교들이
저에게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도록 요청해 왔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 문화, 종교에 충실한 사람들도 이러한 청원에 동조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뛰어난 정치인의 사고와 활동에 대한
깊고 광범한 관심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2. 토마스 모어는 그의 모국에서 탁월한 정치 경력을 쌓았습니다.
1478년 런던의 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캔터베리 대주교이며
영국의 대법관인 존 모턴을 도왔습니다.
나중에 옥스퍼드와 런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면서 문화와 신학,
고전 문학 분야에 대한 관심도 넓혔습니다.
그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였고, 로테르담의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를 비롯하여
르네상스 문화의 주요 인물들과 교제하며 친분을 맺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신앙심을 가지고
열심히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덕을 쌓았습니다. 그리니치에 있는 프란치스코 탁발
수도회의 원시회칙파 수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키워 나갔고,
한때는 런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이 두 곳은 영국에서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주요 중심지였습니다.
혼인을 하여 가정 생활을 하고 평신도로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느낀 그는
1505년에 제인 콜트와 혼인을 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제인은 1511년에 세상을 떠났고,
토마스는 딸 하나를 둔 미망인인 앨리스 미들턴과 재혼을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다정하고 성실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으며, 자녀들의 종교, 도덕,
지적 교육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자녀들의 배우자와 손주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진리나 인생의 소명을 찾는 많은 젊은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가정 생활은 또한 그에게 만족스럽고 건전한 휴식뿐 아니라
공동 기도와 영적 독서를 위한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토마스는 본당의 매일 미사에 참례하였으며,
그가 실천한 엄격한 고행에 대해서는 가까운 가족들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3. 그는 1504년 헨리 7세 치하에서
처음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1510년에 그에게 위임을 갱신하였고,
그를 런던의 사정 장관보(司政 長官補)로 임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관직에서 탁월한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이어 10년 동안 국왕은 그에게 여러 차례 외교와 통상 임무를 맡겨
플랑드르와 오늘날의 프랑스 영토에 보냈습니다.
그는 칙선 법정 변호사단의 일원으로 중요한 법정의 재판을 주재하였고,
왕실 회계국 부장관과 주(州) 선출 대의원을 지냈으며,
1523년에는 하원 의장이 되었습니다.
변함 없는 도덕적 고결함, 영민한 정신,
개방적이고 재치 있는 성격, 출중한 학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던 그는 영국이 정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1529년에 국왕을 통하여
대법관직에 임명되었습니다.
평신도로서는 처음으로 이 직위에 오른 토마스는
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국왕과 국가에 봉사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힘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는 사람들의 해악을 막고
정의를 증진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532년, 영국 교회를 지배하려는
헨리 8세의 계획을 지지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대법관직을 사임하였습니다.
그는 공직 생활에서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가난을 견디었으며,
시련의 때에 거짓 친구들임이 드러난 많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양심을 더럽히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강직함과
단호함을 확인한 국왕은 1534년 그를 런던탑에 가두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온갖 심리적 압력을 받았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에게 강요된 선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어할 수 없는 전제 정치의 길을 여는 정치적,
교회적 타협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에서 그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그리스도교 문명의 법률적 세습 자산에 대한 마땅한 존중,
국가와 맺는 관계에서 교회가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한 신념을 열렬히 변호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몇 세기가 지나자 교회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었습니다.
1850년에는 영국 가톨릭 교계 제도가 재확립되었습니다.
이로써 많은 순교자들의 시성 추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존 피셔 주교를 비롯하여 53명의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1886년에 교황 레오 13세 성하를 통하여 시복되었습니다.
또한 순교 400년이 되는 1935년에는 교황 비오 11세 성하를 통하여
존 피셔 주교와 함께 시성되었습니다.
4.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과
공직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는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치계와 행정계에서 느끼는
믿음직한 역할의 모범에 대한 필요성입니다.
힘든 도전과 중대한 책무가 늘어나는 역사적 시기에는 진리의 길을
가리킬 수 있는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은 실제로 매우 혁신적인
경제 세력이 사회 구조를 재형성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생물 공학 분야의 과학적 성취는
모든 단계의 인간 생명을 수호하여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나타내 줍니다.
반면, 혼란스러워하는 여론에 성공적으로 제시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은 가정과 젊은이들,
노인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명확한 정치적 결정을 절박하게 요구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 토마스 모어의 모범을 살펴본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바로 권력이 아니라 정의라는 숭고한 이상에 봉사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합법적 권위와 제도에 변함 없이 충실하였던 것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보다도 덕의 실천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엄격한 도덕적 태도를 견지하였던
이 영국 정치인은 공직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
특히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공평성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사회적 논쟁을 다루었으며, 가정을 옹호하고 수호하는 데에 힘을 다 바쳤고,
또한 젊은이들의 전인 교육을 지지하였습니다.
