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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8월31일) 아리마테아의 성 요셉 / 성 파트리치오 주교

Berardus 2022. 3. 16. 21:13

 


[이콘] 십자가에서 내리움과 장례.
19세기 말경.35.5x31cm.깊숙이 들어간 화면
 
이 성화의 윗 부분에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려 놓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아리마티아의 요셉 (Josepvon Arimathia)이 그리스도의 팔을 십자가에서 떼어내서 몸을 얼싸안고 있다.
십자가의 왼쪽으로는 다른 성인들과 함께 성모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두명의 다른 성녀들이 보인다.
 
예수의 죽음에 통곡, 장례,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리움은 대개 공통 주제로 취급되므로,
이 성화에서도 십자가에서 예수를 끌어 내림을 묘사한것 아래에,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을 보게 된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관의 머리끝에 슬픈 표정으로 서서 그 팔에 예수의 머리를 받들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왼편 위로 구부리며 예수에게 입 맞추고 있다.
 
아리마티아의 요셉은 예수의 발 위로 깊이 고개 숙이고 예수의 발을 경외스럽게 받들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에집트의 성녀 마리아와 성녀 줄리타(Julitta)가
아들과 함께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럽 聖畵(ICON)集에서)
 





 
3월 17일(8월31일)
아리마테아의 성 요셉

St. JOSEPH of Arimathea
San Giuseppe d’Arimatea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added (in family), from the Hebrew
Died:1st century
Canonized:Pre-Congregation
 
 
요셉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더하신다’이란 뜻이다.
 
4복음서에 모두 언급되어 있는 그는 의회 의원이었으므로
유대 당국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비밀리에 예수를 따라 다닌 제자이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다가,
예수님이 운명하자 빌라도에게 가서 시체를 내어 달라고 청하여 승락을 받고,
고운 베로 싸서 바위 무덤에 모셨다.
그는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찬동한 일이 없고,
하느님의 나라를 대망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골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여 가는 필립보 사도를 수행하였고,
잉글랜드로 가는 12명의 선교단의 책임자였다고 한다.
가브리엘 천사의 도움으로, 그들은 잉글랜드 왕이 하사한 땅에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글래스톤버리 대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고 전해온다.
 
그는 아마도 이곳에서 서거한듯 보인다.
또 요셉은 최후 만찬에 사용된 성작을 물려받은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필립보 사도 축일:5월3일.게시판1139번.
*성 니고데모 축일:8월3일(8월31일)게시판192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루가23,50-56
50  의회 의원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올바르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51  그는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찬동을 한 일이 없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동네 아리마태아 출신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던 사람이었다.
52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하여 승낙을 받고
53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장사지낸 일이 없는 무덤이었다.
54  그 날은 명절 준비일이었고 시간은 이미 안식일에 접어들고 있었다.
55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도 그 곳까지 따라가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어떻게 모시는지 눈여겨 보아두었다.
56  그리고 집에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었다.
 
마르15,43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마태 27,57-61
묻히시다 (마르 15,42-47 ; 루카 23,50-56 ; 요한 19,38-42) 

저녁때가 되자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으로서 요셉이라는 이가 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자, 빌라도가 내주라고 명령하였다. 
요셉은 시신을 받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나서,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고 갔다. 
거기 무덤 맞은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요한19,38-42
38  그 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하여달라고 청하였다.
그도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요셉은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
39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40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는 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직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42  그 날은 유다인들이 명절을 준비하는 날인데다가 그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공관복음서의 보도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니고데모가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함께 "유대인의 장례 관습대로"
예수의 시신을 존경스럽게 "아직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무덤에" 안장한 점이 크게 다르다.
그대신에 여인들에 관한 언급은 없다.

특히 예수의 시신을 존경스럽게 염하고 깨끗한 무덤에 안장한 내용은
예수 자신이 들어올려져 영광스럽게 된다는 요한 복음서의 독자적인 전승 내용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보도(15,43)에 따르면 "명망있는 의회의원"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거주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
니고데모도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처럼 숨어서 비밀리에 예수를 따랐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이제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를 결정적으로 드러내게 된 셈이다.
 
또한 이 무덤은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의 소유였다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전한다(27,60)
"아직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란 표현은
예수의 왕적인 품위와 거룩함에 상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신 예수의 영광을 시사하는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이 무덤은 오늘날 "예수의 무덤 대성전"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 위치했었다고 하며
역사 고고학적으로도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주석에서)-











 

 

3월 17일

성 파트리치오


ST. PATRICK

St. Patricius, Episc et Confess

San Patrizio Vescovo

387-390 at Scotland as Maewyn Succat =

461-464 at Saul, County Down, Ireland

Canonized :Pre-Congregation

Patrizio = di nobile discendenza, dal latino

= of noble descendancys, from the Latin

Name Meaning :warlike (Succat - pagan birth name);

noble (Patricius - baptismal name)

 

 

385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아일랜드에 노예로 잡혀가 목동으로 일하게 되었다.

