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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성녀 마틸다

Berardus 2022. 3. 13. 18:02


 
3월 14일
성녀 마틸다 왕후

St. Matilda
Santa Matilde di Germania Regina
Engern, Sassonia, ca. 895 - Quedlimburgo, Sassonia, 14 marzo 968
Matilde = strongly in war, from the German
 
 
마틸다는 ’힘과 전투’란 뜻이다.
웨스트팔리 백작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삭소니아의 공작인 오토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 얼마 후에 독일의 헨리 1세 국왕이 되었다.
 
또 그녀의 아들 오토는 오토 1세 왕이 되었고,
다른 한 아들 브루노는 쾰른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녀는 32세 때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때 아들인 오토 1세로부터 극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심이 뛰어났으므로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동생 헨리가 형인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드는 판국이라 그녀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그녀는 수도원을 세곳이나 세웠고,
 만년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녀는 궤돌린부르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과
 교회의 후원자로서 큰 공경을 받는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마틸다 왕후는 9세기 말경 독일 웨스트파렌 주(州)의
 테오도리고 후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덴마크의 왕녀 라인힐다다.
그 당시는 자녀를 수도원에 의탁하여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상류사회의 관습이었으므로
마틸다도 관습에 따라 숙모가 원장으로 하는 헬포르드 여자 수녀원에 맡겨져
필요한 일반 지식과 함께 종교 교육도 받으며 경건히 자랐다.
그러던 중 그녀는 어려서 삭소니아의 공작인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안락한 부부 생활을 하며 3남 2녀를 낳았다.
 
결혼 후 3년째인 912년의 일이다.
독일 황제 콘라도 1세가 승하하고 하인리히가 그의 후계자로 추대되자
자연히 마틸다도 국모로 존경을 받게 되었지만
겸손한 그녀는 조금도 교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빈민을 돕고 병자를 문안하고
백성을 돌봐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남편이 천성적으로 성미가 급하고 쉽게 화를 잘 내는 성격임에도
늘 그녀는 온화하고 온순한 태도로 대하고,
또한 죄수를 석방하고 죄인을 관대히 처분해 줄 것을 종종 부탁한 일도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수도원이 한 나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함을 깨닫고
남편과 함께 수도원을 몇 군데 세우고
그 중의 하나인 궤돌린브르크 수도원을 자신들의 묘소(墓所)로 정하기까지도 했다.
 
936년, 하인리히 황제?중병에 걸려 마틸다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때는 아침이 아니었으나 그때 왕후는 아직 식사도 들지 않은 사제를 다행히 만나
한시라도 빨리 죽은 남편을 위해 미사를 드리게 한 후
자신도 미사에 참여하면서 진정으로 죽은이를 위해 기도했다.
 
 
미사가 끝난 뒤 마틸다는 그 사제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의 표시로 자신의 황금 팔찌를 증정하고
황제의 관 앞에 가서 다시 이별의 슬픔에 잠겼지만,
이내 아직 어린 오토, 하인리히 두 황자를 불러놓고
"보는 바와 같이 황금의 왕관을 쓰던 황제라 하더라도 때가 이르면
일반 평민과 똑같이 죽어 하느님의 심판 마당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그대들은 신분이 높을수록 더욱 제 몸을 수양하고
선을 행하며 악을 피해 훌륭한 성군이 되어
하느님의 뜻에 의합한 자가 되고 사후에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각별히 조심해 달라"고 간곡히 타일렀다.
 
새로 황제위에 오른 오토는 바바리아 후작이 된
동생과 어머니의 훈계에도 아랑곳없이
오랫동안 서로 싸워 마틸다에게 많은 걱정을 하게 했다.
후에 간신히 화해를 하자마자 이번에는 "마틸다 황태후가
가난한 자를 구하기 위해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악한들의 모함을 곧이 듣고 형제가 합세하여 어머니의 재산을 거두어 버렸다.
 
마틸다는 이러한 자식의 불의에 몹시 마음이 상했지만 자신이 궁전에 있으면
도리어 풍파의 원인이 되리라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나 엔게룬 수도원에 들어가서 밤낮 하느님만을 섬기며
불효한 아들들을 위해 용서와 회개의 은혜를 간구했다.
 
마틸다가 궁전을 떠난 뒤에는 국내에 여러 가지의 재앙과 불행이 계속 일어났으므로
성직자들이나 제후들은 이를 천벌로 생각하고
왕비를 통해 황제에게 황태후를 도로 모셔올 것을 간청했으므로
오토도 깊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어머니를 영접하러가서 진심으로 죄의 용서를 청했다.
 
마틸다 황태후는 이와 같이 다시 궁중의 사람이 되었지만
호화로운 생활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고
다만 마음대로 불쌍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을 좋아할 뿐이었다.
그녀의 자선 사업의 공적은 그녀가 죽은 후 6년에 걸쳐 편찬된 전기에
 자세히 실려 있지만 그 일부를 들어보면
"성녀는 하루 두번씩 빈민에세 식사를 제공했고 자신의 음식 중에서 맛있는 것은
 불쌍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토요일은 남편의 기일(忌日)도 되고 주일의
 전날도 되므로 특별히 더 많은 어려운 이들을 도와 주고
아울러 빈민을 위해 목욕물까지 마련해 주며 손수 심부름을 해 주는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마틸다의 기도에 대한 열성은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종종 밤중에도 시녀(侍女)와 함께 일어나 성당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평일에는 다윗의 시편 150편을 빠뜨리지 않고 외웠다고 한다.
 
955년, 마침 성녀가 궤돌린부르크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을 때
바바리아 후작이던 아들 하인리히의 부고가 왔다.
그러자 마틸다는 즉시 수녀들에게 그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빌어주기를 부탁하고,
아울러 고인이 된 남편과 자녀의 행복을 빌 목적으로 노르트하이젠에 여자 수도원을 세웠다.
그 뒤 천국으로 갈 날이 가까워 온 줄을 안 마틸다는 남편의 옆에 묻어주기를 원하며
그의 묘가 있는 궤돌린부르크 수도원에 가서 968년 3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프리슬란드-덴마크의 귀족 가문인
 그라펜 디트리히의 딸로 태어난 성녀 마틸다(Mathildis)는
909년 작센(Sachsen)의 공작인 하인리히(Heinrich)와 결혼했다.
919년 하인리히가 독일의 하인리히 1세 국왕이 되자 독일 여왕이 된 그녀는
슬하에 다섯 명의 자녀들을 두었는데, 훗날 독일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오토(Otto), 프랑스의 루이 4세와 결혼한 게르베르가(Gerberga),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인
 하인리히, 프랑스 카페(Capet) 왕조의 위그 카페의 어머니인 하드비히(Hadwig),
그리고 쾰른(Koln)의 대주교가 된 성 브루노(Bruno, 10월 11일)가 그들이다.
   그녀는 32세에 과부가 되었는데, 이때 아들인 오토 1세로부터 극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심이 뛰어났으므로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동생 하인리히가 형인 오토 1세에게 반기를 드는 판국이니 그녀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그녀는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 곳이나 세웠고, 만년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녀는 죽기 전에 그녀의 아들 오토 1세와 화해를 하고 968년 3월 24일 사망하여
 궤틀린부르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과 교회의 후원자로서 큰 공경을 받는다.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