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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12월4일)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사제 학자

Berardus 2022. 3. 26. 14:00

 


[이콘]세개의 손을 가진 성모. 야로슬라브 화파.35 x 31.5cm. 18세기.
 


이 이콘은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에 관한 전설과 관련된다.
그에 따르면 모반죄로 탄핵되어 누명을 쓴 요한은 오른손이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에 요한은 성모 이콘 앞에서 하느님께 자신은 무죄이며
자신의 문필로 성화 공경을 위하여 계속 투쟁할 수 있도록
잘린 손을 다시 돌려 주도록 기도드렸다.
 
그러자 그의 잘린 손이 팔에 다시 붙었고
그 때부터 요한의 팔목에는 빨간 선의 흔적만 남게 되었고,
요한은 감사의 표시로 은으로 만든 손을 자신이 기도하였던 이콘 앞에 기증하였다 한다.
(이콘.신비의 미-장긍선신부) 에서
 
성모여, 나의 영혼에 지혜와 충고를 주소서.
그것들은 나의 불행과 어둠을 메울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결점과 나의 부족을 바로 잡도록 도와주소서.
그로 인해 죄의 어두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소서.
나는 끝없는 찬양과 영광으로 당신을 공경하나이다.
 
오, 우리 하느님의 아들이신 진실된 빛의 유일하고 참된 어머니여.
현재와 영원히, 모든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에 의해
영광과 축복을 받으시는 당신은 주님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홀로 영원히 계시나이다.
 
시리아의 성 에프렘의 성모찬가 중.
 
*시리아의 성 에프렘 축일:6월9일.게시판1216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세 개의 손을 가진 성모(희랍어 : Tricheirousa)는 다마스커스의 요한에 관한 전설과 관련된다.
비잔틴황제가 회교국주(回敎國主)에게 조작한 편지를 내세워 요한을 모반죄로 탄핵한다.
회교국주가 요한의 오른손을 자르도록 명령하자,
요한은 성모 성화 앞에서 하느님께 그는 무죄이며
그가 그의 문필로 종교화 숭배를 위하여 계속 투쟁할 수 있도록
그의 손을 다시 돌려주도록 기도드렸다.
그는 회교국주에게 잘린 손을 되돌려주도록 부탁하였고 그의 팔에 손을 다시 붙였다.
그 때부터 요한의 팔목에는 빨간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요한은 또한 은으로 된 손을 이 성화앞에 기증하였다.
 
이 성화는 사바스(Sabbas) 수도원으로부터 12세기에 세르비아의 성 사바스에 기증되었다.
14세기 말경 터키인들이 세르비아를 정복했을 때에 사람들은
이 성화를 당나귀에 싣고 아토스에 무사히 피난하여 세르비아의 칠란다르(Chilandar) 수도원으로 옮겼다.
세개의 손을 가진 성모 성화의 진적(眞蹟)은 칠란다르-수도원의 은혜를 베푸는 중요한 성화이다.
그림의 왼쪽 가장자리에서는 대 수호천사를, 오른쪽에서는 성 안나를 볼 수 있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3월 27일(12월 4일)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사제 학자

St. Joannes Damascenus, C. D. E
St. John Damascene
St. John of Damascus
San Giovanni Damasceno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Doctor of Christian Art; Jean Damascene; Johannes Damascenus;
John Chrysorrhoas ("golden-stream"); John of Damascus
676 at Damascus, Syria- 749 of natural causes
Memorial:27 March (Latin Church); 4 December (Greek Church)
 
 
요한은 자기 생애의 대부분을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성사바 수도원에서 보냈으며,
회교도의 규율 밑에 있던 그의 생애는 참으로 그 규율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난 그는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정부 관리로서 아랍인들을 다스리던 아버지를 계승했다.
몇 해 뒤에 그는 관리직을 사임하고 성사바 수도원으로 갔다.
그는 세 가지 분야에서 유명하다.
 