명예와 부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청렴하고 기꺼운 겸손,
인간의 본성과 성공의 무상함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
신앙에 뿌리박은 판단에 대한 확신,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역경과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그를 지탱해 준 확신에 찬 내적 힘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덕은 순교로 빛났지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헌신으로
일관된 전 생애에 걸쳐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에서,
그와 같이 신앙과 행동을 완전하게 조화시킨 예를 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평신도들의 생활의 일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평신도들은 참으로 일상의 직업 생활과 사회 생활 안에서 성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소명에 응답하고자, 평신도들은 하느님께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로 인도하는 기회로서 일상 생활을 인식하여야 합니다”(17항).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 같은 조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위대한 영국 정치인의 인품을 특징짓는 요소일 것입니다.
그의 열정적인 공직 생활은 사형 집행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유머를 잃지 않는 소박한 겸손으로 일관되었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한 열정에 이끌려 이러한 높이에 이른 것입니다.
그의 양심을 밝혀 주었던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정치도 도덕에서 분리될 수 없다
는 의식이었습니다. 제가 이미 다른 기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에
인간의 권리는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며, 창조 계획을 바탕으로 하고,
구원 계획의 일부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권리는 하느님의 권리이기도 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1998년 4월 7일 연설).
토마스 모어의 모범이 밝게 빛을 발하였던 것은
바로 양심의 권리를 옹호할 때였습니다.
이단자들에 대한 행동에서 그가 비록
그 시대의 문화적 한계를 반영하기는 하였지만,
그는 도덕적 양심의 가치를 독특한 방식으로 입증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느님 자신의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와 판단은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듭니다”(회칙 「진리의 광채」
[Veritatis Splendor], 58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오늘날에는 “인간이 지닌 고귀한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커지고 있다.
인간은 만물에 앞서고 또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6항).
성 토마스 모어의 생애는 정치 윤리에 대한 근본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국가의 부당한 간섭에서 교회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은 최고의 양심의 이름으로
정치 권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모든 사회 질서의 기본 원리를 발견합니다.
5. 그러므로 저는 성 토마스 모어와 같이
특출한 인물을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는 것은
사회의 선익에 이바지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로 데려다 주는
대희년의 정신과 완전히 일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에게 보내 주신 청원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기꺼이 받아들여,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거룩한 수호 성인으로 정하여 선포하며,
법에 따라 이 범주의 수호 성인들에게 속하는 모든 전례적 영예와 특권을
그에게 부여하도록 명령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인간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23년
2000년 10월 3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6월 22일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ST. PAULINUS of Nola
St. Paulinus a Nola, E
San Paolino di Nola Vescovo
Born:c.354 at Burdigala, Gaul (Bordeaux, France)
Died:22 June 431 of natural causes
Canonized:Pre-Congregation
Paolino = piccolo di statura, dal latino
예닐곱 명의 성인들의 편지에서 칭찬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난 성품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파울리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멜라니아, 마르티노,
그레고리오 그리고 암브로시오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보르도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골 지방과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부자로 손꼽히던 골 지방 로마 총독의 아들이었다.
파울리노는 뛰어난 법률가가 되엇으며 로마 제국에서 몇 가지 공직을 맡았다.
그는 스페인 여인인 아내 데레시아와 함께 젊은 나이에 은퇴하여
문화적인 여가 생활을 즐겼다.
그들 부부는 덕망있는 보르도의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고
스페인에 있는 데레시아의 큰 저택으로 이사했다.
여러 해 동안 아이가 없던 그들에게
아이가 생겼지만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들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고 애덕을 실천하며
스페인에 있는 재산을 거의 다 나누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뛰어난 모범의 결과이겠지만 파울리노는
성탄날에 바르셀로나의 주교에게서 예기치 않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뒤 그는 아내와 함께 나폴리 근처의 놀라로 갔다.
그는 놀라의 펠릭스 성인(축일:1월14일)을 무척 존경했고
이 성인에 대한 신심을 진작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친척들이 모두 당황해할 만큼 자기의 남은 재산을 거의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을 위한 일을 계속했다.
빚을 많이 진 사람과 방랑자, 그 밖에는 여러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는 자기 집의 한쪽 구석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것처럼 살았다.
그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놀라의 주교가 되어 21년 동안 그 교구를 이끌어 갔다.
놀라시가 훈족의 침략을 받자 그는 슬픔에 젖어 말년을 보냈다.
그의 얼마 안되는 작품 가운데에 초기의 그리스도교 혼인 축가가 남아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초기에 힘을 발산해 버리고
일찌감치 은퇴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헌신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파울리노의 인생은 그가 스페인의 자기 소유지에서 편안히 쉬면서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인간은 시도하고 하느님은 마련하신다.
한 사람의 목격자가 파울리노의 마지막 날을 기록했다.
그가 죽기 3일 전에 한 사제가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40은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가 그 가난한 사람의 빚을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심부름꾼이 50은전의 선물을 가져왔다.
