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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 은수자 /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은수자

Berardus 2022. 4. 1. 19:07
 

 

 4월 2일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 은수자


St. Mary of Egypt

St. Mary of Egypt, Hermit (RM)

Santa Maria Egiziaca

Born:c.344 in Egypt

Died:c.421 in the desert near the River Jordan of natural causes;

relics at Rome, Naples, Cremona, and Antwerp

Canonized:Pre-Congregation

Maria = amata da Dio, dall’egiziano; signora, dall’ebraico

= mistress from God, the Egyptian; mrs., from the Hebrew

 

 

마리아는 히브리어 Myriam에서 유래된 말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여자’란 뜻이다.

젊은 테오도시우스의 통치때, 팔레스티나에는 한 집에서만 43년동안 살았고,

하느님만 섬기는 거룩한 조시모라는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요르단으로 향하였으나,

자신은 자기 수도원과

20일 간의 거리나 떨어져 있음을 알고는 기도 시간이 되어 시편을 외우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시모 신부님, 나는 여자입니다.

 당신의 겉옷을 던지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의 주인공이 곧 이집트의 마리아이다.

 

 

그녀는 이집트 여성인데, 17년 동안이나 거리의 여성으로 살아왔지만,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28세때, 신비스런 방법으로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성 십자가 축일을 지내려 가는

 일단의 무리들과 합류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자기의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열심한 순례자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당도하여 성당에 들어가려 하니,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듯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윽고, 눈을 들어 마리아 상을 바라보니, 그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제서야 그녀는 밝은 마음으로 성당으로 갔고, 깊히 통회하니,

 "너는 요르단으로 가서 여생을 지내라."고 명하여 이렇게 사막에 산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르단 사막에서 47년 동안이나 사람 한사람 구경못하고 살았다.

조시모는 그녀를 위해 성체를 영해주고,

그녀가 약속한 두 번째 지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갔으나, 그녀는 이미 운명하고 있었다.

"조시모 신부님, 가련한 마리아를 장사지내 주십시오."하며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이야기해주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이 성녀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와 더불어

죄인에게 대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생생한 증거로

세상에서 유명한 통회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4세기 중엽 상(上) 이집트에서 태어나 12세까지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받아

 성모 마리아께 특벼한 신심을 갖고 있었으나

타고난 아름다운 미모가 화근이 되어 셋고 쾌락에 쏠리는 마음이 강해졌고

, 따라서 농촌에 있기를 싫어하여 경솔하게도 부모의 슬하를 떠나

당시 번화하고 사치스러운 알렉산드리아 시에 가서 17년이란 긴 세월동안

 몸과 마음이 모두 더러워지는 창부의 생활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성 십자가 공경을 위해 성지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순례자의 무리가 알렉삳드리아 시에서 배를 타는 것을 보고

타항에 대한 호기심이 갑자기 생긴데다

 더욱 새로운 쾌락을 구하려는 마음에 즉석에서 그 일행에 참가했다.

그러나 원체 불순한 동기로 순례의 무리에 참가했으므로 도중에서나 성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여전히 사람을 유인하여

향락의 생활을 계속하며 털끝만큼도 반성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성 십자가 축일이 다가와서 동료들이 성당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도 무심코 그 안으로 발을 옮기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줄로 결박된 것처럼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에 그녀의 놀람은 어떠했을까!

이것은 내몸이 더러우므로 하느님께서 거절하시는 것이다.’하고 생각한

그녀의 가슴에는 몇십년 동안 느껴보지 못한 강한 통회의 정이 솟아올랐다.

 

할 수 없이 물러서서 성당의 앞뜰을 보니 그곳에는 성모상이

 무척이나 자기를 가련히 여기시는 것처럼 인자하신 눈으로 내려다보시는 것이었다.

죄녀인 마리아는 이를 쳐다볼 때 그대로 그의 앞에 엎드려서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시에 오래된 깨끗했던 소녀 시절의 행복스럽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아! 될 수만 있으며 그 당시와 같이 정결하고 깨끗한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녀는 하느님 대전에서 통회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려고

 다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성당으로 발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아무 장애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과 자기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쳐다본 마리아는

 통회의 간절함과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저응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감실 앞에 엎드려 회개할 것을 맹세했다.

 ’지금까지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와 같은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 주는 듯 그녀의 마음에 울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요르단 강 건너 저 광야에 가서 고행을 하며 보속하라!’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말씀대로 순종햇다.

요르단 강가에는 성 요한 세례자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다.

