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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자 / 성 헤르메네질드 순교자

Berardus 2022. 4. 12. 17:41
 

 

4월 13일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자


St. Martinus 1 Pap

Saint Martin the I, Pope and Martyr

Born:at Todi, Tuscany, Italy

Died:655 from starvation

(Papa dal 07/649 al 16/09/655)

Canonized:Pre-Congregation

Martino = dedicato a Marte = dedicated to Mars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토디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구 소속의 사제로서 649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공의회를 소집하여 단의론을 주장하는 이단을 단죄했다.

653년 콘스탄스 황제에게 포위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심한 고초를 당했다.

그 후 크리미아의 케르손으로 유배되어 6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마르띠노 1세 교황의 편지에서

(Epist. 17: PL 87,203-204)

 

주님이 가까이 계시니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을 위로해 주고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 갖고 있는 염려를 덜어 주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과 함께 주님 안에서 우리를 염려해 주는

 모든 형제들인 성도들에게도 같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괴로운 유배지에서 쓰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소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죄를 범할 기회가 없으며 생계 수단마저 박탈당했습니다.

이 지방 원주민들은 모두

 이교도들이어서 이교도의 관습을 지니고 있기에 야만인들 가운데서도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인 동정의 행위로 나타나는

그 자애심마저 이들은 완전히 결하고 있습니다.

 

내게 속했던 사람들과 친구들과 친척들에게서 나에게 대한 인정이나

 동정심이 없는 것을 보고 나는 몹시 놀랐고 또 지금도 놀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행 중에 있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는

 내가 정말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고발하는 사람이나 고발당하는 사람들이

 다 같은 재료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아닙니까?

모두 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법정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양심으로 그 앞에 나아가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명을 실행치 못하게 하는 근거 없는 그두려움은 무었입니까?

무슨 악령이 나를 이렇게 먼 곳으로 데리고 와서 나를 잊혀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내가 온 교회에 그렇게도 큰 방해물로 보였고 그들의 원수처럼 여겨졌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 성 베드로의 간구로써

그들의 마음을 정통 신앙 안에서 견고하게 해주시고 그들을 튼튼하게 해주시어,

모든 이단자들과 우리 교회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지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특히 현재 그들의 지도자로 나타난 목자를 지켜 주시고,

그들이 하느님과 천사들 앞에서 글로써 약속한

신앙에서 떠나 파멸로 떨어지거나 또는 고백한 것 중

 아주 미소한 것이라도 버리지 말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또한 비천한 이 몸과 함께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정통 신앙이 가져다 주는

정의의 월계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비천한 육신이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지내고 식량도 모자란 가운데서 지내더라도,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니 염려할 것이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지체치 않으시고 얼마 안 있어 내 여정의 목적지까지 이끌어 주실 그자비에

나는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를 보내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묶인 나에게 동정을 베푼 모든 이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굳세신 손으로 여러분을 온갖 유혹에서 보호해 주시고

여러분을 그 나라로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톨릭홈에서)-

 

 

그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토디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구 소속의 사제로서 교황 테오도로 1세의 대사로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되어 근무하면서

동방 교회의 사정에 통달하고 덕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어

649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후 52일 만에 황제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황제는 그를 교황으로 승인한 것을 후회했다.

 

교황좌에 오른 후 교황은 같은 해 공의회를 소집해 그리스도론에 관한

교회의 정통 교리를 밝힐 필요성을 느껴 제일 먼저 동방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던

단의론을 주장하는 이단을 단죄하고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653년 콘스탄틴 황제에게 포위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심한 고초를 당했다.

그 후 크리미아의 케르손으로 뷰배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65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를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는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마르티노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神)인 마르스에서 유래된 말로 ’화성’이란 뜻이다.

마르티노 1세가 649년에 교황이 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는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적 교회였다.

그 당시 교회 내부에 일고 있던 갈등은

 황제와 총대주교와의 밀접한 관게로 더욱 두드러졌다.

