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 사제
St. John de la Salle
St. JOHN BAPTIST de La Salle
St. Joannes Baptista de la Salle, C
San Giovanni Battista de La Salle Sacerdote
Born:1651 at Rheims, France
Died:1719 at Rouen, France
Canonized:1900
Father of Modern Education
1651년 프랑스의 랭스에서 태어났다.
사제로 서품되어 주로 어린이 교육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학교 설립에 몸바쳤다.
몇 명의 동료들을 모아 수도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는 많은 곤경을 겪었다.
1719년 루앙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요한 드 라 살 사제의 [묵상집]에서
(Meditatio 201)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 안에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세우셨다고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바를 깊이 생각해 본다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임무를 여러분에게 맡기신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직책이 여러 가지이고 일의 결과도 여러 가지이지만,
그 각각의 선물 안에 공동 이익이라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작용하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라고 말하며,
사도는 이 점을 다시 증언해 줍니다.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신앙의 정신이 스며들게 하도록 여러분에게 주어진 은혜는
여러분을 이 거룩한 봉사직에로 불러 주신 하느님의
위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보호에 맡겨진 어린이들로 하여금
여러분이 교사로서 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봉사자들임을 발견할 수 있도록
진실한 사랑과 형제적 열성을 지니고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느님의 봉사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또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봉사자입니다.
이 생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과업에 더 열심히 헌신하도록 분발하게 할 것 입니다.
성 바울로가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의 봉사자들로 여겨야 하고,
또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시를 잉크가 아닌
하느님의 영으로, 석판이 아닌 어린이 마음의 명판에
새겨야 한다고 권고할 때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신을 위해 살도록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도하는 학생들이 여러분의 열성에 찬 정성을 보고 감동을 받아,
마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그들을 권고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이 느끼게끔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대한 사랑도 보여 주어야 하며,
그 사랑을 행동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실상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열성을 다하여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이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어린이들을 하느님의 집을 건축하는 데 한 부분이 되어
거기 들어가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아무흠도 구김살도 없이 영광스럽게 나아가 설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총의 풍요함이 후세대에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당신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배울 은총을 주시고,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교육시킬 은총을 주셨습니다.
-(가톨릭홈에서)-
요한 드 라 살은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라 믿고
그 일에 온전히 투신하며 일생을 보냈다.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는 학교 교육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그를
학교 교사들의 수호 성인으로 공포했다.
17세기 프랑스의 젊은이로서 요한은 학자다운 소질,
귀족 가문의 배경,물질적 부,품위 있는 교육 등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11세라는 어린 나이에 그는 삭발례를 받고
사제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며 27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그는 교회 안에서 존귀한 생활과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요한에게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
그 후 몇 년 동안 그에게 점차적으로 계시되었다.
라방의 니엘과 만났을 때 그는 그가 머무르고 있던
라방의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일이 무척 어렵고 까다로웠지만 그는
불우한 젊은이들과 일하는 데 깊이 빠져 들어 모든 열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요한은 일단 그것이 하느님께서 지시한 사명임을 확신한 뒤에는
집과 가족을 떠나 마음과 몸을 다 바쳐
그 일에 몰두하였고, 랭스의 참사 위원직을 포기하고 재산을 모두 내놓았으며,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친
가난한 사람들의 수준까지 자신의 생활 수준을 낮추었다.
요한의 남은 생애는 그가 세운 수도자들이 공동체 즉 그리스도교 학교 수사회,
그리스도교 형제회Brothers of the Christian Schools
(Christian Brothers)와 긴밀하게 맺어졌다.
이 공동체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요한이 마련한 방법을 사용하여
가난한 가정의 소년들을 교육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방법은 먼저 교사를 위한 양성소에서 교사들을 준비시킨 다음
부유한 가정의 말썽꾸러기 자녀들을 위해
가정과 학교를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이 모든 노력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는 요소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이렇게 성공을 하면서도 요한은 여러 가지 시련을 겪었다.
제자들의 비통한 절망과 좌절,
그의 새롭고 성공적인 방법에 대하여 적대감을 느끼는 세속의 교사들과
그 시대의 얀세니스트(엄격주의자들)에게 신랄한 비난과 끊임없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 얀세니스트들의 이단적 교리에 대하여 요한은 일생을 두고 격렬한 투쟁을 했다.
말년에 천식과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던 그는 68세 되던 해 성 금요일에 선종했으며
1900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을 보기 드문 특성이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마르12,30)고 우리에게 요청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이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골로 3,23)라고 비숫한 충고를 하였다.
"젊은이들의 성격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청소년의 마음을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미술가나 조각가
그리고 이런 종류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성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요한 드 라 살의 축일성무일도에서’)-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시며
아이들을 특히 사랑하시어 이들을 축복해 주신 사실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지만,
그 후에도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노력하는 성인을 종종 나게 하셨다.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도 역시 이처럼 간택된 자들 중의 한사람으로서
청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원의 창립자로서 유명하다.
