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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성 뚜리비오 몽그로베요 주교 /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Berardus 2022. 3. 22. 15:23
 
 

 

3월 23일

성 뚜리비오 몽그로베요 주교


St. Turibio de Mogrobejo, E

St. TURIBIUS of Mogroveio

San Turibio de Mogrovejo Vescovo

1538 at Mayorga, Leon, Spain

- 1606 at Santa, Peru

Beatified:2 July 1679 by Pope Innocent XI

Canonized:1726

 

 

1538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살라망카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1580년 리마의 주교로 임명되어 남미로 갔다.

사도적 열성에 불타, 전국적으로 신앙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수많은 공의회를 소집했었다.

교회의 권리들을 꾸준히 옹호했고, 본토 인디언들의 복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일했으며,

그들을 방문하여 자신의 책임에 맡겨진 양 떼들을 돌보았다.

16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에서

(Nn. 12-13.16)

 

온갖 선업을 할 준비를 갖추십시오.

 

교도직은 주교들의 중요한 직무 중에서도

 뛰어나는 것이므로, 이 직무를 통해서 주교들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것이며,

성신의 힘으로 그들을 신앙에로 불러들이고

 또는 그들의 산 신앙을 더욱 굳게 해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가르쳐야 할 것이니,

즉 그리스도를 알기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가르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현양하고 그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길도 가르쳐야 한다.

 

그와 동시에 현세의 사물과

인간사들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계획대로 인류 구원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교회)를 건설하는 데에 적지 않게 이비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와 육신 생명을 가진 인격, 가정과 그 단일성 및 지속성,

자녀 출산과 교육, 시민 사회와 그 법규 및 전문 분야,

노동과 휴식, 예술과 과학 기술의 발명, 빈곤과 풍부한 재화,

이 모든 것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밝혀 주어야 하겠다.

마침내 물질 재화의 소유, 경제 성장과 정당한 분배, 평화와 전쟁,

모든 민족들의 형제적 공존 등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시대적 요구에 적응시켜 설명할 것이니,

즉 현대 사람들이 몹시 고민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와 난관에 해답을 주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옹호하며 신도들에게도 같은 진리를 변호하고

 전파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또한 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주교들은 교회가 신도 비신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특히 빈곤하고 허약한 사람들을 특별히 보살펴 줄 것이니,

주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주교들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목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주교들은 자기 양들 가운데서 봉사하며,

착한 목자로서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도 목자를 알도록 하고,

참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보살펴 줌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 권위에 순종하도록 되어야 하겠다.

자기 의무를 자각하고 사랑으로 일치하여 살며 활동하도록 할 것이다.

 

이런 의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교들이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알맞은 준비를 갖추고"

"뽑힌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아 견디며," 시대적 요청에 적합하도록

 자기 생활을 조절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홈에서)-

 


그는 1538년 스페인의 마요르카에서 태어났다.

살라만카에서 법률을 공부했고,

그 후에는 변호사 겸 살라만카 대학교의 법학 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라나다의 종교 재판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관계없이 1580년 페루의 리마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사실 그는 평신도였다.

이 때문에 그는 먼저 사제 서품을 받고 주교 축성식을 거쳐

 1581년에 페루에 도착했다.

 

그는 착좌한 직후부터

인디언들의 권익 옹호 때문에 정부 당국과의 분쟁에 휘말렸고,

교구 내의 교회 규율 정립을 위해 피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으며,

가난한 이를 위해 교회의 따뜻한 손길을 뻗치는 등 사도적 열성에 불타

, 전국적으로 신앙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수많은 공의회를 소집했었다.

교회의 권리를 꾸준히 용호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와 학교 및 병원들을 세웠다.

 

1591년에는 신세계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다.

 본토 인디언들의 복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일했다.

그는 인디언 언어로 설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구 내의 각 지역을 거의 모두 방문하여

 자신의 책임에 맡겨진 양떼들을 돌보았고

교육과 설교에서 매우 뛰어났다.

그는 교구 내의 방문을 마치고 페루로 돌아오던 길에 산타에서

 160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리마의 성녀 로사와 더불어

 투리비오는 신대륙의 첫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6년 동안 남아케리카의 페루에서 주님을 섬겼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그는 매우 뛰어난 학자로서

 살라망카 대학의 법학 교수가 되었으며,

또한 그라나다에 있는 종교 재판소의 재판장이 되는 등 매우 쉽게 출세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만큼

명석한 법률가는 아니었다.

즉 스페인의 식민지인 페루에 있는 리마 대주교 자리가 비게 되자 투리비오가

그 자리를 맡을 적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그 지역을 오염시키고 있던 추문에서 교회를 구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성격과 거룩한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신도에게 교회 직무 수여를 금하는

 모든 교회법 조항을 열거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고 식민 정책으로 최악의 상태에 있는 페루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갖가지로 억압하는 죄를 범했다.