거기서 자유를 얻자 사제가 되기를 원했다.

아일랜드의 주교가 된 후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신앙에로 귀의시켰다.

또한 아일랜드 전국의 교회를 조직화하였다. 461년 다운 패트릭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빠뜨리시오 주교의 [고백록] 에서

(Cap. 14-16: PL 53,808-809)

 

나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시련의 날에 나를 충실히 지켜 주시어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곤경 속에서 보호해 주신

내 주 그리스도께 오늘 내가 내영혼의 산 제물을 바치게 된 데 대하여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여, 제가 누구이며 제 소명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엄청난 천상 은총을 입혀 주셨습니까?

당신은 제가 이교인들 가운데서 기뻐 용약하며

일이 잘 안될 때나 잘될 때나 당신 이름을 전파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또 당신은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똑같은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주시고

제 청을 잘 들어 주시는 당신께 감사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무지한 인간인 제가 당신이 예언하신 대로 이교인들 앞에 주님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한 분들을 본받아 이 시대에 그렇게 놀랍고도 거룩한 일을 할 능력을 저에게 베푸셨습니다."

 

내 나이조차 모르고 하느님의 단맛도 몰랐던 나에게 그전에 없었던 이 지혜는 어디서 생겨났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아일랜드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본국과 가족을 떠날 수 있게 된 이 크나큰 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그리고 내가 내 인간적 약점을 체험하기 위해 이교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사슬에 매일 정도까지 수많은

박해를 견디어 내어 마침내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된 그 힘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느님께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하시고 허락해 주신다면 서슴지 않고 기꺼이 그분의 이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위해 내 생명을 모두 소비하고 싶습니다.

사실 나는 하느님께 너무도 큰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통하여 많은 민족들이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진보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개종한 민족들에게 계속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어느 곳에서나 성직자들을 성품에 올리도록 하셨습니다.

과거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민족들은 그분이 땅 극변에서부터 불러 주신 민족들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온 세상 구석 구석에서 뭇 민족이 주께 와 아뢸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 적부터 모시던 것은 헛된 우상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또 말합니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나는 이제 주님의 그리침 없는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동서방에서 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곳곳에서 신자들이 생기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가톨릭홈에서)-

 

 

로마-브리텐의 관리인 칼푸르니우스의 아들인 그는 아마도 반나벰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듯 한데,

이곳은 골 지방이 아니면, 스코틀랜드의 던 바톤 교외의 킬 패트릭인듯 하다.

 

그는 16세 때에 해적들의 포로가 되어 아일랜드의 어느 이교인에게 노예로 팔렸다가,

6년 후에 도망하여 골 지방으로 갔다.

그리고 22세 경에 그는 브리텐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레린스의 수도원에서 공부하는게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15년 동안 오세르에서 지내다가, 417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432년 경에는 성 제르마노에 의하여 주교로 축성되어 아일랜드로 파견되고, 성 바울리노를 계승하였다.

 

그는 크리스챤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은 수많은 원주민 추장 등을 과감하게 만났고,

대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회개시키므로써, 섬 전체에 그리스도교를 뿌리 깊게 심었던 것이다.

 

그는 442년과 444년에 로마를 방문하였고, 아르마그 대성당을 세워, 아일랜드 교회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아일랜드에서 보낸 30년 간의 활동에서 그는 학문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라틴어 공부를 비롯하여 아일랜드를 서방교회와 아주 가깝게 만든 공로자가 되었다.

그는 "고백론"을 썼는데, 이것은 일종의 호교론이다.

성 파트리치오의 문장은 뱀과 토끼풀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파트리치오는 오곤네르와 같이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뛰어난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19세기에 오곤네르가 정치계에 남겨 놓은 것과 같은 공적을

파트리치오는 5세기에 종교계에 남겨 놓은 인물이다.

 

그는 385년 스코틀랜드의 기르바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소년 시절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지만 그 자신이 서술한 참회록이라 지은 자서전 속에서

당시의 자신은 거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죄인이었다고 자책(自責)하고 있다.

 

 

16세 때 아일랜드의 해적이

 스코틀랜드에 침입해 그는 그들의 포로가 되어 불쌍하게도 노예로 팔려갔다.

그러나 이 같은 재앙이 전혀 그에게 이익이 안 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파트리치오가 목동으로서 가축을 지키는 한편 하느님께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예 생활하기를 6년,

22세의 청년이 된 파트리치오는 결단심을 가지고 탈주에 성공해 무사히 고향의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고생하는 동안 친히 목격한 외교인들의 가련한 영혼의 상태는

오랫동안 그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장차 사제가 되어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려는 결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결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프랑스 레닌 수도원에 들어가 옥세르에서 신학을 배우고 귀국 후 사제가 되었다한다.

