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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29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Berardus 2022. 5. 28. 05:26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29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제1독서 사도 1,1-11

제2독서 에페 1,17-23 

복음 루카 24,46-53

우리의 예루살렘


“예루살렘에 머물러라” 주님의 당부
크게 기뻐하며 굳건히 지킨 제자들
주님 모시고 사랑 전하는 삶을 살며
매일 하느님 찬미하는 직무 실천하길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을 기념하며

부활 7주일을 맞이합니다.

사순 시기 동안 고난을 겪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 수난에 동참했던 기억이 이리 선연한데

벌써 여섯 주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 동안 단식하고 금육하며 고행하였고

수난과 관계된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아팠습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사랑이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그 마음, 변치 않으셨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동일인입니다.

더욱이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으니,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거푸 듣는 셈입니다.

루카 사도는 그날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모두 이루신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들려주신 마지막 당부를 전하는데요,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신 것으로 전하고

복음서에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고 이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곧 그 자리에 머무르는 일일 테니 흠잡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제자들이 오롯이 주님의 당부를 ‘말씀대로’ 따랐다는 점,

곧이곧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지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딴지를 걸기 일쑤였으니 말입니다.

그 중차대한 주님의 부활 예고마저도

귓전으로 흘려들은 탓에 우왕좌왕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분명하게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라

하셨음에도 갈팡질팡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신 대로”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라고,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무용지물, 잔뜩 풀이 죽어서 귀향을 결정하고

고작 고기나 잡겠다며 우르르 몰려다녔으니,

주님의 가르침은 깡그리 잊었던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오늘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에

“크게 기뻐하며” 굳건히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 변화입니다.

루카 사도는 신앙이란 그렇게 영혼이 어두워지고

사랑의 메마름에 빠지는 상황이 되더라도 견디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더러 의심하고 주저하더라도

다시 주님을 향하는 것만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렇듯 한시적인 땅의 삶을 살아가기에 주님 계신 그곳을 사모하며 지냅니다.

천년만년 이 땅에서 살 것처럼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벌써 십자가 고난 묵상에 심취했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어졌다면 곤란합니다.

사순의 은총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는 결단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지낸다면 야단입니다.

다시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꾸며 땅에서의

성공과 영광만을 고대한다면 허사입니다.

온종일 “고기 잡으러” 갈 궁리만 하고 살아가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야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음미하는 구경꾼에 불과한 까닭입니다.

온 것을 바쳐 거행되는 주님의 미사에 관람객으로 살아간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매우 당연한, 마땅한 결과로 여기는 불손한 모습이기에

결국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는 죄를 범하는 못난 처사라는 얘기입니다.(갈라 2,20-21 참조)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마흔 날 동안,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흩어진 믿음을

동여 주시느라 무지무지 애를 쓰셨습니다.

기죽은 제자를 엠마오 길에서 챙기시고 ‘티베리아스 호수’에서는

제자들의 아침 식사까지 마련하시며 토닥여주셨습니다.

아,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헛걸음마저도 은총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둘러둘러 멀리 돌아서 딴짓을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이끌어주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믿음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주님을 찬미하는 마음가짐이 필수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매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고난과 핍박이 있더라도 예루살렘에 머무는 결단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결단코 주님께서 승천하신 하늘을 쳐다보며

하릴없는 감상에 젖어 드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모두 완수하셨습니다.

드디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의 제자인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지낼 것을 명하십니다.

명하실 뿐만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채워주시며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앞장서도록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함께 하시며 축복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 약속의 철저한 이행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애썼던

그 모든 희생의 시간에는 반드시 하느님 나라가

선물될 것이라는 벅찬 선포가 담겨 있습니다.