더욱이 성직자들의 타락은 악명 높아서 그는 우선 이 분야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광활한 대교구를 열심히 방문하였으며,

한 장소에서 이삼 일씩 머물며

 때로는 잠자리나 음식도 없이 돌아다니면서도 언어를 공부했다.

그는 매일 아침 자기 지도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받고

 진실한 열성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그가 견진 성사를 준 사람들 가운데에는 리마의 성녀 로사가 있고

아마도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도 그 중의 한사람일 것이다.

 

1590년 이후에는

또 다른 위대한 선교사인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신자들은 가난했지만 매우 민감해서

다른 사람들의 공적인 동정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투리비오는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도와 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 축일:7월14일.게시판1677번.

*리마의 성녀 로사 축일:8월23일.게시판1327번.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 축일:11월3일.게시판145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하느님은 굽어진 곡선을 곧게 쓰시는 분이시다.

종교 재판소의 어울리지않는 무대에서 빠져 나와 투리비오는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착한 목자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하는 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선물을 주셨다.

 

 

투리비오가 성직자들의 쇄신 운동을 시작했을 때

 불의한 관리들이 있었던 만큼 자연히 많은 반대에 부딪혀 고생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습관화된 좋지 않은 생활 방식까지

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설명’하고자 애썼다.

이에 투리비오는 테르툴리아노의 말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지

 ’나는 관습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시간

 

1575년, 페루 리마의 주교가 사망하자

 평신도였던 투리비오가 차기 주교로 지명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사제품을 받고 주교에 임명되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리마의 성녀 로사의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위대한 신앙의 소유자였던 성 투리비오는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하느님께 낱낱이 아뢰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하루 24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같은 시간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같이 보인다.

시간이 손에 쥔 모래처럼 새 나가는 것 같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 일지를 적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시간별로 간단하게 메모를 해 보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다음 하루의 일과를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점검해 본다.

나는 긴급하고 중요한 일에 관심을 쏟고 있는가?

내가 시간을 조절하는가 아니면 시간에 끌려가는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려면 어떤 시간들을 줄여야 하나?

발전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루에 한 시간씩 더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지혜롭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3월 23일(3월22일. 9월14일. 9월15일)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St. CATHERINE of Genoa

Santa Caterina Fieschi Adorno da Genova Vedova
Also known as
Apostle of Purgatory; Caterinetta
Memorial: 15 September; formerly 22 March

22 maggio (memoria liturgica: 14 settembre) - Comune 
Born: 1447 at Genoa, Italy
Died: 14 September 1510 at Genoa,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6 April 1675 by Pope Clement X
Canonized: 16 June 1737 by Pope Clement XII
Name Meaning: pure one

Third Order Franciscan



제노아의 귀족 가문의 자녀인

가타리넷따('작은 가타리나"라는 뜻) 피에시는 1447년 태어났다.

13세에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했으나 너무 어려서 거절당했다.

16세에 젊은 귀족 줄리앙 아도르노와 형식적인 결혼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때때로 성녀 가타리나 피에시 아도르노라고 불리운다.

남편은 바람기가 많고 성미가 급한데다 불성실했다.

가타리넷따에게 이것은 굉장한 시련이었다.

한동안 이러한 실망들을 여러가지 오락의 소용돌이 속에 가라앉게 하려고 하면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굳은 신뢰심을 두었고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1473년 어느날 수녀가 된 여동생을 만나러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고백성사를 보았는데,

이 고백성사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슬픔과 절망 속에 있던 그녀는 하느님을 향하게 되었고,

주님은 그녀의 영혼을 축량할 길 없는 은총으로 가득 채워서,

 자신의 죄를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시고

그녀의 마음을 천사적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셨다.

매일 성체성사를 영하기 시작했고, 남은 여생도 계속 그렇게 하였다.

참으로 열렬한 신앙생활에 몰입하였다.

개심을 한 뒤 남편을 변화시켰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남편의 낭비가 심한 생활로 인해

 로멜리니에 있는 궁전같은 집을 처분하여,

그들은 제노아에서 가장 큰 자선시설인 파마토네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후로 그들은 수사와 수녀처럼 지내면서,

가타리나와 남편은 자선사업에 완전히 자신들을 봉헌하였다.

1490년 가타리나는 병원의 여성병동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 죽을 때 까지

21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하였다.

 

1497년 남편이 죽은 후에

 무서운 흑사병이 4년 동안 제노아에 퍼져 인구 5분의 4의 생명을 앗아갔다.

가타리나는 밤이나 낮이나 환자들에게 영웅적으로 헌신하였다.

동시에 참회예절과 신앙생활도 꾸준히 하였다.

빈번히 탈혼에 빠졌으며, 바쁘게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라도

 마음은 천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실용성과 또 다른 세상을 완벽하게 연결하는 놀라운 태도로 일에 임하였다.