그는 친척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목적으로 아일랜드레 건너가려고 하던 차.  

때마침 아일랜드의 주교 바라디오가 서거했으므로 그는 주교직에 올라

보좌 신부 약간명과 함께 고국을 출발했다.

 

 

그 당시의 아일랜드에는 소수의 그리스도교 신자만 있었을 뿐

주민의 대부분은 우상숭배의 미신에 젖어 도루이도(이교 제사장)라는 자의 지도를 따르는 형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각지에 추장(酋長)들이 있어 각자의 토지를 다스렸고,

전체를 통할하기 위해서는 다라라는 곳에 왕이 있었다.

 

파트리치오는 보좌 신부들과 같이 아일랜드에 도착했으나 토민들에게 해적으로 오인(誤認)받아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될 찰나에 피신해 전에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북부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 곳 추장을 개종시켰다.

 

그 후 파트리치오는 남쪽으로 가서 라오게르 왕을 축하하기 위해 도루이도나 추장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 앞에 나와서 참된 종교를 설명하니 왕과 장관들과 상류 부인들이 개종하여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한 도루이도인 트부도라는 자도 교회의 진리를 깨닫고

그의 시재(詩才)로써 복음 보급에 힘껏 노력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풍부한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파트리치오는 더욱 동분서주하며

불요불굴의 활동을 계속해 사람들을 가르쳐 인도하고

성당, 수도원을 세우고 사제를 양성하여 마침내 아일랜드 전국을 가톨릭국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따라서 전 국민은 그를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생각하며

 누구하나 그에게 순종치 않는 이는 없었다.

 

그가 어려운 교리를 쉽게 설명하는데 얼마나 교묘했던가는 다음의 일례로 알 수 있다.

어느 날 그가 삼위일체의 오묘한 도리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원체 오묘한만큼 누구나 좀처럼 이해하기가 곤란했다.

 

그때 파트리치오는 생각한 끝에 곁에 있던 클로버(Clover) 한 포기를 손에 들고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하나의 클로버이지만 끝은 세잎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도 한 분이시지만 그의 위(位)는 셋으로 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 청중은 이런 적절한 비유에 비로소 삼위일체의 개념을 확실히 파악할 수가 있었다.

 

지금도 아일랜드에서 성 파트리치오 축일에

신자들이 클로버를 가슴 또는 모자 등에 붙이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이 일화(逸話)에 기인한 것이다.

 

 

파트리치오는 아일랜드의 포교 사목에 큰 성공을 얻은 것처럼

그동안 남 모르는 역경과 고통을 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그 하나는 그가 부활 축일에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는데

전부터 신자였던 그 지방의 추장 고로틱이 무슨 영문인지 신자들을 습격해 죽이거나

혹은 노예로 삼은 사건이었다.

 

파트리치오는 그의 난폭함을 슬퍼하며 즉각 서간을 보내 그의 그릇됨을 타이르며

즉시 포로로 잡아간 형제들을 석방하라고 명했지만

추장은 완강히 거절했으므로 평화를 사랑하는 주교께서도 눈물을 머금고

 그를 파문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트리치오는 각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기도하고 덕을 닦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1부분에는 다윗 성왕의 시편 백편을,

제2부분에는 시편 나머지 50편과 기도를 올리고,

제3부분에는 수면으로 돌을 베개 삼아 쉬었다고 한다.

이같이 일생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한 파트리치오는 많은 공로를 쌓고,

 464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복음

 

소설같이 파란만장한 삶으로 유명한 성 파트리치오는

‘성 파트리치오의 방패’ 라고 하는 아름다운 기도문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님!

오늘 나의 방패가 되소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앞에 계시며,

내 뒤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시고, 나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 되소서.”

“그리스도는 고요 안에 계시고, 위험 안에서도 계시며,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도 계시고, 친구와 이방인의 입술에도 계십니다.”

 

이 기도문을 성 파트리치오가 직접 썼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기도를 통해 그의 삶과 신앙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다.

그가 행한 모든 것들은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열정적인 믿음의 표출이었다.

더구나 대개의 사람들이 읽거나 쓸 줄을 몰랐던 시기에

그의 복음적 삶은 예수님의 참 복음을 보여 주는 표양이 되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믿는 바의 반영이다.

우리가 물질주의나 소비주의에 집착한다면 우리의 행동도 그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 파트리치오처럼 남을 위한 삶과 희생이라는 참된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세상의 부패한 곳에 생명과 희망을 전해 줄 전달자가 될 것이다.

나는 말과 행동은 복음적인가? 성 파트리치오의 전적인 헌신을 본받자.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