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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성 요한 네포묵 사제 순교자 / 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 /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Berardus 2022. 5. 15. 15:34

 

 
5월 16일
성 요한 네포묵 사제 순교자

St. Joannes de Nepomk, M
St. John Nepomucene
Saint John of Nepomuk
Born :c.1340 as John Wolflin at Nepomuk, Bohemia
Died:burned, then tied to a wheel and thrown off a bridge
 into the Moldau River on 20 March 1393;
on the night of his death, seven stars hovered over the placed
 where he drowned
Beatified:31 May 1721 by Pope Innocent XIII
Canonized:19 March 1729
 
 
보헤미아의 네포묵에서 태어난 그는
 가문 이름인 뵐플라인 대신에 고향 이름을 따서 자신의 별명으로 삼았다.
그는 프라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즉시 프라그의 대주교 요한 젠젠슈타인의 총대리로 발탁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왕비의 고해신부였는데,
국왕 벤체슬라오가 고해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하였을 때
거부하므로써 미움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왕과 대주교 간의 논쟁에도 휘말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대주교와 요한이 어느 수도원 원장 선거에 참석하고 있을 때,
국왕이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참살당하고, 프라그의 몰다우강에 던져졌다.
1729년에 시성되었고,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이자 고백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네포묵의 성 요한의 초상은 보통 사제 복장 위에 소백의와 영대를 하고
오른손에 십자가를 들고 왼편에 입을 다문 모양을 그린다.
 
그 이유를 알려면 루마 순교록을 보면 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져 있다.
"네포묵의 성 요한은 고해의 비밀을 누설하라는 강요를 당하고도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에 몰다우 강에 던져져 용감한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이와 같이 그는 고해의 비밀을 지킨 성인으로서 유명하다.
이 성인은 1350년경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방의 네포묵에서 태어나
가문 이름인 뵐플라인 대신에 고향 이름을 따서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사제를 지원해 열심히 법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박사 학위를 획득한 요한은 사제가 되고 나서는
대주교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맡아보며 나라의 수도 프라하에서 강론가 및
 고해 신부로서 충실히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보헤미아를 통치하고 있던 벤첸슬라오 1세라는 왕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지만 타락의 길을 걸었고,
성격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의 왕비 요안나는
그와 반대로 경건 온순하며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만 낙을 붙이고 사는 부인이었다.
그러던 중에 성인 요한은 왕비 요안나의 고해 신부로 선택되었다.
 
 
그런데 왕은 악으로서인지 호기심으로서인지
하루는 요한을 대령시키고나서 왕비가 무슨 고해를 했는지 말해 보라고 명했다.
요한은 이런 난폭한 왕의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으나 곧 정장을 하고 위엄있게 대답했다.
 
“성스러운 고해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엄히 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처럼 명하신 것을 순종치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런 단호한 거절의 말을 듣자
 벤첸슬라오 왕은 대노해 즉각 요한에게 갖가지 고문을 가하게 하고
친히 참혹하게도 불에 달은 쇠로 그의 옆구리를 지지고
거의 완전한 데가 없을 만큼 그의 몸을 상하게 했으나
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체의 학대를 꿋꿋이 인내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왕은 그의 손을 뒤로 결박시키고 몸을 가재처럼 구부려 놓고 발을 머리에 잡아매어
몰다우 당의 가루르 다리 위에 싣고 가서 거기에서 소리를 지르며
 수중에 던지게 함으로써 물속에 생매장을 했던 것이다.
 
 
그 날 밤, 성 순교자의 유해가
가라앉은 부근에는 이상하게도 별과 같이 광채가 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그 유해를 발견하고 대성당으로 운반해 정성껏 안장하고
곧 고해 성사의 신성함을 옹호한 순교자로서 특별한 공경을 드리기 시작했다.
 