 

동방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던 교의는,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인간적 의지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제들은 두 번이나 이 같은 입장에 공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헤라클리우스는 ’신앙 고백문’을 간행함으로써 콘스탄스 2세는

그리스도에게 하나의 의지가 있다거나

두 개의 의지가 있다는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서 그것을 표명했다.

 

교황직을 맡은 지 얼마 안되어-황제의 인준을 받지 않고서 교황직을 먼저 맡음-마르티노는

라테란에서 공의회를 열어 황제의 문서를 비난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그의 두 선임자를 단죄했다.

콘스탄스2세는 그 보복으로 먼저 주교들과 백성들이 교황을 반대하게 만들고자 애썼다.

 

이 일과 교황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실패하자 황제는 군대를 로마로 보내어

마르티노를 사로잡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갔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던 마르티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대주교인 칼리오파스와 함께 잡혀가서

여러 차례의 감금 생활과 고문 등을 당하며 고통을 겪었다.

이미 수차례의 고문을 당하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지만 중병에 걸려 있다가 회개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탄원으로 형 집행은 면제되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마르티노는 죽었다. 잔인한 고문과 감금 생활이 그의 죽음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는 순교자로서 존경받는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

 

’순교자’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에 있는 것이다.

순교란 말은 증거란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모든 것,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뜻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희생하는 그 믿음이나 목적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신앙을 위해서는 죽는 순교는

그리스도께 대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살아있는 신앙,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본받는 생활은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마르티노 1세는 적당히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통치자들과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한평생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방 교회의 성무일도에서는 마르티노 교황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낸다.

"정통 신앙의 영광스러운 수호자,

오류에 물들지 않은 하느님 교리의 신성한 지도자, 이단을 막은 참된 옹호자,

주교직의 기초이며 정통 신앙의 기초인 참된 종교의 스승이여,

당신은 베드로의 신성한 어좌를 장식하였나이다.

당신은 이 신성한 바위에서 확고하게 교회를 옹호하였기에

이제 당신은 그와 함께 영광을 받으시나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공의회 公議會

영어 ecumenical council

 

교황에 의해 소집된 전세계 가톨릭 주교들의 모임.

교황은 공의회 회의록을 준비하고, 그 결정들을 재가한다.

이 모임은 보편교회에 관련되는 중대 사안들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다(교리서 884).

 

보편공의회 普遍公議會

영어 ecumenical council

 

(보편)공의회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권위 밑에

 모든 가톨릭 주교들(’주교단’)이 함께 모인 모임을 가리킨다.

교회법에 따르면 "주교단은 보편교회에 대한 권력을 보편(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한다."

(교회법 제337조 1항).

보편공의회와 관련된 교황의 권한에 대해서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보편(세계)공의회를 소집하고 이를 몸소 또는 타인을 시켜 주재하며,

또 공의회를 옮기거나 중지하거나 해산하거나 또한 그 교령들을 승인하는 것은

오로지 교황의 소임이다."

(교회법 제338조 1항).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는 21회의 보편공의회가 열렸다(교리서 883-885).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4월 13일

성 헤르메네질드 순교자


St. Hermenegild

St. Hermenegildus

Sant’ Ermenegildo Martire

Died:tortured and axed to death 13 April 585

Canonized:1585

Ermenegildo = dono del dio Irmin, dal tedesco

= gift of the God Irmin, from the German

 

 

그는 스페인의 비시고트 왕의 아들로서

 아리안 이단에 젖어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고 자랐으나,

열렬한 정통파 신앙인인 오스트라시아의 국왕 딸과 결혼하므로써

 올바른 신앙을 되찾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준 모든 소유와 지위를 박탈하려 하자,

헤르메네질드는 완강히 거부하며 아리안 이단과의 투쟁을 선언하고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나 차츰차츰 아들의 입장을 이해한 부친이 화해하고 그전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나,

계모로 들어선 고스빈다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계략으로

 그를 투옥시키고 군인들을 보내어 살해하였다.

그는 아리안 이단을 죽음으로 거부하여 정통 신앙을 지킨 순교자로 높은 공경을 받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헬메네질도는 스페인의

비시고트 왕 레오비질도(Leovigildus)의 황대자로서 동생 레카레도(Reccaredus)와 함께

아리우스파 이단의 교육을 받았다.