그녀는 거기서 오래간만에 고해 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용기를 내어

 강을 건너 광야에 가서 47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친 속죄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바람과 비를 막는 의복도 어느덧 다 떨어져 나가 몸에 붙어있지 않았다.

양식은 광야에 있는 나무 뿌리나 야채뿐이었다.

처음 17년간은 죄악중에 살아온 17년간의 보속이었든지 마귀의 심한 유혹에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을 마시려고 하면 포도주의 맛이 생각나고, 채소를 먹으려고 하면

 전에 실컷 먹던 고기 맛이 떠오르고,

고신 극기를 하려고 하면 과거에 빠져있던 쾌락이 생각나서 몹시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잘 싸우면서 그 기간을 보내자 그 후는 아주 심한 고행을 해도

심중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위로와 평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마리아도 연로하여 백발이 되었다.

하루는 한 노인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리아는 처음에는 놀라 무서워했지만 자세히 보자

그의 인자한 인품은 어느 점으로 보든지 하느님께 봉사하는 덕망이 높은 사람같았다.

’반드시 저분은 나에게 고해와 성체의 두 성사를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파견한 분이실 것이다’하고 생각한 그녀는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의 정을 금치 못하여 이번에는 이쪽에서도 반가이 달려나가 맞았다.

 

 

노인의 이름은 조시모로 요르단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사순 시기의 단식재를 지키고자 이 광야를 찾아온 것이다.

마리아는 오래간만에 그에게 고해 성사를 하고 성체를 모시기를 원했다.

조시모는 오랜 고행으로 보속을 한 마리아에게 이를 영하여 주었다.

그때의 그녀의 기쁨과 행복은 이루 측량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불탔다.

 

이런 일이 있은 1년 후, 그녀는 속죄의 생활을 마치고 씩식하게 하느님의 품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임종 날짜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 뒤 다시 광야를 찾아간 조시모 수도원장은 그녀의 유해를 발견하고 이를 정성껏 매장했다.

때는 431년 4월1일(4월2일)이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게시판1364번.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월22일.게시판1284번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축일:2월22일.게시판1630번.

*성 요한 세례자 축일:6월24일.게시판1238번.183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4월 2일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코 은수자


St. FRANCIS of Paola

St. Franciscus de Paola

San Francesco da Paola Eremita

Born:1416 at Paola, Calabria, Italy

Died:2 April 1507 at Plessis, France

Canonized:1512 by Pope Julius II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 free, from the ancient German

 

 

1416년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지방의 파올라에서 태어났다.

은수자회를 설립하였으며, `가장 작은 형제회’로 발전하여 1506년 사도좌의 인준을 받았다.

1507년 프랑스 투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올라의 성 프란치스꼬의 편지에서

(Epistola a, 1486: A. Galuzzi, Origini dell’Ordine dei Minimi, Romae, 1967, pp.121-122)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십시오.

 

가장 너그러이 갚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노고에 상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피해 달아나고 위험들을 몰아내십시오.

우리와 우리 모든 형제들은 비록 부당한 사람들이지만,

여러분이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찾고 있는 동안

아버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 모친이신 마리아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형제들이여, 강력히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온갖 사려와 열성으로 힘써 영혼의 구원을 얻도록 하십시오.

죽음은 확실하고, 인생은 짧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 올라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하늘에서 내려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다 여러분의 마음을 고정시키십시오.

그분은 우리 때문에 영혼과 육신의 온갖 고통을 당하셨고, 어떤 고초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인내와 사랑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심을 지녀야 합니다.

 

미움과 적대심을 버리십시오. 거친 말을 삼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입에서 한번 그런 말이 흘러 나왔다면,

그 말로 인해 생긴 상처를 치료해 줄 치료제를 같은 입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이렇게 서로 용서해 주고 과거에 당한일을 영원히 잊어버리도록 하십시오.

 

당한 일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며 분노가 가져다 주는 결과이고

 죄를 간직하는 것이며 정의에 대한 증오입니다.

그것은 녹슨 화살이고 영혼의 독소이며 덕의 파멸이고 정신을 좀먹는 벌레요 기도의 방해물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청원들을 무효화하고 사랑을 몰아냅니다.

당한 일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또한 영혼에 박힌 가시요 결코 잠자지 않는 악이며

끝이 없는 죄이고 날마다 겪는 일종의 죽음입니다.

 

평화를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누구나 갈망할 수 있는 가장 귀한 보물 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죄가 하느님을 분노케 해드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도록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숨기는 것도 하느님께는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십시오.

주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게 끔 살아가십시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 안에 깃들기를 바랍니다.