이 성인은 1651년 프랑스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 라임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나 조부모는 모두 신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므로 7형제 중의 맏형이던 그도
어려서부터 그들의 표양을 따라 경건히 자랐고,
불과 11세 때에 이미 사제가 되려는 결심을 하고 삭발례를 받았고,
그에 필요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파리에 가서 유명한 소르본느 대학을 다녔는데,
16세때에 라임스 주교좌의 멤버가 되었다.
20세 때에 불행히 부모를 여의었다. 그래서 젊으면서도 장남이던 그가 온 집안의 운명을
혼자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총명한 그는 가사 일체를 잘 처리하고 모든 고난을 돌파하고
모든 역경을 노력하고 경건한 사제를 자기 영혼의 지도자로 정했는데,
그 사제는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그에게 권고하며 주님께서 언제나 사랑하시던 청빈, 모욕, 고통, 이 세가지를 가르쳤다.
이것은 진실로 죽을 때까지 성 요한 밥티스타 드 라 살의 반려(伴侶)가 되었다.
1670년, 그는 파리의 성 술피스 신학교에 들어가서
1678년 4월 9일 요한은 27세로서 신품 성사를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그 자신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사업에 그를 부르셨다.
그 당시 각 교구에는 학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좀처럼 적당한 교사를 구할 수가 없어 대개는
매우 불완전한 교육밖에 받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1670년에 그는 아드리엥 니엘이란 한 평신도를 만난게 인연이 되어
루안에 가난한 아동들의 학교를
세우려고 생각하고 한 교사를 구해 이를 요한 사제에게 보내어 학교를 창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그의 여러 가지의 지도로 순조롭게 일은 잘 풀려 나갔으나
얼마 뒤 그가 손을 떼고 교사들에게만
의탁했던 바 즉각 성적이 떨어졌으므로 할 수 없이
다시 그 일을 돌보아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처음에 선생이나 학생이나 자기집에 모아놓고 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이웃집에서 아이들이 시끄러워서 못 견디겠다고 항의를 해왔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집 하나를 빌려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재산을 일부를 희사했다.
그런데 그 후 대 흉년이 계속되었으므로 그는 다시 남은 재산 전부를 빈민 구제를 위해 내놓았다.
그대신 그 자신도 자기의 양식을 동냥하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가난뱅이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학교 운영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학교 수도회의 시작이다.
그가 청소년의 교육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수도원을 창립하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때이다.
그는 1684년 5월 27일에 동료 12명과 더불어 우선 1년간의 순명 서원을 발했다.
그의 계획으로서는 서원은 매년 이를 다시 발핟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1년이 지난 후 서원을 다시 발한 인원은 8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덞 명은 모두 의지가 견고한 사람들뿐이었다.
후의 그리스도교적 교육 사업의 대수도원은 실로
이 몇 사람으로부터 발전된 것이었다.
창립자인 요한이나 그의 형제들의 활약, 성공 및
거룩한 생활은 세상 사람들을 감격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전국 곳곳의 도시에서 자신들의 지방에도 학교를 설치해 줄 것을
간청해 왔으므로 이에 따라
점차로 그 수도회의 학교는 증가했다.
그래도 요한이 받은 고통이나 모함이나 빈궁은 거의 인내하기 곤란할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이를 질투해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이런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요한은 하느님께 신뢰하고 일체의 수치와 고통을 잘 인내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훌륭한 교육가로서 손색이 없는 교양과 착한 교사의 올바른 정신을
심어주려고 무척 노력했던 것이다.
그는 교육에 관한 몇 개의 서적을 저술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그의 예의법, 그리스도교적 선덕에 대한 서적이나 교과서,
그 중에도 자기의 수도원의 규율을 제장한 것이다.
전에 파리의 한 사제가
그에게 권고한 세가지-청빈과 모욕과 고난-는 일평생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적인 활동과 빈궁과 피로로 쇠약해져, 형제들에게 다른 사람을
총장으로 선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그것이 아직 실현되기 전에 병에 걸려 1719년의 4월 7일 -
그 해의 성 금요일- 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하느님께서는 그의 전구로 여러 가지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그에게 영광이 되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가 창립한 그의 수도회는 현재 거의 전 세계에 보급되고
그 수사들은 교육자의 모범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고 그는 모든 학교와 교사들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4월 7일
복녀 마리아 아쏜따(아순타) 빨로따
Bl. Maria Assunta Pallota
Beata Maria Assunta Pallotta Francescana
Force (AP), 20 agosto 1878 - Shansi, Cina, 7 aprile 1905
Beatification of Assunta by Pius XII in St. Peter’s Basilica (07. 11. 1954)
FMM(Francescane Missionarie di Maria)
이탈리아 태생인 마리아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Franciscan Missionaries of Mary)
수녀로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운명하였다.