마지막 날 저녁 기도를 바치기 위해 불을 켜놓고 있을 때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팔을 뻗으면서 말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를 위해 등불을 마련했습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313년, 콘스탄티노 대제가
자신도 그리스도교에 개종하는 동시에 유명한 밀라노의 칙령으로써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준 다음부터는 국민도 서로 다투어가며
세례를 받는 등 교회는 한때 융성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量的)으로 하는 말이고, 질적(質的)으로는
유감스러운 점이 없는 신자도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행을 따른다는 경솔한 마음에서
별로 교리 공부도 하지않고 입교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그러한 폐풍은 상류 인사층에 더욱 극심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성 본시오 메로비오 바울리노의 양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즉 신분이 원로원 의원이고 귀족이었던 어버지나 어머니는 명칭이 신자이지
그 일상 생활에는 이교도나 다름없는 생활이 엿보였던 것이다.
성 바울리노는 353년 프랑스의 부르도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종교에 냉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아들도 그리스도교적인 좋은 감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첫째 그는 세례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만 세속적인 출세만을 목적으로 당시 대학자이며 대시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오소니오의 지도를 받아가며 열심히 고웁했다.
본래 그는 재주가 많았음인지 학업 성적은 가장 우수해
겨우 25세의 청년으로서 일찍이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그는
경치 좋은 이탈리아의 캄파니아에서 살면서
같은 재산가이며 신앙이 두터운 테레시아라는 스페인 귀부인과 결혼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신앙의 눈을 떴다.
그는 신심이 깊은 아내의 감화로써
열심히 준비해 이때까지 받지 않고 있었던 세례를
고향 보르도의 주교 델피노에게서 받았다.
그때 그는 당시의 위대한 성인 트리의 주교 마르티노도 만나보고
그의 기도로 인해 눈병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기도 했다.
바울리노는 열심히 신앙을 보존하고
세례때 약속한 대로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과 모든 영화를 끊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친척 일가의 놀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집정관의 영직을 내던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가서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고 사랑하는 처자와 같이
검소한 생홣로 들어가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였다.
이런 그의 대변화를 들은 은사 오소니오는 대단히 놀라며 몇 번이나 서간이나 말로써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활발히 활동할 것을 권했으나 바울리노는 그 호의에는 감사하면서도
악마의 유혹이 많은 세속의 높은 지위에 취임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특히 귀한 외아들을 어려서 잃은 후에는 아내와 서로 의논하여 남매와 같이 지내며
정결한 생활을 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전의 대부호는 가난하게 살면서
향락 대신에 자선 사업을 하며 매일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했다.
그러므로 바르셀로나 신자들은 누구나 바울리노의 덕행에 감동하지 않은 이 없어 자꾸만
사제가 될 것을 권했으므로 그도 그 간청에 못이겨 마침내 393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신품 성사를 받게 되었다.
성직자가 되었어도 바울리노의 수도 생활은 결코 허술해지지 않았다.
그는 더욱 수양을 하려고 신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의 놀라시에 가서
자기가 특별히 존경하는 순교자 펠릭스의 묘지 근처에서 살며
호로 세상을 멀리하고 기도와 고행에 전심했다.
바울리노가 그 성인을 공경하게 된 이유는 전에 그가 무서운 형제 살해의 혐의를 받았을때
펠릭스의 전구를 구해 다행히 그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리노의 감탄할 만한 일상 생활이
어느덧 세상에 알려지자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차 그의 덕을 사모하여 모여와 그의 지도를 받으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뿐아니라 409년 놀라 시의 주교가 서거하자
신자 일동은 충심으로 바울리노에게 그 후임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그곳에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취임을 승낙했다.
그의 겸손, 예지, 박애(博愛)는 주교좌라는 높은 촛대위에 놓이게 되자
한층 더 찬란히 세상을 비추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같은 시대의 사람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예로니모 등
쟁쟁한 교부들도 그와 서면으로 연락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유럽에 민족 이동이 일어났을 때 놀라 시에도 처음에는 고트족,
나중에는 반달족이 침입해 마음대로 약탈했다.
그럴 때에 바울리노 주교는 그들의 독수에 걸려 고생하는
이나 노예로 된 불쌍한 이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 지 모른다.
어느 전승에 의하면, 한 노예를 풀어 줄 대금이 부족했을 때에
그는 자기가 대신 노예가 되어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까지 했다고 한다.
놀라시가 야만족 침입의 재앙에서 모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주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리노는 놀라의 주교로 20여년간 알뜰히
그 임무를 완수하고, 431년 6월 22일, 성덕의 상을 얻으러
영원한 환희로 들어갔으며 그의 이름은 지금도 성인 명부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3ad Alypium, 1. 5.6: CSEL 29, 13-14. 17-18)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 당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복되며 지극히 사랑하는 주교님,
귀하는 보잘것 없는 나에게 진실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카르타고에서 돌아온 우리 조카 줄리앙을 통하여 귀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귀하의 탁월한 덕행을 잘 드러내 주어,
내가 귀하의 사랑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틀림없이 세상 시초부터 우리를 예정하신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그분 안에 있었습니다.