 

연옥에 관한 훌륭한 논문과 '영혼과 육체의 대화'라는 훌륭한 저서도 남겼다.

로마 성청은 이 작품들만으로도 그녀의 참된 거룩함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선언하였다.

 

가타리나는 "연옥은 비록 견디기 어려운 고통들 중 어느 하나도 감소되는 곳은 아닐지라도,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지적하였다.

가타니나는 대녀 토마시나 베르나자에게 작별을 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토마시나, 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기를! 네 마음에 영원함이 있기를!

너의 모든 행동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 하시기를!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 하느님의 사랑,

흠없는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그것은 또한 그녀 자신의 삶의 모토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병,

곧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가타리나의 마지막 9년간 삶과 함께 하였다.

1510년 8월 어느 날 저녁, 별들이 뱇나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수많은 촛불이 밝혀지고 죽어가는 청순한 이 연인은

'오서서 창조주 성신이여'를 노래 불렸다. 그녀는 소리쳤다.

"가자, 더 이상 이 땅에서 더 이상 이 땅에서..." 2주일 후인 9월15일,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망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1737년 그녀를 시성하였다.

-(평화의 사도,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50주년 기념집에서)-

 


야고보 피에쉬와

 프란치스카 디 네그로의 딸인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는데, 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그녀의 부친이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줄리아노 아도르노란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마르고 방탕하였으며 아내에게 불성실하였다.

반면에 그녀는 민감하고 신중하였으며, 거의 유머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매몰스런 여인은 아니었다.

불행하였던 이 결혼은 10년이 지나면서부터 남편의 방탕으로 인하여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남편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게 되어 프란치스코 3회원이 되었으며,

함께 회개 생활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팜메토네 병원에서 일하였는데,

특히 카타리나는 아주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고,

1479년에는 아예 그 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1490년에는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녀는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자 자신의 직분을 사임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남편이 죽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토를 만났다.

그녀는 수많은 신비 체험을 하였으며, 악화된 병으로 인하여 한없는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신심은 비범하였다.

그녀는 세속에 있으면서 천상적인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명상가였으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이었고,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마귀의 간계였다고 한다.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은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다.

이 책들이 1934년에 영국에서 간행된 바 있다.

-(가톨릭홈에서 www.catholic.or.kr)-

 


Catherine of Genoa :

Purgation and Purgatory, the Spiritual Dialogue
by Serge Hughes (Editor)

 

3월19일(9월15일?) 제노아의 카타리나 성녀 (3회)  

   카타리나는 1447년 제노아의 귀족 피에치 집안에서 태어났다.

 매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겨우 13세에 수도생활에 강하게 끌렸으나

 나이가 어려서 허락을 얻지 못했다.

16세 때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변덕스러운 젊은 귀족 율리아노 아도르노와 결혼하게 되었다.

덕이 없는 남편은 신심 깊은 어린 아내에게 결혼생활을 고문과 같이 만들었다.

 쾌락을 찾아다니고 화를 잘 내는 그는 카타리나를 집안에 홀로 남겨두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생활은 그녀에게 참기 힘든 짐이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녀는

 이러한 실망을 쾌락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묻어버리려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으며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녀에게 나타났다.

이 환시의 인상이 너무나 강하여 카타리나는 즉시

자신의 모든 생활에 대한 총고백을 하고 매일 성체를 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을 죽는 날까지 지켰다.

그런 후 그녀는 남편이 회개하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몰락으로 그들은 성을 떠나 초라한 집으로 옮겨갔다.

인내하며 참음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남편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함께 회개생활을 하기로 하고 팜마토네에 있는

 병원의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497년에서 1501년까지 역병이 창궐하여 도시 인구의 1/5을 앗아간 시기동안

카타리나의 사랑은 참으로 영웅적이었다. 그 병원의 경영은 그녀에게 맡겨졌으며

그녀는 병자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늘 하던 회개생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엄격한 생활에 기진한 그녀는 마침내 쓰러졌다.

죽기 전에 그녀는 많은 고통을 겪었다. 1510년 3월 19일(9월 15일)에

 그녀는 크나큰 마음의 평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남긴 글들은 그녀의 영혼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1737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기도
오, 우리 구세주 하느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어
당신의 동정녀 복된 카타리나의 축일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저희에게
성녀에게서 당신께 향한 사랑 가득한 헌신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우리를 위하여 이같이 견디셨고 이같이 온갖 좋은 것을 주셨으며

 앞으로도 주실 하느님께, 하늘과 땅, 바다와 심연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축복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홀로 선하시고, 홀로 지존하시고, 홀로 전능하시고, 감탄할 만한 분이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그리고 홀로 거룩하시고, 세세대대 영원히 찬미 받으실 만한 분이시며,
축복 받으실 바로 그분은 우리의 힘이시고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2-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