네포묵의 요한이 성인품에 오른 것은 1729년 3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시대였다.
10년 전에 시성 조사가 행해지던 때에 그의 무덤을 열어 시체를 검사하니
원체 3백년 이상이나 경과되었으므로 전신은 모조리 다 썩어있었지만
혀만은 마른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고해의 비밀을 지킨 성인의 충실함에 대한
하느님의 존귀한 보수의 표시라고 기뻐하며 정성스럽게 황금의 성광에 모셔
성당의 보물로서 영구히 보존했던 것이다.
또한 이 성인은 다리 위에서 물속에 던져져 순교한 점에서 다리의 성인이라 칭하고
 수많은 다리 위에 그의 초상을 모시게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이자 고해자들의 수호 성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사경신성성
 
성체신비 공경에 관한
예부성성 훈령
Eucharisticum Mysterium
 
35. 고백성사와 영성체
성체성사가 “우리를 일상 허물에서 건져주고
 중한 죄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예방제(禮防劑)"와 같은 것으로 신자들에게 소개되고,
미사 중 통회의 부분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법도 제시되어야 한다.
“영성체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1고린 11,28)하신 훈계를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교회의 관습에 따라 자기가 대죄 중에 있음을 의식한다면 아무리 통회한다 하여도
미리 고백성사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감히 성체를 모시러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다급한 경우에 고백신부를 만나지 못한다면 먼저 완전한 통회를 발하여야 한다”
신도들은 언제나 미사 집전 밖에서 고백성사 받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다.
 
특히 정한 시간을 이용하여 이 성사가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그들에게 참된 유익이 되며,
그들이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데에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매일 또는 자주 영성체하는 이들에게는 각기 그 처지에 따라 적당한 때에
고백성사를 받도록 가르쳐야 하겠다.
-(가톨릭홈에서)-
 
 


 

 

5월 16일

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


St. Andreas Bobola, M

St. Andrew Bobola, SJ M (RM)

Sant’ Andrea Bobola Martire

Society of Jesus. Jesuits

Born:30 November 1591 at Sandormir, Poland

Died:beheaded at Janow on 16 May 1657 at Pinsk;

 buried at the Jesuit school in Pinsk,

but his grave was forgotten when the Jesuits

 were forced to abandon the town;

he later appeared in visions to the rector of the school, pointing out his grave;

relics translated to Polosk in 1808; body found incorrupt;

later taken to Moscow by the Bolsheviks; taken to Rome in

 1922; currently entombed at the Jesuit church in Cracow, Poland

Beatified:30 October 1853 by Pope Pius IX

Canonized:17 April 1938 by Pope Pius XI

 

 

안드레아 보볼라는 폴란드 예수회원이었는데,

그는 핀스크 근교 야노브에서 코싹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참고 "플롯스크의 요사팟")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1580-1623)축일:11월12일.게시판1465번.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축일:11월13일.게시판1532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예부성성(禮部聖省)은 말하기를

 "순교 조사를 무수히 했으나 그 형벌의 잔학성에 있어

안드레아 보볼라보다 더한 것은 아직 들어본 일이 없다."했다.

그렇지만 그의 시성은 비교적 지연되었다.

그가 순교한지 3백년이 경과한 1938년 4월 17일, 예수 부활 축일을 택하여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성인반열에 올리게 되었다.

 

안드레아 보볼라는 1591년에 폴라든의 산도미루 주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귀족으로 조상부터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이며,

그 백부도 교회를 위해 매우 힘쓴 분으로,

안드레아가 어려서 입학한 예수회 운영의 학교도 그의 기부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런 가문에 태어난 안드레아도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공경하는마음이 두터웠고

21세에 예수회에 들어가 신학교를 마치고, 32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바로 그때 이교도들이 교회를 압박하고 주교 성 요사팟을 암살한 사건이 있었다.

 

 

안드레아는 교회의 적들을 꼭 회심시키려고 위르나 및 그 부근을 순회하며,

그가 특히 연구한 호교론을 힘기울여 설교하며,

일부러 상대방이 존경하는 성 바실리오의 저서를 인용해 그들을 계몽함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임에는 다만 학문과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므로, 그는 이 은총을 얻기 위해 기도와 고행에 노력하며,

그러한 목적으로 맨발로 거닐며, 설교 전에는 꼭 단식을 했다.