-(가톨릭홈에서)-

 

 

이탈리아의 파올라에 사는 경건한 야고보 말도리라 부부는 자녀가 없음을 자못 비관하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전구를 청하며 자녀를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청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 결과 1416년 드디어 한 남자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전구해 주신 성인에게 감사의 정을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도 프란치스코라고 이름지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병에 걸렸으므로 양친은 재차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를 청하했다.

만일 낫게 해주신다면 장차 아이를 반드시 당신의 수도원에 보내어 하느님께 봉헌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자 그 눈병도 즉시 완치되었다.

 

아버지는 자신도 엄격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들에게도 똑같이 엄한 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그가 목적한 것은 다만 종교 교육뿐이었다.

프란치스코가 13세에 달했을 때 양친은 맹세대로 그를 어느 수도원에 들여보냈다.

그는 온갖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순명하고 겸손하며 엄한 고행도 알뜰히 해 나갔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로 자신도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1년이 지나서도 서원을 발하지 않고 수도원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그는 양친과 더불어 아시시나 로마나 몬테카시 등에

 순례의 여행을 떠났으나 돌아와서는 부모의 승낙을 얻어

자기 스스로 하나의 조그마한 바위굴을 만들고 자기 집의 고요한 방과

또다른 두 군데서 여유 있게 은수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가끔 단식하고

또 밤새우며 매질하고 고신극기를 해 음식물로는 산에 서 뜯는 잡초 외에 아무것도 안 먹었다.

프란치스코는 되도록 남몰래 살려고 했으나, 이 같은 생활이 오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1435년 그가 겨우 19세때 이미 청년 수명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제자가 되어

함께 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간청했다.

 

그러므로 신심이 깊은 그의 양친은 자기 아들과 그의 동료를 위해

하나의 작은 성당과 몇개의 조그마한 방을 지어 주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런 생활을 갈망하며 모여오는 이가 많아졌다.

그러므로 그 지방의 주교는그에게 다시 큰 수도원과 부속 성당의 건축을 허가했다.

그 공사가 시작되고 보니 그에 대한 세인의 존경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를 사모하는 이들이 부탁도 안했어도 사방에서 너도나도 서로 경쟁하며

 기꺼이 그 공사에 협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뒤 몇 가지 기적이 일어났으므로 그에 대한 존경은 삽시간에 더 증가했다.

한 예를 들어보면, 그의 조카(여동생의 아들)는 평소 백부인 프란치스코를 사모하던 끝에

그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같이 완덕의 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좀체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들은 뜻밖에도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를 자기에게 대한 천벌로 생각하고 후회의 눈물을 머금으며

유해를 수도원의 성당에 운반하고 미사 성제 후 즉시 매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이를 만류하고 조카의 시체를 자기 방으로 옮기게 하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의 성심에서 우러나온 기도는 드디어 성공했다. 조카는 과연 죽음에서 소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그의 어머니한테 가

 지금은 아들을 수도원에 들여보낼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아직 아들의 소생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물론 살아 있다면

 수도원이든 어디든 제 가고 싶은 데로 맡길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에 와서 늦어 버렸습니다."하고 탄식하며 대답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아니 승낙만 하면 그만입니다"하고 말하여

 되돌아 와서 아들에게 수도복을 입히고 즉시 어머니에게 면회시켰다고 한다.

 

 

프란치스코가 뭇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이 같은 기적을 행한 이유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든지 선량하고 동정이 깊고 친절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형제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훈계하거나 결점을 고쳐주고 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상대에게 불쾌한 감으 주기 쉬운 것인데,

그가 사랑에 넘치는 태도로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누구나 기꺼이 그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랑을 위해 이것을 하십시오. 사랑을 위해서는 이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명령 방법은 늘 이와 같았다.

 

그리하여 그의 수도원은 나날이 번성해 갔으므로 딴 곳에도 같은 수도원을 세우려고

1473년 회의 규칙에 대해,정식으로 교황 식스토 4세의 허가를 얻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산수사(山修士)회(Hermits of Saint Francis of Assisi)라고 부르게 했다.

이는 그 회의 규칙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것을 기초로 하고

 다시 준엄한 생활을 행하게끔 고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가장 작은 자의 회’(Order of Minim Fiars)라고

 그의 이름을 변경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www.ofm.or.kr)

 

교황의 인가를 얻은 그 수도회는 이탈리아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도 설립했다.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 프란치스코회는 영국 왕에게 존대를 받고

 성인의 기적을 전해 들은 루도비코 11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사신을 보내어 성인의 방문을 간청했다.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명령도 있고 해서 1482년 4월 24일 그의 궁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환영은 마치 교황을 맞아들이는 것처럼 성대했다.