미래에 성취해야 할 모든 것도 그분이 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견과 권능으로
우리는 동일한 의지와 신앙의 일치 또는 일치의 신앙을 갖도록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연결되고 영의 계시를 통하여 마주 보기 전에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서나 유일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이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서
당신 사랑을 역사하시는 데 대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미 드립니다.
이렇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강물로부터 당신 도성을 기쁘게 하셨고
이 도성의 시민들 위에 "당신 백성의 으뜸으로" 귀하를 선택하시어 주교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구부러진 나를 바로 세우시고
미천한 나를 땅에서 끌어올리시어 귀하과 같은 지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것은
그분이 귀하의 마음에다 내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시고
귀하와 밀접히 일치시켜 귀하가 나에 대해 지닌 그 사랑의 확신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귀하가 베풀어 준 배려와 호의를 볼 때
나로서는 귀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데 주저하거나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귀하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내 사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에 불쌍한 죄인이었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생명의 공기를 호흡하기 시작하고 쟁기를 잡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귀하는 기도로써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어 내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면 귀하의 공로에 상급을 더할 것입니다.
고통중에 있는 이를- 나는 감히 귀하의 형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
도와 주는 거룩한 사람은
"큰 도성처럼 드높여질 것입니다."
나뉨이 없으신 삼위 일체의 일치와
우리 간의 일치의 표시로 귀하에게 빵 한 개를 보내 드립니다.
귀하가 그것을 드신다면 그 빵은 "에울로기아"(축성된 빵) 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Sir Thomas More - HOLBEIN, Hans the Younger
1527-28. Black and coloured chalks on paper, 3
97 x 299 mm. Royal Collection, London
6월 22일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ST. THOMAS MORE
San Tommaso Moro Martire
Born:1478 at London, England
Died:beheaded in 1535; head kept in the Roper Vault,
Saint Dunstan's church, Canterbury, England;
body at Saint Peter ad Vincula, Tower of London, England
Canonized:1935 by Pope Pius XI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평신도 지도자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가질 수 없다고 한 토마스 모어는
자기 믿음의 대가로 생명을 바쳤다.
1535년 7월 6일, 런던탑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토마스 모어는 헨리8세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영국 교회의 창설을 끈질기게 부인했다.
"4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린 모어는 문학자이며 뛰어난 법률가로서,
신사였으며 네 아이의 아버지로 영국의 수상이었다.
훌륭한 영적 인물이었던 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이혼한 왕의 처사를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로마 교회와 관계를 끊고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는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역죄로 재판을 기다리면서 런던탑에 갇혀 있었다.
그 반역죄란 계승 법령과 영국 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내용의 문서에
서약하지 않은 것이었다.
토마스 모어는 확신을 가지고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계의 공의회를 알고 있지만 자기 양심의 판단에 따르지 않은 것은
오직 한 나라의 공의회뿐"이라고 단언했다.
400년 후인 1935년에 토마스 모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인물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몇몇 성인들은 20세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진다. 최고의 외교관이며 조언자였던
그는 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윤리적 가치관과 타협하지는 않았다.
권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권위에 대한 진정한 충절은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헨리8세 자신도 이것을 잘 알았다. 그는 토마스 모어란 인물이 신중한 사람이며
그의 인격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상인 그를 자기 편에 두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헨리 8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가지 문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토마스가 수상직을 사임하자 헨리 8세는 그를 없애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인이 토마스 모어에게 눈가리개를 하려고 하자
그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처형대의 받침 위에서-그것은 단순한 나무토막이었다-
자기 머리를 쳐들고 잠깐만 기다리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농담을 했다.
나무토막 위에 놓여 있는 자기 수염을 치우고 싶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것(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거운 도끼가 천천히 들려 올라가서 잠깐 동안 공중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테오도르 메이나르, "영웅 인문주의자")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Study for the Family Portrait of Sir Thomas More-HOLBEIN, Hans the Younger
c. 1527. Pen and brush in black on top of chalk sketch, 38,9 x 52,4 cm
Kupferstichkabinett, Öffentliche Kunstsammlung, Basle
인간은 보통 선뜻 눈에 띄는 공훈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앞에는 초자연적 성덕만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자연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겸한 공적을 남긴 사람도 있으니,
그런 이는 물론 세인의 갈채와 아울러 하느님으로부터의 상급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말하려는 성 토마스 모어가 바로 이 같은 분이다.
