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신앙살이]
작은 일에 충실하기
개갑장터순교성지에 수도원과
순례자 쉼터 공사를 막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포클레인이 와서 터 파기와 부지 정리를 한 후에는
잡석과 흙을 실은 대형 트럭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작업복을 차려입은 여자분이 딱히 하는 일 없이
공사 현장 입구에 서 있었습니다.
그분은 때가 되자 작업자분들과 점심 먹으러 가고,
오후에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듯하다가 일이 끝나자 집으로 갑니다.
가끔 차들이 지나갈 때면 뭔가를 하는 것 같은데 중요한 건,
그분에게도 하루 일당이 꼬박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그분에게 지급되는 돈이 아까워,
하루는 공사 현장 사무실을 찾아가 소장님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소장님, 공사 현장에 여자분이 계시는데, 혹시 무슨 일 하는지 아세요?”
“그럼요. 제가 아는 분께 부탁해서 오신 분이에요.”
“아, 그렇구나. 그런데 현장에서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 일당은 계속 나가는데….”
“예. 그래도 그런 분이 현장에 있어야 해요.”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여기는 좁은 농지 도로잖아요.
그리고 공사 차량도 다니지만, 일반 차량이나 경운기, 트랙터 등도 다녀요.
그래서 그것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혹시 공사비도 아낄 겸 그 일은 내가 직접 하면 안 될까요?”
“신부님, 신부님은 여기 현장의 최고 책임자예요.
그 일을 맡으실 순 없죠. 그분에게 돈 나가는 것이 아까우면 공사를 하지 말아야죠.”
내가 분위기 파악을 잘못한 것 같아 -
사무실을 조용히 나왔습니다.
다음 날, 현장 소장님이 내가 있는 성지 사무실로 오셔서
상황을 친절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신부님. 요즘 공사 현장 안전 관리가 무척 까다로워졌어요.
그래서 공사 차량이 다닐 때 차량 수신호를 해 주는 분이 없으면 벌금을 물어요.
음, ‘현장 안전 관리사’들이 불시에 공사 현장에 오는데,
그럴 때 차량 수신호자가 없으면 고발되거든요.
그러면 공사는 멈추게 되고, 현장 소장인 나는
안전 관리 공단에 가서 경위서를 쓰고 벌금도 내야 해요.
그러면 금전적인 손실이 아마도 몇 백만 원은 될 거예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모두 힘들잖아요.
그래서 차량 수신호 하는 분의 역할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있어야 이 공사가 진행될 수 있답니다.”
대기업 건설현장에서 수십 년 동안 책임자 역할을 맡으신 소장님.
작년에 정년퇴임을 하신 후, 외양간 경당 뿐 아니라 수도원과
순례자 쉼터 공사에 재능 기부하시고자 서울에서 내려 오셔서
당신 사비를 들여가며 헌신하는 소장님.
그런 분이지만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공사비가 없다는 이유로 작은 일들을 놓치면
결국은 큰일도 놓치게 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 수도회의 정신 중에 ‘점성 정신’이 생각이 났습니다.
‘점처럼 작은 것에 소홀함이 없고,
점처럼 지나치기 쉬운 찰나에도 깨어있는 삶을 살라’는 창설자 신부님의 말씀.
그래서 매일 아침 기도할 때마다 ‘점성’을 삶으로 살겠다며
입으로 크게 외쳐보지만, 정작 ‘점성’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작은 일을 소홀히 하려는 내 모습!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 ‘작은 일’을 충실히 하려는 노력은 결국
삶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뼈대가 됩니다.
그런데 ‘작은 일에 충실하기’, 입으로 외칠 때에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삶으로 살려고 하면 -
‘대충대충’이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내 자신이 그저 부끄러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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