첫째로,
그는 성상의 공경을 반대하는 성상 파괴주의자들에 대한 글로 잘 알려져 있다.
역설적으로 성상 공경을 금지한 것은
동방 교회의 그리스도인인 레오 황제였는데
요한은 모스렘 영토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자들이 그를 모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
희랍 교부들-그는 마지막 교부이다-의 총서인 그의 ’정통 신앙론’으로 유명하다.
이 책은 동방 교회에서는 서방 교회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견줄 만한 책이다.
셋째로, 그는 시인으로서 유명한데 로마누스 멜로디스트와 함께
동방 교회의 가장 위대한 두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그의 신심과 마리아의 축일에 관한
그의 설교도 잘 알려져 있다.
 
 
요한은 성상 공경에 대한 교회의 이해를 옹호했고
 다른 여러 가지 논쟁들에 대하여 교회의 신앙을 설명했다.
그는 30년 이상을 이러한 옹호론과 다른 저술로써 기도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그의 성덕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재능과
설교 안에 그대로 나타난다
 
 
성인들은 신학자이며 복음사가인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친구이며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당신의 자녀가 되는 힘을 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미리 선포한 모든 사도들,순교자들,고행자 및
의인들의 생활 방식을 상세히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사랑,희망,열성,생활,고통중의 인내,죽음에까지 이르는 끈기 등과 비교해 보고
그들을 본받음으로써 우리도 영광의 월계관을 나누어 받을 수있는 것이다." (정통 신앙론,제 4권)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
 
 
다마스커스의 어느 부유한 크리스챤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칼리프 압둘 말레크의 궁중 고관이었다.
그는 그의 부친이 칼라브리아에서 체포한,
그당시 저명한 수도자이던 고스마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후 요한은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몇년을 지냈으나,
726년에 레오 3세 황제가 성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하자,
즉시 이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가톨릭 입장을 옹호하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비쟌틴 황제의 분노를 샀다.
 
726년, 그는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는 예루살렘 근교로 가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후에도 그는 모슬렘을 공격하는 글을 써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일생동안 살았던 수도원은 "마르사바" 인데,
 이곳은 예루살렌과 사해 사이에 있는 황량한 산악 지대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지식의 근원", "정통신앙"등 이다.
그의 저서들은 중세 서방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많은 시와 찬미가를 지어 희랍 전례에서 사용되게 하였다.
흔히 그는 희랍의 마지막 교부라고 불리우며,
 1890년에 레오 13세는 교회 박사로 선언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2)-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annes)은 그리스 교부로서는 마지막 인물이나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한 분이며,
성 로마누스 작곡가(Romanus the Melodist)와 더불어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마호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치하에서 전 생애를 보냈지만,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테스(Theodorus Studites)와 더불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성상 공경 논쟁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던 위대한 교부이다.
 
요한은 그의 대표작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에서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경, 구원론, 종말론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이 저서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의
 "신학대전"에 버금가는 역저로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교육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때의 다마스쿠스는 아랍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요한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였고,
이 직책은 세습제였다. 그래서 요한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부친이 직접 그에게 교육을 시키고,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부친 외에 요한은 코스마(Cosmas)라 부르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코스마는 그에게 여러 학문을 가르쳤는데, 특히 신학을 강조했다.
 장성한 요한은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국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교적 덕행,
특히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가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그의 스승 코스마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후임 칼리프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자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고위 관직을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직하고 코스마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분위기는 아직도 성상 공경 문제가 쟁점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자들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어쨌든 요한과 코스마는 책을 저술하거나 찬미가를 짓는 등의 일을 하면서 이곳에 정착하였다
. 장상과 다른 수도자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모님은 그의 스승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한다.
 “그대의 제자에게 많은 책을 쓰고 또 아름다운 시를 쓰도록 허락하여라.”
이때부터 요한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성서와 교부 문헌 연구 및 저술 활동에 할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다마스쿠스 거리로 나가 광주리를 팔았다고도 한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 5세는 그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코스마를 마유마의 주교로 축성하고,
요한은 사제로 서품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그런데 코스마 주교는 죽을 때까지 주교로서 양떼를 돌보았으나,
 요한은 이내 수도원으로 되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다시금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이때부터 그의 저서는 도처에서 읽혀졌으나 반대자들의 질시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754년 12월 4일
 고령으로 선종해서 마르 사바 수도원에 묻혔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0년 8월 19일 교령에서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가톨릭홈에서)-
 