그는 1480년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강직한 성격으로 지방민의 신망이 두터운 판사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토마스는 엄격한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그 당시 재산의 중직에 있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요한 머턴 추기경의 슬하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의 성품은 곧 추기경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문학을 한다는 이들은 연약하고 게을러
자연 타락의 구렁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런 환경에 휩쓸릴 겨를도 없이
오직 면학에만 열중했다.
이는 엄격한 아버지가 가끔 보내주는 약소한 학비로 그런 방면에
여유를 갖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그의 유년 시절부터 마음속에 굳게 간직한
신앙과 열렬한 기도 생활의 힘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는 다윗 성왕의 시편에서 마음에 맞는 구절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스스로 기도문을 만들어 조석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의 학교 성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수(秀)였다.
특히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여 어려운 문구를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하며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다는 시인 루싱아의 소설 중의 회화 편을 손쉽게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의 입신 출세만을 바라던 아버지는
그를 더 이상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런던에 돌아와 법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의 공명정대한 사건처리 솜씨는 귿 그 지방민들의 깊은 신망을 받게 되어,
불과 25세라는
약관으로 민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민의원이 된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오히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해야된다는 결심아래
그야말로 분골쇄신하여 활약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추가 예산안 작성시에
10만 파운드의 예산액을 3만 파운드로 삭감하려는 논쟁을 벌여
그 결과 불행히도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일단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정의를 위해 싸운 그의 공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한편 그가 법률을 더 깊이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뒤 4년 동안 가끔 가까운 수도원을 찾아
수사들과 같이 고해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웠고
그것으로써 일신상의 덕을 닦았다.
그동안 그는 수사나 혹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를 지도 신부에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낙을 받지 못하고
다만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2년간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했다.
거기서 돌아온 그는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하고 경건하 요안나 골드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모진 바람은 다시 불어왔다.
즉 요안나는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녀의 양육을 위해 토마스는 다시 과부인 알리스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마스의 가정은 신심생활의 거울이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모든 면에 잇어 모범이 되어 매일 미사에 참여함은 물론,
식사때에도 성서 구절을 낭독하고 처자와 더불어 성서에 대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손님을 대접할 때도
얼마나 정성껏 친절을 베풀었던지,
사방에서 찾아든 손님들로 집안이 들끓었으며,
그 중에는 외국손님도 많이 끼어있었다고 한다.
첼시에 별장을 둔 후부터는 더욱 많은 손님을 대접했다.
그러는 동안 토마스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 마침내 대심원장이라는
중직에 오르게 되었다. 국왕 헨리 8세는 그를 신임하여
그에게 프랑스와의 화친 문제등 기타 여러가지 중책을 맡겼으며,
그때마다 그는 대 성공리에 책임을 완수 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를 더욱 더 믿게 되어 1529년 10월에는 그를 재상직에 올려 주었다.
본래 겸허한 토마스는 그 같은 고위 영직을 탐하지 않았으나 국왕의 명이므로
그를 받들어 그 선정에 적극 조력했다.
다음은 그가 대심원장 때의 일화 한 토막이다.
그는 중대한 사건의 결심판결에 앞서
일개 판사에 불과한 노부(老父)앞에 꿇어 올바른 판결을 위한 축복을 빌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책임감에 충실했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같이 국왕의 총애를 받은 토마스는
신(臣)과 민(民)으로서의 모든 영예를 다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결코 국왕의 비도(非道)에 대하여 묵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즉 헨리 8세가 안나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황후와 이혼하고자
모어에게 동의를 청한 때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헨리 8세의 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의 영국 성공회가 시작된 것이지만,
가톨릭적 결혼관은 "주님께서 맺어주신 바를 사라미
능히 이를 풀지 못하느니라"하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국왕에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권유하려 했으나
국왕이 도저히 이를 들어주지 않았기때문에
마침내 사표를 내게 되었다. 물론 왕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토마스의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정적들은 때를 이용하여
여러 자기 모략으로 토마스에게 역적의 죄목을 씌웠다.
토마스의 충성은 세인이 다 알기 때문에,
그런 죄목에 대한 혐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다만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보도 양보치 않을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이것이 국왕의 비위에 거슬리게 되어
그는 즉시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재산까지도 몰수당했다.
그는 최후 판결을 받는 날 눈물겨운 심정으로 고해 영성체하고 미사 참여를 마친 후
일단 신자들에게 이별의 인사를 고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감 1년간, 정적들은 수차에 걸쳐 그의 배교와 번의 (飜意)를 꾀했다.
심지어는 그의 사랑하는 딸 마르가리타를 보내
"피셔 주교님도 국왕의 이혼을 승낙하셨는데 아버지도 마음을 돌리세요"라고
말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다"하며
끝까지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은 사랑하는 아내 알리스가 와서 애걸했다.
남편이 없는 가정이란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눈물로써 토마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알리스,
내가 양심을 어겨서 국왕의 비행에 동의하고 형벌을 면한다 합시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동안 더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소?"
"한 20년쯤은.."