국왕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에 친구하며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줄 것을 간구했다.

이에 대하여 프란치스코는 영원한 생명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천국을 위해 공로를 쌓을 것과 병자 성사를 받고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때는 1483년 8월 4일이었다.

 

그 뒤 계속 가롤로 8세와 루도비코 12세도 성인을 대단히 존경했으므로,

그는 그들의 원조로 몇 군데에 수도원을 더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이 세상을 작별할 날이 다가왔다.

일찍이 그것을 예감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훈계한 뒤 성인으로서 적합한 선종을 했다.

때는 1507년 4월 2일이었고, 나이는 93세였다. 시성식은 1519년 레오 10세 교황 시대에 행해졌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프란치스코는 ’프랑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파올라의 프란치스코는 관상 생활의 고독을 깊이 사랑했으며

 ’하느님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기만을 바란 사람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에게 활동적으로 세상에 봉사하기를 청했을 때,

그는 기적의 일꾼이 되었으며 국가의 진로 결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부모와 함께 로마와 아시시를 순례한 후 파올라 근처의 해안에 있는

 한적한 동굴에서 관상적인 은수자로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그의 생활 방식을 본받고자 찾아 온 첫 제자를 받아들였다.

17년이 지난 후에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그는 정식 공동체를 위한 규칙을 제정하고

 교회의 인준을 청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은수회’(Hermits of Saint Francis of Assisi)의 설립이며

 1474년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1492년에 프란치스코는

 자기 공동체의 명칭을 ’가장 작은 형제회’(Order of Minim Fiars)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자기 회원들이 하느님의 집에서 작은 자(minimi)로 알려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겸손은 프란치스코가 일생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형제들의 신분 증명이 되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청빈, 정결, 순명의 서원 이외에 사순절의 금육을 계속 지키라는

 네번째 규율을 덧붙였다.

그는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과감한 절제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관상적인 은수자가 되는 것이 자기의 바람이었지만 하는님께서는

자기를 사도직 생활에 부르고 계심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기적과 예언의 은사와 같은

 자기가 받은 선물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옹호자인 프란치스코는 왕과 왕족들에게

직선적인 충고를 하여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요구에 따라 프란치스코는 파리에 가서

프랑스 왕 루이 11세를 도와 죽음을 잘 준비하도록 했다.(이야기 참조)

왕에게 봉사하고 있는 동안 프란치스코는 국가 정책을 진로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 왕실 간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평화를 회복하게 했고,

루이 11세에게 논쟁의 대상이 된 땅의 일부를 스페인에 되돌려 주도록 설득함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데에도 협력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프랑스 궁전에 머물던 1507년 4월 2일 성금요일에 세상을 떠났고

 죽은 지 12년이 지난 1519년에 시성되었다.

 

 

파올라의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지나치게 활동적인 세계에 대하여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활동적인 일에 부름을 받은 관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기도와 일 사이의 긴장을 예민하게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의 일생에서 그것은 생산적인 긴장이었다.

왜냐하면그는 국제 관계에 뛰어들게 된 자신의 업무에서

 관상 생활의 열매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와 절제의 견고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부르심 앞에

매우 진지하고 휼륭한 응답을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인 자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는 중풍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왕은 이탈리아에 있는 프란치스코에게 사람을 보내

그와 그의 수도원을 돕겠다는 많은 약속을 하며 프랑스에 와서 자기를 고쳐 달라고 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가라고 명령할 수 있는 교황에게 왕이 직접 부탁할 때까지 거절했다.

루이 11세는 프란치스코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를 고쳐 달라고 간청하자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고,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만큼 다만 그를 위해 기도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성인은 여러 차례 왕과 만났다. 프란치스코는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에 지혜가 넘쳐 그를 통해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증언했다.

기도와 표양으로 그는 왕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왕은 그의 팔에 안겨 평안히 운명할 수 있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죽음

 

프랑스의 국왕 루이 11세는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기도도 하고,

 성지 순례도 다녀오는 등 피 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자 그는 파올라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성 프란치스코에게 와 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거절하자 식스토 4세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

결국 1482년 4월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루이 왕은 그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프란치스코는

모든 생명은 오직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루이 왕은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프란치스코의 도움으로

 그 해 8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확실한 것은 죽음은 아주 개인적인 사건이며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 말은 죽음을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와

 선행을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죽음을 실체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삶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