그리고 그는 죄수를 방문애 이들을 위로하고, 병자들을 찾아서는 이들을 격려하고

그 영혼 구원을 위해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1625년부터 1629년까지 폴란드에는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했는데,

이때 안드레아는 생명을 내걸고 수명의 형제(수사)들과 같이 이 병의 간호에 눈부신 대활약을 했다.

 

이 같은 희생이 하느님의 눈에 안 들리가 없었다. 이단자들이 속속 교회에 귀화하는가 하면,

때로는 한 마을이며, 한 도시가 전부 귀화하는 정도였다.

이리하여 안드레아의 헌신적인 활동은 마침내 전국에 평판이 높아가고,

신자들은 그를 영혼의 사냥꾼이라 칭찬하는가 하며,

이단자들은 그를 영혼의 도적이라고 증오했고 그들의 앙들은 길거리에 숨었다가

그가 지나갈때 돌팔매질을 하는 형편이었다.

 

안드레아는 이렇게 위험을 겪으며 25년간 교회를 위해 동부서주했다.

그리고 1667년에 러시아 군대가 풀란드에 침입하자, 그들은 지빙의 이단자와 결탁해

가톨릭 신자를 살해하고 수도원, 교회를 파괴하며,

제구와 제복을 모독하고, 더욱이 신부나 수사들을 보기만 하면 용서없이 학살했다.

이리하여 당시의 폴란드는 ’순교자의 나라’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때 안드레아는 신자들과 피난해 핀스크 시까지 왔지만,

그 지방의 이교도들에게 밀고되었음을 알고

다시 피해서, 5월 16일 아침에 야노 시 부근 페렛디르 성당에서 미사를 지냈는데,

 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러시아 병정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신자들의 권유대로 마차를 타고 피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되어,

그는 마침내 각오하고 마차에서 내려 땅에 꿇어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주여! 당신 의향대로 이루어지이다."

러시아 병정들은 그를 잡아 옷을 벗기고 나무에 붙잡아매고 채찍이 부러지도록 때린 후,

큰 가지 중간에 매달아 두 마리의 말로 끌어 그대로 시내에 있는 대장한테 데리고 왔다.

 

그러자 대장은 극도로 위협하며 "너는 라틴(가톨릭이라는 것)신부냐?"고 물었다.

"예, 나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나는 태생이 가톨릭이니 죽어도 신앙은 버릴 수 없습니다"하고

안드레아 사제는 대답했다.

병졸들은 그의 눈알을 뺐다. 다음에는 벌거벗기고 평상에 눕혀놓고

시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옆구리를

지지며 조롱을 가한 후, 머리와 등의 가죽을 벗기고 코와 귀를 베어내고, 목에 구멍을 뚫고 혀를

그리로 뽑아내는 등 갖은 잔악한짓을 다하고, 인사불성이 되니 쓰레기통에 내버렸다.

얼마 후 고통을 겪은 끝에 마침내 그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게 되었다.

 

그때 안드레아의 유해는 기이한 천상적 광채를 발했다 한다.

곧 신자들이 공손히 그 유래를 핀스크시에 모셔가 예수회 수도원 공동묘지에

 정성스럽게 장례를 지냈다.

뒤에 그의 전구로 인해 여러 기적이 일어났고, 이에 1853년에 시복,

 1938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안드레아 보볼라(Andreas Bobola)는

 1590년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622년 빌나(Vilna, 현재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성 카시미루스(Casimirus)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1630년

 종신서원을 한 뒤 브로뷔스크(Brobuisk)에 있는 예수회의 총장이 되었다.

   1636년 성 안드레아는 리투아니아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라드지웰(Radziwell) 왕자로부터 벨로루시(Belarus)의 핀스크(Pinsk)에 있는

 수도원을 제공받아 개신교도들과 분리주의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1657년 5월 10일 성 안드레아는 두 명의 코사크인(kazak)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안드레아를 때리고 묶어서 말의 안장에 매달고는 고문 장소까지 끌고 갔다.

