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공간 ▒▒/∞·오늘의성인

1월 11일 성 테오도시오 / 코리의 성 토마스

Berardus 2022. 1. 10. 18:51
 


1월  11일
성 테오도시오


St. Theodosius, C
St. THEODOSIUS the Cenobiarch
St, Theodosius of Cappadocia
Born:423 at Garissus, Cappadocia (modern Turkey)
Died:529 at Cathismus of natural causes; buried in the cave he first used when became a hermit;
it became a noted site for pilgrimages and miracles
Canonized:Pre-Congregation
Name Meaning:Cenobriach = head of people living a life in common


성 테오도시우스(또는 테오도시오)는

 30세쯤 되었을 때 집을 떠나 팔레스티나(Palestina)에 정착하여
베들레헴과 가까운 곳에 작은 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체는 급속도로 번창하였는데 이곳의 수도자들은 국적과 언어가 다양하였으며
주로 병자와 노인 그리고 정신 이상자들을 돌보았다.
그의 친구이자 동향사람인

성 사바스(Sabas)를 팔레스티나의 모든 은수자와 회수자의 수장으로 앉힌 후
자신은 그전처럼 이 작은 공동체에서 수도자들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105세경에 운명하였다.
-(가톨릭홈에서)-

 

*성 사바스 축일: 12월5일.게시판1507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테오도시오는

423년 카파도치아의 어떤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양친의 교육을 받고 경건하게 자라났다.

그리고 그는 경건하고 성실하기 때문에 어리지만 특별히 뽑혀

미사 때 성서를 낭독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의 일이다. 그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 1)

하신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나서 성령의 비추심을 받고,

그것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구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성지 팔레스티나로 순례의 길을 떠나 구세주의 생활과 수난을 연상케하는

모든 지방을 순례(歷訪)하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가르쳐 주시도록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던 중 의외에도 예루살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옛날 탑속에 론지노라는 신심 깊은 은수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테오도시오는 그리스교적 완덕의 지도를 받으려고

 그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어느 부유한 부인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길가에

 한 성당을 세우고 테오도시오를

주임 신부로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론지노에게 간청했다.

 테오도시오는 고요한 곳에 숨어서 하느님과 같이

지내는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은사의 권고도 있고 해서 순명하는 뜻으로

그 직무에 취임하게 되었다.

 

후에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그의 소문이 널리 곳곳에 퍼졌다.

사람들은 영적 문제에 대해서 그의 의견을

들으려고 무리를 지어 모여 들었다. 그러나 그는 허망한 명예욕으로

 자기 마음이 더러워질까 염려해 즉시

번화한 도로변에 있는 성당을 떠나 인기척 없는 산에 올라가

 그곳에서 30년간이나 명예와 세속을 끊고

오로지 고행과 기도로 그날 그날을 지냈다.

 

그는 그동안 빵 같은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었다.

그가 거처하는 동굴 부근에 있는 이름도 모를 풀이나

채소만이 그의 일상 음식물이었다. 그는 또 기도나 묵상을 좋아한 나머지

 수면시간도 몸에 해가 되지 않을

범위 내에서 극도로 줄였다. 그로 인하여 생긴 시간은 모두 사랑하는 하느님과

 친밀히 교제함으로써 보냈다.

그러나 그렇게 고요하고 정막한 곳인데도 청년들이 많이 모여왔다.

그들은 테오도시오가 기거하는 근방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며 그의 모범과 지도하에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 제자들에게 몸으로만 세속을 떠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떠나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는 새로이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그들 자신의 무덤을 파게 했다.

이는 그와 같이 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게 없어진다는 것을

 그들의 눈에 똑독히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는 큰 수도원을 세웠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거룩히 같이 지내며

기도와 덕행으로써 서로 도우며 합심해 덕을 닦으면서 천국의 길을 걸어가기 위함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형제들을 위해 제정한 규칙은 죽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 뿐이었다.

스승이 몸소 겸손으로 좋은 표양을 주셨기 때문에 형제들 사이는 언제든지 원만했고

 서로 남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갸륵하고도 상쾌한 우정이 엿보였다.

하루는 형제들이 서로 의견의 불일치로 싸우고 있었는데,

 테오도시오는 그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사랑이 끊어지지 않기를 빌었고, 두 사람이 화목할 때까지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던 중에 성 테오도시오도 사랑하는 고독 안에서만 그저 평안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에는 천주성만 있을 뿐 인성은 없다고 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 황제는 백방으로 유인하여

테오도시오를 이단의 편으로 끌려고 했다.