부왕은 자기가 죽은 뒤 왕권을 타인의 손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아직 살아있으면서

나라를 둘로 나누어 남쪽 지방은 세레비아 시에 헤르메네질도를 왕으로 삼아 이를 다스리게 하고,

북쪽 지방은 레카레도에게 위탁해 이를 통치하도록 했다.

 

이외 레오비질도 왕은 정략상 오스트라시아 즉 지금의 북쪽 프랑스의 국왕의 딸인

인군다를 맞아들여 헤르메네질도의 왕비로 삼았다.

인군다는 성 글로디르디스의 손녀로서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레오비질도 왕은

이를 자기 한족이 믿는 아리우스파 이단에 쉽게 개종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녀의 교육을 자기의 후처인 고스빈다 황후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인군다는 놀랄 만큼 신앙이 굳건해 위협하건 달래건 조금도 동요 되는 빛이 없었다.

그리고 고스빈다가 나중에는 갖은 학대로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끝끝내 잘 참아내었다.

남편 헤르메네질도는 지금까지 이단을 믿음으로써 가톨릭을 악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자기 아내의 고결한 태도를 보고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마음에 감화를 받아 가톨릭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에 인군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즉시 남편을 레안데르 대주교에게 안내해 이를 소개해 주어

헤르메네질도는 비로소 진리의 빛을 보아 후에 아리우스파의 오류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왕 레오비질도는 이 사실을 듣고 대노하여

 레카도의 군대와 합세해 헤르메네질도의 성을 공격했다.

그래서 헤르메네질도 역시 마지못해 군대로 하여금 방비케 했으나

 결국 참패를 당해 충실한 잔병(殘兵) 3백명에게 보호되어 오쎄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적군은 곧 그 마을에까지 침입했으므로, 그는 최후의 각오를 하고

 그 곳의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바치고 있던 중

동생 레카레도가 와서 매우 측은히 생각하며 말하기를,

항복하고 간절히 아버지께 죄의 용서를 청한다면 자기도 할 수 있는 한 좋게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헤르메네질도는 동생의 호의를 기뻐하며 즉시 그대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항복을 하자마자 비참하게도 즉시 왕위를 빼앗기고

 또한 쇠사슬에 결박되어 세리비아 시에 압송되고 그 후 돌탑의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아버지나 동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 같은 처지에 이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주님을 위해 고통을 당하고 덕을 세울 기회를 주신 것을 무한히 즐거워했다.

그러한 심경이었으므로 자주 레오비질도가 사람을 파견해

“가톨릭을 버려라.

그렇게 하면 다시 세리비오의 왕으로 삼아주마”하고 권했지만 그것을 들을 리 만무했다.

헤르메네질도는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은 매우 감사합니다만 교회를 버릴 수 없으며

왕위나 생명은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586년 4월 13일 성 목요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리우스파의 주교가 성체를 모시고 그의 감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성체를 나의 손에서 받아 모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가톨릭을 배반하는 줄로 간주하고 용서해 주신다는 부왕의 부탁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런데 헤르메네질도는 이를 듣고 나자 분격하며 정색을 하고 나서

“그대는 이단을 받드는 몸으로서 성체를 축성하고 독성의 대죄를 범했다.

그러한 자의 손에 성체를 받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릇이다”

하며 단연 거절했으므로 레오비질도는 분노해 형리들을 보내어

마침내 도끼로 머리를 치고 말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때 헤르메네질도의 유해의 주위에는

 이상한 광채가 보이고 또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고 하는데,

하여튼 그 뒤 국민의 그에 대한 존경은 대단한 것으로서 마치 성인처럼

그를 존경했으므로 아버지 레오비질도 왕도 마음이 편치 못해

드디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통회하고 임종시에는

 교회의 대주교 레안데르를 병석에 초대해 아들 레카레도를 개종시키도록 부탁했다.

그리하여 레카레도도 후에는 형과 같이 가톨릭 신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대단히 노력했으므로

마침내 전국민이 이단의 암흑 속에서 벗어나 교회의 광명으로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