그는 그곳에서 갖은 고문 끝에 참수하였다. 그의 유해는 핀스크에 모셔졌다가

폴로츠크(Ploltsk)로 이장되었다.

그는 1853년 10월 30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 1938년 4월 17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예수회는 어떤 수도회인가?

 

1. 예수회의 기원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 부터 유래한다.

그들의 시대는 16세기의 대격변기였고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성 이냐시오가 ’주님안의 벗들’이라고 부른 그의 동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찾았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냐시오 성인을 통해서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가운데

새로운 생활양식을 일으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공동으로 갖게된 비젼안에서 고유한 예수회의 생활양식이 자라났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가진 성직 수도회가 결성되었다.

예수회는 1540년에 사도좌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서 탄생하였다.

 

2. 예수회의 행동양식

예수회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데 있다.

더우기 그 모든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 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예수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며,

예수회를 수도적이면서 특히 사도적인 단체로 만든다.

예수회의 사도적 활동은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하고 제한없는 기동성을 요구하며

더 어려운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따라서 교회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응해 어디나 가서 활동할 자유를 얻기 위해,

이전의 전통적인 수도생활 양식 안에 있던 여러가지 방해 요소들을

과감히 포기하여 근본적으로 쇄신된 수도생활 양식이 성립되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靈神修練)을 통해 관상한 그리스도,

즉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그리스도는 예수회원 모두에게 삶과 일의 원형이 되시며,

또한 각자의 상황안에서 사도적 적응성을 가지고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선택하도록 재촉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회원은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관상가가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의 특별한 유대속에서 교회와 함께하는 정신으로 봉사한다.

예수회원은 무상으로 봉사할 마음을 가지며,

기도로써 길러지고 체득된 식별의 감각을 지니고 세상안에서 활동한다.

예수회 전통은 봉사의 질과 자기도야에 있어 엄격함을 유지하여 왔으며,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결한 감각으로 참으로 인간다운 것을 존중한다.

예수회원의 행동양식은 외면상으로는 평범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목적의 탁월한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

 

3. 오늘날의 예수회원

예수회는 그 시대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영감을 받아

거기에서 사도적 활동력을 보존할 통찰을 길어 내었다.

따라서 우리시대 인간들의 염원과 필요를 보되 그리스도의 눈으로 봄으로써,

오늘날의 예수회원들은 스스로의 신원과 사명을 자각한다.

오늘의 예수회원은 이냐시오와 같이 ’예수의 벗’으로 부름받았음을 인식하면서,

’주님 안의 벗들’인 동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께 결속하여,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투쟁인

신앙의 봉사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 구현에 헌신하는 사명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다.

예수회원은 세가지 서원을 통해 이러한 봉사에 필요한 사도적 자유를 얻어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면서 세계의 현실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예수회 성소실홈에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7월31일.인창동성당게시판129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THE HOLY NAME OF JESUS

예수 성명 축일:1월3일.게시판1550번.

 

IHS(JHS)의 정확한 뜻은?

 

오늘 우리는 글을 쓰는 데 종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찰흙판, 암벽, 나무판, 파피루스지, 양피지 등에 글씨를 써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들은 (성서, 전례, 교부학, 교회사 등의 내용을 가진 문서들)

주로 파피루스지나 양피지에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비싼 가격이어서,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을 서서히 약자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출판은 한 필경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쓰는 것이었고,

또 다시 한권의 책이 있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베껴써야 해습니다.

아까의 경제적 이유 이외에 적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옮겨쓰기 위해서도

 약자들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4세기부터 발견되는 약자들은 DS, IHS (JHS), XPS (XPC), SPS 등입니다.