"뭐 20년쯤? 그래 그것 더 살려고 죽어서 영원한 지옥 불을 당해도 좋단 말이오?
그건 너무나 미련한 짓일 뿐이오" 하는 대답뿐이었다.
토마스의 옥중 생활을 편지를 쓰거나 저서를 저술하는 것 등이었다.
"신앙을 위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등은 재감 중에 저술한 서적이다.
얼마 후 그는 펜과 잉크까지도 압수당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기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위로를 삼을 길이 없게 되었고,
가끔 종이 조각에다 숯 부스러기로 편지를 써서 처자에게 소식을 전하곤 했다.
1535년 7월 1일에 토마스에게
추상같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 집행은 6일이었다.
그가 단두대에 섰을 때,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무수한 군중들에게 전래대로 고별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인심을 소란케 한다는 이유로 금지 당하고 말았다.
"나는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간단한 한 마디와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쳤다.
변천 무상함은 세상의 상사인지라,
한때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대 재상이 지금은
역적의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찰나에
아무리 심장이 강철같은 집행인일지라도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토마스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그들 앞으로 가까이 가서 등을 두드리며 "
걱정할 것 없어. 지금은 당신들이 나의 가장 고마운 친구들이야"하며
오히려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깐동안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스스로 단두대에 머리를 눕혀 형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머리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런던 다리 위에 매달아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했다 한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권력에도 굽힐 줄 모르는 철석같은 신앙은
마침내 상급을 받았으니, 즉 193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토마스는
요한 피셔와 더불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근대적인 성인으로 전세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토마스 모어가 옥중에서 자기 딸 마르가리따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English Works of Sir Thomas More, London, 1557, p.1454)
하느님께 내 모든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맡기겠다.
내 사랑하는 마르가리따야, 내 지난 날의 죄를 볼 때 나는
하느님께로 부터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몸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다 내 신뢰를 걸고
또 마음을 다하여 희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은 나를 굳세게 해주시어
나로 하여금 양심을 거슬러 서약하는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재물과 토지와 생명마저 잃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또 국왕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어 아직은 나에게서
자유만을 빼앗도록 하셨다.
이 자유를 나에게서 거두실 때
하느님께서는 이제까지 내 신앙을 북돋아 주시고자 그토록 허다하게 베풀어 주신
당신의 커다한 영적 은혜들 가운데서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생각토록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불신할 수없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국왕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를 대하게 하시어
그가 나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의 죄 때문에 응당히 받아야 할것 이상으로
고통받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의 은총이 나로 하여금 인내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쩌면 기쁜 마음으로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실 것이리라고 확신한다.
내가 고통을 잘 참아 낸다면
이것을 내 인내심의 공로를 훨씬 초월하는 주님의 쓰라린 수난의 공로와 결합시키시어,
내가 연옥에서 당할 고통을 줄여 주시고 천상에서 받을 상급을 늘려 주실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내 비록 허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지만,
절대로 하느님을 불신하지 않겠다.
나를 쓰러뜨릴 정도의 두려움을 내가 느끼어 되어도
성 베드로에게 생긴 일을 기억하겠다.
돌풍이 일자 약한 믿음 때문에 물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한 그가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도움을 간구한 것처럼
나도 그를 본받아 그리스도께 간구하겠다.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손을 뻗치시어 폭풍에 휩싸인 이 바다에서
나를 붙들어 올리시어 물에 빠져 들지 않게 하시리라.
그런데 내가 베드로를 답습하여 나도
그처럼 유혹에 넘어져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게 된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내가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혹시라도 빠진다면
유익보다는 해가 되게 해주기를)
그때에도 베드로를 인자하게 굽어보신 것처럼
나도 연민에 찬 시선으로 굽어보시고 다시 일으키시어
내 양심의 진실을 다시금 고백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내 잘못에 대한 수치와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여하튼 나는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마르가리따야, 하
느님께서는 내 잘못이 아니라면 결코 버림받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실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자 된다 해도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찬미와 영광이 될 것이다.
마르가리따야,
하느님이 너그러우신 자비는 이 불쌍한 영혼을 구하시고
내가 그 자비를 찬미할 수 있게 해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이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생길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겉보기에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는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92-397쪽.
성 토마스 모어 저, 성찬성 역, 고난을 이기는 위안의 대화, 서울(가톨릭출판사), 2007년.
제임스 몬티 저, 성찬성 역, 성 토마스 모어, 서울(가톨릭출판사), 2006년.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요한 피셔 성인과 토마스 모어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195-209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4권 - '모어, 토마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7년, 2700-2702쪽.
한스큉 저, 장익 역, 세속 안에서의 자유 - 토마스 모어, 왜관(분도출판사), 1989년.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토마스 모어 순교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50-151쪽.