 
7세기 후반 다마스커스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철학 교육을 받은 후 예루살렘 근처의
 성 사바소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특히 성상 파괴를 주장한 이들을 거슬러 많은 신학서를 저술했다.
 8세기 중엽에 세상을 떠났다.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사제의 [신앙 선언]에서
(Cap. 1: PG 95,417-419)
 
주여, 당신은 나를 당신 제자들을 섬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주여, 당신은 아버지의 허리에서 나를 이끌어 내셨습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르시고, 자연의 법은 언제나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기 때문에
벌거벗은 아이로 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성령의 축복으로 사람의 뜻이나 육체의 본능에 따라서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은총으로 내가 지음받고 존재를 갖추게 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자연의 법을 초월하는 준비로써 나의 출생을 준비하셨으며,
광명으로 내보내실 때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하고 티없는 교회의 제자들 가운데 들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거룩한 말씀인 영적인 젖으로 나를 양육시켰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견고한 양식으로 나를 양육시키시고,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흘리시고 생명을 주는
 그분 피의 거룩한 잔으로 나를 도취시키셨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당신 외아들을 보내 주셨고
그분은 당신의 뜻을 기꺼이 받아 들이어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희생 제물로 바친 어린 양처럼 자원하여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즉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시었고,
이렇게 자신의 인간 의지를 굴복시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이신 당신께 순종하셨습니다.
 
나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여,
당신은 길 잃은 양인 나를 당신의 어깨 위에다 메기 위해서
 스스로를 낮추셨고 푸른 목장에서 나를 기르셨으며
당신이 뽑으신 그 귀중한 양 떼를 기르기 위해서 당신이 직접 양육하시
는 목자의 손 아래 참된 교훈의 물로
나를 양육시키셨습니다.
 
주여,
이제 당신은 나를 주교의 손을 통하여 당신 자녀들을 섬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당신의 섭리 속에 나를 그렇게 선책하셨는지 나는 모릅니다.
당신 홀로 그것을 아십니다. 주여, 당신의 마음을 매우 상하게 해드린
 나의 무거운 죄의 짐을 가볍게 해주소서.
내영혼과 마음을 깨끗이 해주소서. 환하게 비추는 등불처럼
 나를 올바른길로 인도해 주소서.
 
내 입에 당신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불혀를 통해서
분명하고도 알아듣기 쉬운 말 재능을 주시어 당신 현존이 언제나 나를 두루 살피게 해주소서.
주여, 나를 기르시고 나와 더불어 당신 자녀들을 길러 주시며,
 내 마음이 우로나 좌로나 이탈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선하신 영께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어 내가 하는 일이 당신의 뜻에 맞게 하시고
또 죽는 날 까지 그러하게 하소서.
 
그리고 온전한 순결의 정상이고 하느님의 안식처이며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교회의 무리여,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교회를 굳건히 하는 오류 없는 신앙의 교리를 우리 손에서 받으십시오.
-(가톨릭홈에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전에 성 바오로 사도가
주 예수의 발현을 보고 기적적으로 개종한 장소로서 유명하지만,
8세기에 이르러서 또한 위대한 교부인 성 요한이 출현해 더욱 그의 이름을 높였다.
이 성인이 얼마나 박학하고 덕이 높고 유명했던가는 역사가들이 그를
‘다마스쿠스 시를 흐르는 황금의 강(江)’("golden-stream")이라고 하며
많은 존경을 드리는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성 요한은 7세기 말경(690년경) 다마스쿠스 시의 총독으로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요한과 그의 동생의 교육을 담당한 이는 전에 사라센 인들에게 포로로서 잡혀갔다가
그 뒤 석방된 고스마(Cosma)라는 이탈리아인의 한 수사였는데,
그는 두 소년의 천진난만한 마음에 일반의 학문은 물론 신학의 지식도 깊이 심어주었다.
몇 년 후 요한이 우수한 학식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학덕을 겸비한 훌륭한 스승의 훈육의 덕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요한은 성장한 후 잠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마스쿠스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의 우수한 재주와 학식으로 말미암아 곧 회교 왕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그런데 당시 동방 여러 나라에서는 성상, 성화나 십자가에 대한 존경을
모조리 우상 숭배의 미신이라고 하며 배척하는 과격한 이단이 세력을 얻게 되고
동 로마 황제까지고 이에 가담해 교회 신자들을 맹렬히 박대했으므로,
요한은 올바른 신앙의 위기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나 신학의 박학한 지식을 기울여
세 반박문을 공개하며 십자가 및 성상, 성화를 존경하는 것이 미신이 아니라는 이유를
당당히 천하에 공포하며 교적(敎敵)의 그릇됨을 여지없이 논박했다.
 