그 뜻은 DS = DEUS (하느님), IHS (JHS) = IESUS

 (혹은 JESUS; 예수), XPS (XPC) = CHRISTUS (그리스도),

SPS = SPIRITUS (영; 성령)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DS, SPS 와 달리

 IHS, XPS 는 자신의 라틴어 단어와 잘 합치하지 않는 듯 보이는데,

사실 IHS 는 희랍어 IHSOUS (예수, 소문자로 적을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에서 유래하고,

XPS 는 희랍어 xpistos (그리스도) 에서 유래합니다.

이것은 이 두 약어 (IHS, XPS) 가 교회가 공식어로 라틴어를 채택하기 이전,

희랍어를 사용하던 시대부터 이미 약어로 사용되던 것이 유산으로 남겨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현대에도 (영어 등) 사용하는 & 도 et (그리고)를 단순화시켜 적은 것입니다.

 

한편, IHS에 대하여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의 약자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라틴어 약어가 더 이상 널리 사용되지 않게된 시대

(인쇄술의 발달로 손으로 책을 베끼던 작업이 끝난 시대)에 잘 모르고 덧붙였던 해석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라 추정됩니다.  

 

참고도서: G. Battelli, Lezioni di Paleografia,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p. 101.

-<장신호 신부님, 전례학 동호회 홈페이지에서>-

 

 

 

5월 16일(2월 22일)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St. MARGARET of Cortona

Santa Margherita da Cortona Religiosa

1247 at Loviano, Tuscany, Italy

- 22 February 1297 at Cortona

Canonized:1728 by Pope Benedict XIII

 

 

작은 형제회의 막달레나라고 불리는

 마르가리따(1247 - 1297)는 꼬르도나 근처의 라비아노에서 출생하였다.

7 세가 되던해 신심 깊은 어머니를 여의게 되는 데 이 때부터

그녀의 시련은 시작되었디.

아버지는 어린 그녀를 돌보는 데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고

 새로 들어온 계모는 무정하게도 거칠게 대하였다.

견디다 못한 마르가리따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가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바로 그녀의 유혹이었다.

그리하여 9 년동안 부유한 귀족의 정부 노릇을 하며 공적인 죄의 생활을 한다.

 

어느 날 그의 정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의 개가 와서

그녀의 치마자락을 끌며 숲속으로 인도했는데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정부가 쓰러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스스로 반문했다.

 

"지금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는 즉시 자신의 생활을 청산하고 공적 회개와 겸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계모는 그녀를 받아 들이지 않았지만

작은 형제들의 지도 아래 회개 생활을 계속할 결심을 고수하였다.

 

3 년 동안 시련기를 마친 후 3회 착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초인적인 엄격한 보속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지상적 유혹을 극복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관상과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와 죽은 후에 그녀의 중재로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녀의 시체는 썩지 않고 지금까지 꼬르도나에 보존되어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때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그녀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 분의 입술은 성스러우면서도 인간다웠다.

어느날 아침 그녀는 탄식하며 울다가 시공을 초월하는 탈혼상태에서 자신을 잊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십자가 상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의 가난한 자여, 무엇을 원하느냐?"  마르가리타는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 즉시 대답하였다.

 "당신은 나의 주님, 저는 단지 당신을 원합니다." 마르가리타는 부활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나의 가난한 자여!" 하고 부르셨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강렬하게

정화를 위한 열정을 불태웠다.....

 

...마르가리타는 맨발로 8일 동안이나 지운타 신부를 찾아와

자신을 비난하는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총 고해성사를 하였다.

진정으로 과거의 모든 찌꺼기가 태워지길 원했다.

 마치 세례를 준비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순결함으로 돌아가길 원하였다.

그런 후에 경건하게 성체를 받아모셨다. 마르가리타는

 이때 예수님의 형언할 수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고

그녀의 고해 신부는 말하고 있다.

 "나의 딸아!" 그녀는 이 말씀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황홀경에 빠졌다.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자가 아니라 '나의 딸' 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소망했던 순간이었던가! 얼마나 열망했던 사랑의 확인인가!....