그 이유는 성인이 사제들의 사이에서나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그에게 많은 돈을 보내어 세상의 재물로

유혹해 진리를 버리게 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성인은 그 돈을 남김없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또한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지금에 와서 변절 (變節)한다는 것보다

 도리어 참된 신앙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을 더 원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교회에 있어서 이단의 설이 전해 내려온다면

 차라리 성당을 일절

다 태워 없애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 그는 고요한 수도원을 떠나 밖으로 나와서 동분서주하며

거룩한 신앙의 열정이 폭발하는대로

열렬한 말로써 성스러운 신앙에 머무르라고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자기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도 총 동원해

이 중대한 사명에 노력하도록 했으나 그것이 황제의 비위를 거슬려 성인은

국외로 추방당하는 비통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오래지 아니하여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인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오랫동안 병고로 신음하다 105세의 고령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랐으나,

 그 후 그의 전구로

인해 많은 기적이 나타난 것을 보면 얼마나

 이 하느님의 일꾼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 왔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단성론  單性論  Monophysitism
육화(肉化)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본성(本性)만을 가지고 계신다고, 다시 말해
그분의 인성(人性)이 그분의 신성(神性)에 의해

 완전히 흡수 통합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단적 오류.
-(현대 가톨릭 수첩에서)-

 

그리스도단성론
라틴어  monophysitismus  영어  monophysitism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성(性),

즉 인간이 된 신성(神性)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단설.

 이 설에 따르면 예수의 인성(人性)은 ‘바다로 떨어지는 꿀방울이 바다에서 녹아 버리듯’

신성에 의해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폐기되고, 인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실재는 허상(虛像)으로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은 우리의 인간성과는 다른 모습을 취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스도의 중재적 활동과 구속(救贖)은 허공에 뜬 논의로 되고 만다.

 이 설의 주창자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한 수도원의 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이며

 알렉산드리아가 총대주교인 디오스쿠루스(Dioscurus)가 지지하였다.

단성론은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그 후에도 단성설은 동방 교회에서 계속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삼장 논쟁', '성화상파괴 논쟁' 등의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1월  11일
코리의 성 토마스


San Tommaso da Cori Sacerdote
Cori (Latina), 4 giugno 1655 - 11 gennaio 1729
Beatificato da papa Pio VI il 3 settembre 1786.
Canonizzato da papa Giovanni Paolo II il 21 novembre 1999.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 binoculars, from the Hebrew
  

이탈리아 벨레트리(Velletri)의 코리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는

 매우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자비심 많은 어느 사제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를 도와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왔고 또 로만 캄파니아(Roman Campania)에서

 양치는 일에 오랫동안 종사해야만 하였다.

그는 양치는 동안에 친구들과 잡담하는 대신 혼자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을 관조하며 묵상하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기도와 관상하는 습관이 붙었다.

양친을 잃은 뒤 성 토마스는 22세의 나이로 코리에 있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6년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수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항상 한적한 곳을 찾아

 그곳에서 관상생활에 몰두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그는 허락을 받고 수비아코(Subiaco)와 인접한 치비텔라(Civitella)로 갔다.

그가 한 번은 성당에서 성체를 영하던 중에 탈혼에 빠져들었는데

 성합을 손에 든 채로 천장까지 떠올라 잠시 있다가 밑으로 내려와서

 형제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준 적이 있었다.

또 그는 식탁에 놓인 빵을 모두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회원들이 식탁에서 빵을 모두 치우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만일 마음이 기도하지 않으면,

혀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 그는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된 후 1999년 11월 21일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가톨릭홈에서)- 

 

 

♬ 태양의 찬가

 

San Tommaso da Cori Sacerdote
11 gennaio - Comune 
Cori (Latina), 4 giugno 1655 - 11 gennaio 1729

Nacque a Cori (Lt) il 4 giugno 1655 e venne battezzato con il nome di Francesco Antonio Placidi.

A 14 anni restò orfano, facendosi così carico dell'intera famiglia. A 22 anni entrò nell'ordine

dei Frati minori francescani, nel convento della Santissima Trinità in Orvieto, assumendo il nome di frà Tommaso.