그로 인해 박해를 받고 있던 신자로서 순교의 용기를 얻은 자,
진로를 방황하다 바른 길을 발견한 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성상 파괴론자인 동 로마 황제 네오는
 성인에게 자기네 이론이 파멸된 것에 자못 흥분해 비열하게도
성인께 대한 모함을 회교 왕에게 써 보냈다.
그것을 보고 대단히 화가 난 회교 왕은 요한을 호출하고
 근위병에게 명령해 그의 오른쪽 팔을 절단시켰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께서 그 날 밤 그가 자고 있는 동안
기적으로써 절단된 손을 전과 같이 붙여 주셨다고 한다.
 
그 뒤 요한은 세속을 떠나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한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는데,
특히 호교 방면에 심혈을 기울여
 
사도 시대부터의 공의회에 있어서 신덕 도리로 결정된 설이나
이단으로서 배척된 사설(邪說)등을 모조리 수집해서 자세한 논평을 가하고
또 성모 마리아께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성모 공경의 아름다운 신심서도 저술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는 웅변보다도 문필의 사도로서
교회의 자유와 영광을 위해 분투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분투의 결과 -즉 성상 파괴론에 대한 교회의 완전한 승리를 보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749년 예루살렘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고요히 선종하고 그의 완덕과 호교의 위대한 공적에 대해
풍부한 상급을 받기 위해 천당에 들어가셨다.
 
성인이 서거한지 40년 되던 해,
즉 787년에 니케아(Nicaea)에서 제7회 째의 공의회가 소집되어
성인의 주장대로 성상, 성화 파괴론이 이단이란 것이 의결된 후부터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공훈은 더욱 찬란한 광채를 발휘하게 되었다.
 
하여튼 그가 쌓아 놓은 영원 불멸의 금자탑(金子塔)이라 할만한 것은
그 경건한 전심 전력을 총 집중시킨 신앙 도덕에 관한 다수의 명저(名著)일 것이다.
그는 1890년에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이콘]세개의 손을 가진 성모(Tricherousa).중앙러시아. 19세기. 26.5 x 23cm

금속판에 손으로 수를 놓아 화면을 장식
 
전설에 의하면 교회를 이끄는
 성모(Hodegitria)의 원상(原像)은 누가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성모상의 원상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 중 아래에 소개된 이야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675-749)은 황제 레오 3세에 의해 왼손이 잘리웠는데,
그는 이 잘리운 손을 들고 성모상 앞에 가서 도움을 청했다.
이 때에 성화는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성모상으로부터 손 하나가 밖으로 튀어나와
성자의 피 흘리는 손목에 붙어 살이 곧 자라났으므로
감사하게 여긴 성 요한은 이 성화 앞에 은으로 된 손 하나를 기증했다.
후에 이 성화를 묘사한 작품들에 있어서는 은으로 된 손 대신에 손 하나를 더 그려 넣었다.
 
세 개의 손을 가진 성모(Tricherousa)의 상은 현재 세르비아 지방의 칠란데르의
아토스-수도원(Athoskloster)에 있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성화(Icon)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오른손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으며 그녀의 왼손으로 신성한 아기를 가리키고 있다.
아기 예수는 그의 오른손을 올리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성서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그림의 아랫부분 중앙에는 도금된 세 번째의 손이 보인다.
 
이 그림은 면(面)위에 금판을 부착시켜 그 위에 진주로 수를 놓았다.
후광(後光) 역시 같은 장식수법을 사용하였으며
인물은 진주와 화려한 색의 돌들로 수를 놓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동정녀의 어깨에 걸치는 망토는 화문(花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림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수호천사를, 오른쪽에는 성녀 우스티니아를 묘사하였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