▶ 복녀 아순타
1904년 3월 19일 중국으로 파견된 마리아 아순따는 1905년 스물 여섯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늘 모든 것에 만족하고 겸손하고 평온하였던 그녀는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순수한 지향과 겸손이 널리 알려져 1954년 11월 7일 시복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개
1877년 보편적 선교를 목표로 창립된 최초의 여자 수도회입니다.
74개 국적 7922명의 자매들이 76개국에서 언어,
문화와 생활 양식의 다양함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의 일치를 증거하는 국제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떠나 파견된 그 어느 곳에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선교사들이지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는 조건 없이 하느님의 뜻에 "예" 하셨던 마리아처럼,
성체를 관상하며 선교에 헌신할 힘을 얻는 마리아의 사도가 되어 겸손하고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신 프란치스코처럼,
단순함과 평화와 기쁨으로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을 생활하는 자매들의 공동체랍니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 자매들의 정신은모든 민족,
모든 곳에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신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세를 따릅니다.
프란치스꼬처럼 우리도 우리 생활과 말로써 온 세상을 향하여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우리 생활의 중심은 성체입니다. 우리 전 존재의 뿌리는 하느님께 대한 관상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어
마침내 모든 이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신 사랑이시며 삼위일체이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 사랑이 다른 이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단순함, 기쁨, 형제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전교적인 열정이
이 사랑에 대한 경탄에서 우러나옵니다.
우리는 다함께 공동체 안에서 생활합니다. 하느님은 공동체 안에서 참된 친교를 창조하시며
사랑의 일치를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공동체 안의 친교와 사랑은 우리가 파견된 그곳 사람들에게
차고도 넘치어 하느님 사랑을 증거합니다.
▶ 일곱 명의 성녀들(축일:7월9일.게시판1871번)
[FMM]성녀 마리 에르민느와 동료순교자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 수녀 일곱 명은
1859년 3월 12일 프랑스 마르세유를 떠나 5월 4일 중국 타이완 후에 도착했다.
그들은 세상 끝까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이끌려
중국이라는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세상으로 자신을 내던졌다.
200명의 고아와 수많은 환자들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여성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의 타이완 후 공동체
자신들의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세계와
문화 안에서 관계를 맺고 친교가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것,
자신들에게 오는 많은 사람들의 필요 앞에서 느끼는 한계와 고통,
겸손과 창의력, 온유함과 강함으로 봉사하고, 계산하지 않고 내어주는 너그러움...
그 공동체의 모든 생활 한 가운데에는 원천이요 반석인
그리스도가 계셨다. 마음을 뜨겁게 하는 말씀과 거행되고 조배 받으며 생활되는 성체로서.
공동체는 또한 그들이 생활하고 성장하고 쉬기 위한 장소요,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나아가기 위한 장소였다.
▶ 1900년 7월 9일
이 때 중국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많고도 복합적이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였다.
그 폭력은 특히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선교사들을 향했다.
6월 27일, 상황이 극도로 긴장되었다. 수녀들을 피신시키려는 주교에게
마리 에르민느는 모두를 대신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저희가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주교님들과 함께 죽는 것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
저희는 이곳에 애덕을 행하려 왔고,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피까지도 흘리러 왔습니다."
7월 9일 오후 4시경 군인들이 이들을 끌고 갔다.
학살이 시작되었다. 수녀들이 마지막으로 쓰러졌다.
그들은 서로 포옹하며 찬미의 노래인 떼데움을 부르면서
군인들에게 자신들의 머리를 내어놓았다.
▶ 그들은 누구인가?
마리 에르민느: 프랑스인, 34세.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면 우리는 지치지 않고 그분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마리 아망딘느: 벨기에인, 28세. "제가 가진 모든 것, 저의 생명, 마음, 활동,
저의 노래까지... 죽음이 저를 데려갈 때까지 예수님, 당신이 저를 차지하십시오"
마리아 끼아라 : 이탈리아인, 28세. "예수님, 당신께서 부르실 때, 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리 드 생뜨 나딸리: 프랑스인, 36세. "좋으신 주님, 저는 언제나 당신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마리 아돌핀느: 네덜란드인, 34세. "예수님께서 제가 주신 모은 은총,
특히 선교사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마리 드 생 쥐스트: 프랑스인, 34세. "나는 내 생명을 중국인들을 위하여 바치고 싶습니다."
마리 드 라 뻬 : 이탈리아인, 25세. "올해 주님은 제 안에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저는 그저 저를 위해 마련해두신 그 길로 인도되어 가도록 저 자신을 내어놓을 뿐입니다."
▶ 시성
2000년 10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들 일곱 여성들을 포함한 120명의
중국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