-(가톨릭홈에서)-
정직함
‘사계절의 사나이’로 불리는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 때
대법관이자 법률가, 신학자, 철학자, 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위나 재능보다도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헨리 8세는 토마스 모어가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의 딸(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적법한 왕위 계승자임을
공표하는 법령에 서명하기를 거절하자 그를 옥에 가두었고,
설득에 실패하자 결국은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영국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켜는 의도가
그 서류에 담겨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자신이 그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왕의 좋은 신하로 죽지만 그보다 먼저 하느님의 착한 종이다.”
그는 법률가였고 정치인이었으므로
법에서 빠져 나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날마다 강도와 불륜,
사기 사건으로 가득 찬 신문을 읽는다.
어떤 때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하고 의심하기도 한다.
토마스 모어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성인이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정직한가?
타협의 기준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나의 양심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예닐곱 명의 성인들의 편지에서 칭찬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난 성품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파울리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멜라니아, 마르티노,
그레고리오 그리고 암브로시오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보르도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골 지방과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부자로 손꼽히던 골 지방 로마 총독의 아들이었다.
파울리노는 뛰어난 법률가가 되엇으며 로마 제국에서 몇 가지 공직을 맡았다.
그는 스페인 여인인 아내 데레시아와 함께
젊은 나이에 은퇴하여 문화적인 여가 생활을 즐겼다.
그들 부부는 덕망있는 보르도의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고
스페인에 있는 데레시아의 큰 저택으로 이사했다.
여러 해 동안 아이가 없던 그들에게 아이가 생겼지만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들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고 애덕을 실천하며
스페인에 있는 재산을 거의 다 나누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뛰어난 모범의 결과이겠지만 파울리노는
성탄날에 바르셀로나의 주교에게서 예기치 않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뒤 그는 아내와 함께 나폴리 근처의 놀라로 갔다.
그는 놀라의 펠릭스 성인(축일:1월14일)을 무척 존경했고
이 성인에 대한 신심을 진작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친척들이 모두 당황해할 만큼 자기의 남은 재산을 거의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을 위한 일을 계속했다.
빚을 많이 진 사람과 방랑자, 그 밖에는 여러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는 자기 집의 한쪽 구석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것처럼 살았다.
그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놀라의 주교가 되어 21년 동안 그 교구를 이끌어 갔다.
놀라시가 훈족의 침략을 받자 그는 슬픔에 젖어 말년을 보냈다.
그의 얼마 안되는 작품 가운데에 초기의 그리스도교 혼인 축가가 남아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초기에 힘을 발산해 버리고
일찌감치 은퇴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헌신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파울리노의 인생은 그가 스페인의 자기 소유지에서 편안히 쉬면서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인간은 시도하고 하느님은 마련하신다.
한 사람의 목격자가 파울리노의 마지막 날을 기록했다.
그가 죽기 3일 전에 한 사제가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40은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가 그 가난한 사람의 빚을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심부름꾼이 50은전의 선물을 가져왔다.
마지막 날 저녁 기도를 바치기 위해 불을 켜놓고 있을 때
그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팔을 뻗으면서 말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를 위해 등불을 마련했습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313년, 콘스탄티노 대제가 자신도
그리스도교에 개종하는 동시에 유명한 밀라노의 칙령으로써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준 다음부터는 국민도 서로 다투어가며
세례를 받는 등 교회는 한때 융성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量的)으로 하는 말이고, 질적(質的)으로는
유감스러운 점이 없는 신자도 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진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행을 따른다는 경솔한 마음에서
별로 교리 공부도 하지않고 입교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그러한 폐풍은 상류 인사층에 더욱 극심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성 본시오 메로비오 바울리노의 양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즉 신분이 원로원 의원이고 귀족이었던 어버지나 어머니는 명칭이 신자이지
그 일상 생활에는 이교도나 다름없는 생활이 엿보였던 것이다.
성 바울리노는 353년 프랑스의 부르도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종교에 냉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아들도 그리스도교적인 좋은 감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첫째 그는 세례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만 세속적인 출세만을 목적으로
당시 대학자이며 대시인으로 평판이 높았던
오소니오의 지도를 받아가며 열심히 고웁했다.
본래 그는 재주가 많았음인지 학업 성적은 가장 우수해
겨우 25세의 청년으로서 일찍이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집정관으로 임명되었다.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그는
경치 좋은 이탈리아의 캄파니아에서 살면서
같은 재산가이며 신앙이 두터운 테레시아라는 스페인 귀부인과 결혼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신앙의 눈을 떴다.
그는 신심이 깊은 아내의 감화로써
열심히 준비해 이때까지 받지 않고 있었던 세례를
고향 보르도의 주교 델피노에게서 받았다.
그때 그는 당시의 위대한 성인 트리의 주교 마르티노도 만나보고
그의 기도로 인해 눈병이 치유되는 은총을 받기도 했다.