- 코르도나의 성녀 마르가리타(사무엘레 두란티 지음, 프란치스코출판사 2005년)에서

 

 

그녀는 투스카니의 라비아노에 살던 어느 농부의 딸인데,

 7세 때에 훌륭한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갖은 학대를 받았으며,

진정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채로 성장하였다. 외모가 뛰어나게 예뻤을 뿐만 아니라,

다소 관능적이었던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몬떼풀치아아노에서 온 어느 기사와 눈이 맞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고는 9년 동안이나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녀는 그 후 마치 죄녀의 대명사처럼 불렸고, 천시를 당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개 한 마리가 자기 옷을 물고 잡아당기므로

어느 밤나무 밑에 가보았더니 무참하게 살해된 자기 애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처참한 모습을 보자마자 하느님의 심판을 절실히 깨닫고,

몬떼풀치아노를 떠나 회개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안고,

고행 복장을 한 채로 아버지께 돌아갔지만, 계모에게 쫓겨났다.

이제는 거의 실망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문득 프란치스꼬회원에게 도움을 청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리하여 그 수도원을 찾아 헤메었으나 찾지 못하던 중에, 어느 두 부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가 재속 3회원이 되고자 하였으나 죄녀라는 이유를 들어 허락받지 못하다가,

3년 후인 1227년에 입회가 허락되어 철저한 보속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탄이 그녀의 통회를 방해하니,

지난 날의 욕정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기도와 고행의 무가치함을 보여주며 실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를 따뜻이 안아 주시니,

관상의 은혜와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은총을 주셨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통회생활을 시작한 지 23년 되던 해인

 1297년 2월 22일에 50세의 나이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녀는 "프란치스꼬회의 성녀 막달레나"로 불린다.

그녀의 시체는 꼬르또나의 성 프란치스꼬 성당에 안장되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유해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월22일,게시판1284번.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어느 날 예수 그리스께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사이에게 초대를 받아 만찬을 같이 한 때의 일이다.

한창 연회가 베풀어졌을 때 더러운 죄인으로

 세상 사람에게 배척을 받고 있는 한 여인이 들어와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발에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것을 본 주인은 상을 찌푸리면서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저런 여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는가 하고

이상히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본 예수께서는

"이 여인은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부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하고 여인을 변호했다.

 

이것은 성서에 있는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지금 말하려고 하는 마르가리타도 처음에는 윤락(淪落)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뜻밖에 은총의 빛을 받고서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고 많은 죄의 용서를 받고,

여러 가지 고행으로 전죄를 보속하고 덕행을 많이 닦아 새롭게 된 성녀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코르토나의 근처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지만 선량한 백성이었으며 마르가리타는 시골 처녀로서는 볼 수 없게 영리했다.

그녀의 별과 같은 눈동자, 꽃과 같은 얼굴은 일찍부터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불행하게도 친어머니는 그가 아직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아버지는 즉시 후처를 얻게 되었는데,

그녀는 성질이 나쁜 여자였으므로 마르가리타는 매사에 계모(繼母)의 학대에 못 이겨

17세 때 집을 나와 몬테브르자노 성(城)에 하녀로 들어갔다.

 

성주(城主)인 공작(公爵)은 향락을 즐기는 남자였으므로 미모의 마르가리타를

여러 가지 감언으로 꾀어 마침내 그녀를 자기의 처로 삼았다.

이와 같이 마르가리타는 야비한 애욕에 양심도 마비된 것과 같이

 9년간이나 이런 부당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자녀까지 낳았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돌연 번개와 같은

 은총의 빛으로 죄악의 암흑에서 헤메는 그녀의 영혼을 각성시켰다.

그것은 주인인 공작이 어느 날 갑자기 암살된 사건이었다.

그의 시체는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풀속에 숨겨져 있었는데

마르가리타의 마음은 형용키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 때 처음으로 현세의 허무함을 확실히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의 영혼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 같은 생각을 할수록 그녀의 가슴에는 과거에 범한 많은 죄가 솟아올라

자기 영혼의 캄캄한 장래에 대해서 무서움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사건을 기회로 흙구덩이와 같은 생활에서 발을 씻고

아무리 어렵더라고 바른 길로 돌아가서

 지금까지의 죄의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굳을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그 날 밤 즉시 자녀를 데리고 성을 떠나 밤새도록 걸어서

 이튿날 아침 아버지의 집에 당도했다.