때론 의심하고 때론 주저하면서도 거듭 희망하는

믿음인에게 들려주는 하늘의 응원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오늘도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우리의 예루살렘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입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직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 마음에 주님의 예루살렘이 우뚝하기를, 열망합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한주간 전례]

2022년 5월 30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달리

최후의 만찬 뒤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긴 담화를 전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가르침,

그분께서 남기신 유일한 계명, 성령에 대한 약속 등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예수님의 이 말씀들에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16,18) 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제자들의 반응이 사뭇 다르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무지와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제자들조차

결국에는 그분을 버리고 각자의 길로 떠나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결국 헛된 것임을,

그저 마음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까맣게 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와 나약함을 익히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위로의 말도 함께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과 맞설지 모르지만,

그 세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기신 분을 우리가 따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부족하지만, 그래서 너무도 자주 무너져 내리는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외치게 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31일 (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해마다 5월 31일에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고자 함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천사의 말을 듣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며, 이러한 이웃 사랑은 위대한 두 인물이 만나는 자리를 만든다.

[복음묵상] 루카 1,39-56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이 둘의 만남은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였지만 성령에 힘입어 아이를 갖게 된 마리아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하느님의 손길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였지만,

자신들의 남은 인생 전부를 그분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만나 자신들에게 섭리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더 큰 확신과 위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섭리에 끝까지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마리아이며 엘리사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 끊임없이 머무르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만남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고 있는지요?

한 신앙인으로서 다른 신앙인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 주는 만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억하며,

우리의 만남이 신앙 안에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

힘과 용기가 되어 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6월 1일 (수)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유스티노 성인은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던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 토론을 하고

이를 토대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냈다.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기도 한 성인은 165년 무렵

다른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7,11ㄷ-19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전하는 고별 담화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바오로는 그들이 자신과 양 떼를 잘 돌보고

늘 깨어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 안에

굳건히 서 있기를 염원하며 마지막 당부를 남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서로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흐느껴 울고 포옹한 다음,

그들은 바오로를 배웅하며 떠나 보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서로서로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장면은 큰 감동을 줍니다.

한편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신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거룩하신 아버지의 일치된 관계처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로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바치시는 이 기도는 기쁨에 차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구원, 영원한 생명이 주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마지막 여정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이 기쁨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제자들도 이를 충만히 누리기를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당신 제자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일치하며 바치신 이 기도에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시선과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리면, 마땅히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 또 우리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나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보살핌에 응답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7,20-26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세 차례에 걸친 험난한 전교 여정에 이어서 예루살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전한 바오로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땅끝인 로마에 가서 당신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동시에 그에게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위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 또한 아버지 안에 계시듯,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머물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노래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염원은 “제 안에”, “아버지 안에”, “우리 안에”,

“그들 안에”, “저와 함께”와 같은 반복되는 표현들에서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 과연 어떻게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주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고,

오늘도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내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십자가와 죽음, 성체와 사랑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과 일치의 하느님 안에 머물며 주님을 깊이 체험한 이는

이 좋으신 분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3일 (금)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묵상]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자신 있게 답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이 같은 대화는 세 차례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는

흔히 아가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사랑하다) 동사가 쓰이는데,

베드로의 응답에서는 우애 또는 인간적 친밀함과 더 연결되는

‘필레오’(사랑하다, 좋아하다, 친구가 되다) 동사가 쓰인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는 예수님께서도 ‘필레오’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같은 단어로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높이를 맞추신 듯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향한 사랑과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다른가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으로 연결되고,

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

곧 ‘예수님의 어린양들을 잘 돌보는 것’에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형제들을 보살피고 섬기며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에서 완성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나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완전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도 그것을 몸소 증언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신 구원자이시며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4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21,20-25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을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끝까지 전하고자 하였던

“이스라엘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행전은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로마에서 바오로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친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사명에도 들어맞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느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바오로 사도가 전한 이스라엘의 희망이며, 온 인류의 희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의 선포는 교회 역사 안에서 사도들과 부활의 증인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집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지막인

요한 복음 21장 20-25절은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증언되고

복음서가 기록되었으며 공동체 안에서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을 다시 한번 떠올립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아버지 하느님의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기록된 말씀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예수님. 그분께서 바로 우리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우리를 먼저 초대하셨고,

이제 모든 이에게 이 은총의 선물이 전해지도록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부르십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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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장미를 비롯하여 다양한 꽃들이 수놓은 요즘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성모의 밤 행사가 마무리 됩니다.

성모님께 드리는 묵주기도 행렬이
계속 이어지기를 나부터 실천해 봅니다.

 

-Berard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