바울리노는 열심히 신앙을 보존하고
세례때 약속한 대로 마귀와
그의 모든 행실과 모든 영화를 끊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친척 일가의 놀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집정관의 영직을 내던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가서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에 기부하고 사랑하는 처자와 같이
검소한 생홣로 들어가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였다.
이런 그의 대변화를 들은 은사 오소니오는 대단히 놀라며 몇 번이나 서간이나 말로써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활발히 활동할 것을 권했으나
바울리노는 그 호의에는 감사하면서도
악마의 유혹이 많은 세속의 높은 지위에 취임할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특히 귀한 외아들을 어려서 잃은 후에는 아내와 서로 의논하여
남매와 같이 지내며 정결한 생활을 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전의 대부호는 가난하게 살면서
향락 대신에 자선 사업을 하며 매일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도모했다.
그러므로 바르셀로나 신자들은 누구나
바울리노의 덕행에 감동하지 않은 이 없어 자꾸만
사제가 될 것을 권했으므로 그도 그 간청에 못이겨 마침내
393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신품 성사를 받게 되었다.
성직자가 되었어도 바울리노의 수도 생활은 결코 허술해지지 않았다.
그는 더욱 수양을 하려고 신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탈리아의 놀라시에 가서
자기가 특별히 존경하는 순교자 펠릭스의 묘지 근처에서 살며
호로 세상을 멀리하고 기도와 고행에 전심했다.
바울리노가 그 성인을 공경하게 된 이유는
전에 그가 무서운 형제 살해의 혐의를 받았을때
펠릭스의 전구를 구해 다행히 그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리노의 감탄할 만한 일상 생활이
어느덧 세상에 알려지자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차 그의 덕을 사모하여 모여와 그의 지도를 받으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뿐아니라 409년 놀라 시의 주교가 서거하자
신자 일동은 충심으로 바울리노에게 그 후임이 되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그곳에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취임을 승낙했다.
그의 겸손, 예지, 박애(博愛)는 주교좌라는
높은 촛대위에 놓이게 되자 한층 더 찬란히 세상을 비추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같은 시대의 사람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예로니모 등
쟁쟁한 교부들도 그와 서면으로 연락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유럽에 민족 이동이 일어났을 때 놀라
시에도 처음에는 고트족, 나중에는 반달족이 침입해 마음대로 약탈했다.
그럴 때에 바울리노 주교는 그들의 독수에 걸려 고생하는 이나
노예로 된 불쌍한 이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 지 모른다.
어느 전승에 의하면, 한 노예를 풀어 줄 대금이 부족했을 때에
그는 자기가 대신 노예가 되어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까지 했다고 한다.
놀라시가 야만족 침입의 재앙에서 모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주교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리노는 놀라의 주교로 20여년간 알뜰히 그 임무를 완수하고,
431년 6월 22일, 성덕의 상을 얻으러
영원한 환희로 들어갔으며 그의 이름은 지금도 성인 명부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3ad Alypium, 1. 5.6: CSEL 29, 13-14. 17-18)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 당신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복되며 지극히 사랑하는 주교님,
귀하는 보잘것 없는 나에게 진실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카르타고에서 돌아온 우리 조카 줄리앙을 통하여 귀하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귀하의 탁월한 덕행을 잘 드러내 주어,
내가 귀하의 사랑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틀림없이 세상 시초부터 우리를 예정하신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그분 안에 있었습니다.
미래에 성취해야 할 모든 것도 그분이 지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견과 권능으로
우리는 동일한 의지와 신앙의 일치 또는 일치의 신앙을 갖도록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연결되고 영의 계시를 통하여 마주 보기 전에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어디서나 유일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이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당신의 모든 종들 안에서
당신 사랑을 역사하시는 데 대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미 드립니다.
이렇게 하시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강물로부터 당신 도성을 기쁘게 하셨고
이 도성의 시민들 위에 "당신 백성의 으뜸으로"
귀하를 선택하시어 주교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구부러진 나를 바로 세우시고
미천한 나를 땅에서 끌어올리시어 귀하과 같은 지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하는 것은
그분이 귀하의 마음에다 내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시고
귀하와 밀접히 일치시켜 귀하가 나에 대해 지닌
그 사랑의 확신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귀하가 베풀어 준 배려와 호의를 볼 때
나로서는 귀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데 주저하거나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귀하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내 사정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는 전에 불쌍한 죄인이었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생명의 공기를 호흡하기 시작하고 쟁기를 잡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귀하는 기도로써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어 내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면
귀하의 공로에 상급을 더할 것입니다.
고통중에 있는 이를- 나는 감히 귀하의 형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
도와 주는 거룩한 사람은
"큰 도성처럼 드높여질 것입니다."
나뉨이 없으신 삼위 일체의 일치와
우리 간의 일치의 표시로 귀하에게 빵 한 개를 보내 드립니다.
귀하가 그것을 드신다면 그 빵은 "에울로기아"(축성된 빵) 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