Per 5 anni fu allievo del celebre Lorenzo Cozza e nel 1683 a Velletri fu consacrato sacerdote diventando

anche predicatore. Esercitò l'apostolato nella diocesi di Subiaco e in quelle confinanti con tale successo

da essere indicato fin da subito come «l'apostolo del Sublacense». Le sue predicazioni furono raccolte

in un volume manoscritto. Nel suo apostolato si distinse per la pratica esemplare delle virtù cristiane.

Più volte durante la Messa ebbe diversse apparizioni. Compì anche alcuni miracoli.

Ma il suo nome è legato soprattutto alla grande opera dei «Ritiri» dell'Ordine francescano.

Seguendo l'esempio del beato Bonaventura da Barcellona, fondò i «ritiri» di San Francesco a Civitella

(ora Bellegra) e a Palombara Sabina. Tommaso morì a 74 anni, nel 1729. (Avvenire)

Etimologia: Tommaso = gemello, dall'ebraico
 
Nacque a Cori (Latina) il 4 giugno 1655 e al battesimo fu chiamato Francesco

 Antonio Placidi; già a 14 anni era orfano di entrambi i genitori, e così ancora ragazzo dovette

mandare avanti da solo la famiglia. A 22 anni, sistemate in modo decoroso le due sorelle,

entrò nell’Ordine dei Frati Minori Francescani, nel convento della SS. Trinità in Orvieto il 7 febbraio 1677,

 cambiando il suo nome di Francesco Antonio in quello di frà Tommaso.
Per 5 anni fu allievo del celebre Lorenzo Cozza e nel 1683 a Velletri fu consacrato sacerdote

ricevendo nel contempo la patente di predicatore. Esercitò l’apostolato nella Diocesi di Subiaco e in quelle

confinanti con tale successo e profitto per quelle popolazioni, da essere classificato come

 "l’apostolo del Sublacense".
Grande maestro di santità, espertissimo direttore spirituale, fu veduto più volte stare nel confessionale,

"dalla mattina fino a sera" digiuno.
Le sue efficaci predicazioni furono raccolte in un volume manoscritto; era molto richiesto per

l’assistenza spirituale al letto degli infermi. Aveva il dono di riportare la pace serafica fra persone in contrasto,

operò per riformare i pubblici costumi.
Sin da novizio divenne esempio di perfezione cristiana e religiosa e come tale, specchio per

 i suoi confratelli, compreso quelli più anziani. Ancora in lui si condensarono tante altre virtù così

come viene riportato dal "Sommario dei processi" istruiti per la causa di beatificazione: la povertà.

Non volle mai accettare offerte per la celebrazione della s. Messa; l’umiltà, giunse perfino a farsi

calpestare dai confratelli all’ingresso del refettorio; una grande pazienza nel sopportare continue

tentazioni nello spirito e per una piaga in una gamba che lo tormentò per quarant’anni.
Pregava così profondamente assorto da sembrare fuori di sé e immobile come una statua.

Gesù Bambino gli apparve più volte durante la celebrazione della Messa. Ebbe il dono dei miracoli,

come la moltiplicazione di cibi, guarigioni, ecc., frequenti estasi, apparizioni di Gesù, della Vergine, di s.

Francesco.
Ma il suo nome è legato soprattutto alla grande opera dei "Ritiri" dell’Ordine Francescano.

Seguendo l’esempio del beato Bonaventura da Barcellona, fondò i ‘ritiri’ di S. Francesco in Civitella

(ora Bellegra) e di S. Francesco in Palombara Sabina.
Scrisse le Costituzioni del Ritiro che si conservano ancora autografe a Bellegra, regole rigide

di meditazione e vita religiosa; il Capitolo Generale di Murcia del 1756 le estese

a tutti i ritiri dell’Ordine Francescano.
Molti venerabili confratelli compreso s. Teofilo da Corte passarono per il ritiro di Bellegra,

che divenne così una fucina di aspiranti in santità.
Tommaso morì a 74 anni, l’11 gennaio 1729.
La causa di beatificazione fu introdotta il 15 luglio 1737, auspici le Diocesi di Subiaco,

Velletri e Sabina.
Beatificato da papa Pio VI il 3 settembre 1786.
Canonizzato da papa Giovanni Paolo II il 21 novembre 1999.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17-Jul-2001
Letto da 2100 pers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