그러나 전부터 그녀를 미워하고 있던 계모는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음탕녀로 멸시받고 있는 그녀를

얌전하게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그리하여 마르가리타는 그곳에도 있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집에서 나왔지만

몸도 의지할 곳 없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양친에게도 버림받은 신세인데

세속의 뭇 남자들을 상대하며 짧은 인생을 향락으로 재미있게 지내 버릴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마귀의 유혹이다.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야 될 말인가?

너는 그처럼 굳게 결심한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후 마르가리타는 코르토나의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에 들어가 뜨거운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오랜만에 모든 고해를 하고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은 후 친절한 고해 신부의 권고에 따라

한 칸 짜리 누추한 집을 빌려 아이와 같이 살면서 엄격한 고행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악한 표양이 된것을 보상하기 위해

어느 주일, 성당문 앞에 서서 그곳에 모인 신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의 용서를 청하고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내놓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껏 때려달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일든 예사로운 결심으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의 이러한 비장한 결심의 태도는 모든 이들을 감동시켜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마르가리나는 더욱 보속을 철저히 실행하기 위해

’통회의 프란치스코회’라 불리는 제3회에 입회할 것을 열렬히 원했지만,

무엇보다고 과거가 과거인 만큼 만일을 염려하여 입회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3년이 지난 후 통회가 확실하다는 것이 인정되어 겨우 입회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고행과 보속의 노력은 그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녀의 열성은 날이 갈수록 더 증가되어 심한 악마의 유혹에도,

병환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주저함이 없이 가시덤불에 싸여있는 것 같은

 통회의 험한 길을 바로 걸어나갔다.

 

 

그와 같은 탄복할만한 정성이 자비 깊으신 예수의 성심에 통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 옛날 시몬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주신 주님께서는

마르가리타에게도 몇 번이고 발현하셔서

육신과 영혼이 녹아 없어질 정도록 천상의 위로를 내려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참된 표양으로 인해 회개한 죄인은

코르토나 읍내만 하더라도 상당한 수에 달하며,

일반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열의도 놀랄 만큼 높아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굴의 보속 생활을 행하기 실로 18년,

오랜 고행으로 몸이 지쳤는지, 용감한 마르가리타도 이제는 몸의 허약함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불의(不意)의 병이 원인이 되어 17일간 앓다가

마침내 1297년 2월 22일을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는 완수할 것을 온전히 완수한 안심된 기색이었고

입에는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녀의 유해는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존되어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작은형제회의 막달레나라고 불려지는 코르도나의 성녀 마르가리따 성당

Santa Margherita da Cortona Religiosa

 

 

개와 약 2만5천년 전부터

인간과 관계를 맺어 온 개는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친구다.

많은 성인들이 개를 친구처럼 키웠겠지만, 그런 내용이 성인전에 기록된 예는 별로 없다.

그러나 마르가리타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으로 개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질 뿐 아니라

그가 묻힌 교회에도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마르가리타는 9년 동안이나 어떤 부유한 남자의 정부로 살았?

 

어느 날 그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마르가리타 앞에

 항상 남자를 따라다니던 개가 혼자 나타났다.

개가 이끄는 대로 어느 참나무 아래 당도해 보니,

그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해 있었다.

그 후 마르가리타는 지난 삶을 뉘우치게 되었고,

남은 생애를 엄격한 참회와 보속으로 보냈다.

 

그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하였던지

 초기 성인전은 그를 회개의 모범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녀 마르가리타의 뜻하지 않은 회심이 사랑하는 사람의 애완견 덕분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 개가 성녀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명백하다.

 

개들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사랑과 끊임없는 충성의 모델이 되고 있다.

애완동물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어떤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